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1]

회고전 계기로 본 히치콕 베끼기의 역사

4월4일부터 4월1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히치콕 회고전’이 열린다. 수없이 많은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서스펜스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히치콕. 히치콕과 그를 따르는 히치콕주의자들의 관계를 따라가며 그 간격의 폭을 재본다. (서울시네마테크는 5월 중순 히치콕 회고전 2탄을 준비 중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히치콕이 서스펜스만을 다루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가 가장 덜 지루한 영화감독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1925년 <쾌락의 정원>으로 데뷔하여 76년 <패밀리 플롯>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총 54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히치콕이 흥행에 실패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을 사로잡는 감독이었다. 누벨바그 세대는 그런 히치콕을 전면에 세워 영화의 본질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라고 트뤼포는 히치콕의 독창적인 위치를 못 박았다. 트뤼포의 말은 눈먼 찬사라기보다 이를 데 없이 정확한 포착에 가깝다. 히치콕의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치밀한 조합만으로 어떻게 영화가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먼저 영화적 방법으로,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해왔습니다”라고 히치콕은 화답한다.

히치콕, 모방불가능?

그의 영화적 독창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용어인 서스펜스는 가장 평범한 장소에서, 가장 안이한 순간에 벌어지는 범죄에 의해 조장되었다. 그의 서스펜스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만들어냈던 것처럼 내러티브에 기인한 서스펜스가 아니었다. <무대공포증>의 드레스에 묻은 피, <의혹>의 전구를 넣어 발광하는 우유, <이창>의 창문 너머 보이는 붉은 담뱃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상공 위의 비행기, <마니>의 장갑에 묻은 피, <해외특파원>의 거꾸로 돌아가는 풍차, 영화 이론가 파스칼 보니체르가 ‘오점’이라고 명명하는 그것들이 평이한 상황 안에 들어와 박힐 때 그의 영화는 순식간에 ‘낯선 친숙함’의 두려움으로 돌변한다. 히치콕은 그것을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서스펜스는 내러티브의 전개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히치콕적 서스펜스’는 그 자체로 개념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히치콕을 숭배하는 ‘히치콕주의자’들이 생겨났다. 그는 영화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인용되고, 반복되었다. 히치콕주의자들은 그의 영화를 한편씩 골라 패러디하고, 그의 영화적 소재를 본떠 다른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그의 영화적 형식을 변형하여 창조를 모색하고, 그의 영화적 테마를 질적 변화시켜보려 노력했다. 여기 몇 가지의 사례가 있다.

잊을 때쯤 되면 영화 한편씩 만들어내는 감독 겸 배우 대니 드 비토는 히치콕의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의 스토리를 가져와 <환상살인>(Throw Momma from the Trai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신경질적인 엄마(마치 <싸이코>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등쌀에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있는, 물론 장가도 못 가고 있는 늙고 뚱뚱한 아들(대니 드 비토)은 괴롭기만 하다. 그는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는 시나리오 선생(빌리 크리스털) 역시 문제가 있다.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영화 <열차 속의 이방인>을 보던 이 늙은 아들은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다던 시나리오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본 교환살인을 시나리오 선생에게 똑같이 제안한다. 엎치락뒤치락 코미디가 벌어진다. <환상살인>은 농담 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앤서니 윌러의 스릴러 <무언의 목격자>가 히치콕적 서스펜스라고 불렸던 오해보다는 솔직한 편이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고소공포증>이란 제목으로 패러디한 멜 브룩스의 코미디보다는 못하지만. <커먼 웰스>의 알렉스 드 이글레시아가 <매트릭스>의 효과와 <스타워즈>의 인물에 <싸이코>의 수직과 수평의 오프닝 크레딧을 덧입히는 정도의 농담보다 훨씬 더 귀엽다. 생각해보면, <열차 속의 이방인>의 소재는 충분히 코미디화해볼 소지가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교환살인을 소재로 한 이 영화를 ‘죄의 전이’(<밧줄> <나는 고백한다>와 함께)에 관한 영화로 만들었다. 히치콕은 흥미를 위해 영화의 주제를 버린 적이 없다. 이게 바로 히치콕과 히치콕주의자들의 우선하는 차이점이다. “‘히치콕의 터치’는 기껏해야 패러디나 패스티시화할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모방불가능”할 뿐이라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단정을 입증하는 수준일 뿐이다.

히치콕, 변형하는 순간 멀어진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이창>과 <싸이코>의 내러티브를 좀더 정교하게 조합하여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클레어는 옆집에 이사온 남자가 부인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이웃에서의 살인 의혹. 이건 <이창>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원지는 자상하게만 보이는 미치광이 남편에게 있었다. 이건 <싸이코>다. 남편의 이름은 바로 노먼(<싸이코>의 노먼 베이츠의 이름을 딴)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영화의 전반부를 <이창>의 구조에 기대고, 후반부를 <싸이코>의 소재로 채워넣는다. 버나드 허먼식의 음악이 울려퍼지고, 여주인공은 <싸이코>의 자넷 리와 똑같은 자세로 욕조에서 넘어진다. 마침내 물속으로 가라앉는 자동차. 히치콕적 소재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히치콕의 정수는 불려나오지 않는다. <이창>과 <싸이코>에는 있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제약과 무지. 만약 <이창>에서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존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한정된 시선은 쓸모없는 것이 됐을 것이고, 창문은 스크린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망원경으로 보는 제프리의 시선에 관음증적으로 동일화되는 관객의 시선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도망갈 처지도 아니다. <싸이코>에서 노먼이 무서운 건 그의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왓 라이즈 비니스>에서 클레어의 남편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다.

반면, 테리 길리엄의 가 한순간 전율을 일으키는 것은 히치콕의 영화를 패러디도, 모방도 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그냥 보여줬기 때문이다(구스 반 산트는 이런 태도를 확장해서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그는 몇개를 제외한 모든 숏을 똑같이 찍었다. 히치콕을 변형하는 순간 히치콕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했던 것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에 나오는 <현기증>의 장면은 다른 할리우드영화들의 허름한 모방욕망과 동떨어져 히치콕의 진심을 되살린다. 에서 자꾸만 멸망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남자는 추적의 도피처로 극장에 들어간다. 거기서 <현기증>을 본다. <현기증>의 두 주인공 스코티와 마들렌(또는 쥬디)이 미국의 ‘시간’을 새겨놓은 나이테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는 정지 이미지만으로 ‘과거지속’을 재현해낸 크리스 마르케의 실험적인 영화 <방파제>를 극화한 것이다. 테리 길리엄은 <현기증>이 시간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로메르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다. 누구 못지않은 히치콕 숭배자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이창> <너무 많이 안 사나이>와 삼부작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염소좌 아래> <나는 고백한다> <누명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이 주력했던 ‘비극적 도덕’이라는 주제와 갈라서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시간 속에서의 상실의 감정을 창조”하는 영화로 보았다. <현기증>에서의 환경은 시간에 의해 구축되고, 더욱이 과거에 의해 방향지어진다고 말해주었다. 바로 ‘회상’. 그러니 가공되지 않은 <현기증>의 한 장면은 <12 몽키즈>의 전체를 압축하고도 남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