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격정을 선계(仙界)에 묻었노니<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마지막 촬영현장에서 김기덕 감독을 다시보다
김기덕 감독이 연못에 절을 짓고 동자승과 노승의 삶을 사계의 변화와 함께 담고있다. “순수 속에 잔인함과 욕망 속에, 살의 속에, 번뇌 속에 해탈을…. 기가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단풍처럼 변하고 썩어 이슬로 땅에 스며드는 사람이,사계절의 반복과 무엇이 다른가?” ‘김기덕’과 ‘해탈’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궁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기덕은 무심한 얼굴로 새로운 영토에 들어섰다. 남동철 기자가 경북 청송 주왕산국립공원 내 <봄 여름…> 촬영지인 주산지 암자세트를 찾았다. - 편집자
“이거 장난 아니에요. 완전 <타이타닉>이에요.” 물 위에 세트를 지은 <섬>의 촬영지, 경기도 안성의 고삼저수지에서 김기덕 감독은 농담삼아 이런 인사말을 건넸다. 취재진을 태우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촬영장을 향하던 버스가 주왕산 입구에 접어들자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나룻배 한척을 댈 수 있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와 노란색으로 칠한 좌대를 띄워놓은 <섬>의 세트가 김기덕의 <타이타닉>이라면 호수에 절 한채를 올려놓은 이번 영화는 김기덕의 <타이타닉2>라 이름붙여도 될 것 같다. <봄 여름…> 촬영장에 가기 전 사진으로 본 <봄 여름…>의 사찰 세트는 <섬>의 좌대처럼 맑은 호수 위에 단아하게 떠 있었다.
아, 이곳이 ‘선계’이련가!
<봄 여름‥> 마지막 장인 `다시 봄` 촬영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조명없이 자연광으로 찎는데다 현장 상황에 따라 콘티를 순식간에 바꾸는 김기덕식 스타일에 이틀 촬영분량을 하루에 마쳤다.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던 버스가 마침내 <봄 여름…>의 촬영지인 주산지(注山池)에 이르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산기슭에 청명한 숲의 공기를 머금은 호수 주산지, 잔물결 하나없이 평평한 그 물 위에 떠 있는 수백년 전부터 있음직한 절의 존재는 갑자기 선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장이모의 <영웅>에서 양조위와 이연걸이 대결을 벌이던 명경(明鏡) 같은 호수를 여기 경북 청송의 산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 줄이야. 잠을 설쳐가며 5시간 동안 차를 타고온 피로가 확 깬다. 경치 좋은 곳에서 찍는다고 훌륭한 영화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런 절경의 사계절을 담는 영화라면 왠지 만드는 사람들도 신이 날 것 같다. 최소한 양수리종합촬영소의 실내세트장에서 종일 먼지를 들이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게 아닐까? 취재진을 인솔한 <봄 여름…> 프로듀서 김상근씨는 이곳 주산지가 300년 전 왕의 명으로 지은 호수라고 설명하면서 단풍이 물든 가을엔 정말 좋다고, 민박집 식탁에 자연산 송이가 가득 올라올 만큼 먹을 것도 많다고 자랑한다. 나중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주산지는 1720년 8월 조선 숙종 46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경종 원년에 준공한 호수. 길이 10m, 넓이 50m, 수심 8m 규모이며 약 150년 묵은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여 그루가 몸의 절반을 물속에 담근 채 자생하는 비경이지만 널리 소문이 나지 않아 찾아오는 관광객은 많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경치를 감상할 새도 없이 “슛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소리가 들린다. 촬영진은 기슭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물에 떠 있는 절을 멀리서 찍고 있다. <봄 여름…> 제작진은 지금 이곳에서 전체 5개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마지막 장이자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다시 봄’ 장면을 찍고 있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하다. 연출부원들이 개나리, 진달래 가지를 하나씩 들고 카메라 렌즈 앞에 들이밀고 있다. 3월30일, 한낮의 봄볕이 따사롭지만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은 탓에 봄장면을 찍기 위해 택한 궁여지책이다. 꽃이 만개한 봄풍경을 찍으려면 5월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칸영화제 출품 시한을 넘기게 된다. 꽃이 핀 나뭇가지로 눈속임을 하는 수밖에. 자연의 변화, 시간의 흐름을 담는 영화의 컨셉과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런 풍경이 ‘김기덕답다’고 하면 비난으로 들릴까?
하지만 김기덕 감독에게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려서 찍으라는 요구는 무리다. 그는 장편극영화(<실제상황>)를 3시간30분 만에 촬영한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파란 대문>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해안선>에 이어 5번째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LJ필름 대표 이승재씨는 김기덕 영화의 촬영 스타일에 대해 “스탭들이 한 장면 세팅하고 있으면 다음 장면 찍을 곳에서 지시를 내리면서 스탭들을 재촉하고 이 영화 찍고 있는 동안 다음에 찍을 영화 얘기를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 촬영도 이틀간 찍을 예정이었는데 오후 4시경에 다음날 찍기로 한 분량까지 다 찍어버렸다. 3분 정도 에필로그에 쓰일 몽타주 장면을 찍는 것이라 빨리 찍을 수 있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현장에 조명기가 하나도 없다는 데서 발견된다. 야외에서 자연광으로 찍는 영화라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물의 클로즈업을 찍을 때도 조명 세팅은 따로 없다. 김기덕 감독은 “조명 설치하면 한 장면 찍는 데 2시간씩 걸린다. 그렇게 해서 더 좋은 화면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찍으면 내 스타일의 저예산영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3월 30일. 한낮의 불볕이 따사롭지만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은 탓에 개나리, 진달래 가지를 물에 심고 꽃이 만개한 봄풍경을 촬영했다.
속전속결, 촬영은 일사천리
오전 8시40분에 출발해 오후 1시가 넘었을 때 도착한 현장은 물 위 암자에서 동자승이 나룻배를 타고 뭍으로 건너오는 장면을 찍고 있다. 동자승으로 출연 중인 8살난 배우 김종호는 가는 팔뚝으로 열심히 노를 젓지만 배는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종호야, 오른쪽!” “종호야, 왼쪽으로만 저어.” 반대편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지만 쉽지 않다. 프레임 중앙에 반듯하게 배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으려던 감독은 이내 급한 성질을 참지 못해 즉석에서 컷을 나눠버린다. 하긴 누군가 배 아래에서 줄로 잡아당기는 특수효과를 쓰지 않는 한 배가 카메라 중앙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찍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현장상황에 맞게 순식간에 바뀌는 콘티는 김기덕 감독이 콘티없이 촬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콘티에 이 장면은 ‘롱숏, 롱테이크’라고 써 있다고 그렇게 찍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는 하루에 2∼3컷을 찍는 인내하는 타입의 감독이 아니다. 장소를 옮겨 오후 3시경 동자승이 계곡에서 뱀을 잡아서 갖고 노는 장면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똑같은 장면을 수십번 반복하거나, 조명 세팅을 하느라 촬영을 멈추는 일은 없다. 속전속결, 촬영은 일사천리다.
<봄 여름…>은 김기덕 감독이 2000년 <섬>으로 선댄스영화제에 갔을 때 구상한 이야기다. 그는 눈덮인 선댄스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삶을 사계의 변화에 비유하는 영화를 떠올렸다며 이렇게 말한다. “남의 나라에서 내 영화를 보여주면서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미국 기자들에게 <섬>을 보여주기 위해 <섬>에 나오는 자전거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등 열심히 홍보했는데 막상 <섬>을 상영하는 시간에는 혼자 지쳐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와서 선댄스의 눈을 보고 있자니 짧은 순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그리는 영화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에 대해 조심스레 “정말 내가 할 일이 뭔가 생각하면서 내가 동양 감독이라는 고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 어떤 면에선 김기덕 감독이 철저히 국제영화제용 영화를 만드는 것 아닌가, 의심할 여지가 있는 답변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과연 지금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지난해 LJ필름에서 <봄 여름…>에 모든 걸 집중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해안선>부터 만들어야 한다며 LJ필름을 벗어나서 혼자 제작·투자자를 구해보기도 했다. 결국 LJ필름에서 <해안선>과 <봄 여름…>을 모두 제작하기로 했고 <봄 여름…>은 지난해 5월 첫 촬영에 들어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