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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허우샤오시엔 특별전 [1]
이다혜 2003-04-11

허우샤오시엔은 어떻게 영화사적 사건이 됐나위대한 감독 허우샤오시엔의 위대한 미학적 모험

4월15일부터 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허우샤오시엔 특별전이 열린다. 뉴욕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그를 일컬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극영화 감독”이라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허우샤오시엔은 어떻게 세계 영화사를 다시 썼는가. 회고전을 계기로 위대한 이야기꾼인 동시에 위대한 형식주의자인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세계를 들여다본다. (4월26일부터 시네마테크부산에서는 허우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 편집자편집 이다혜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비정성시> 단 한편만이 정식 공개된 한국의 사정과 별 다를 바 없이 미국에서도 허우샤오시엔의 ‘난해한’ 영화들은 배급업자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들은 대만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의 이 영화감독이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현재의 영화감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예컨대 짐 호버먼 같은 평자는 허우샤오시엔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극영화 감독”이라고 부른다. 그럼 허우샤오시엔은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인가? 우선 이걸 명시하기 위해 다시 한번 다른 미국인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저명한 에세이스트이자 영화평론가인 필립 로페이트는 허우샤오시엔에 대한 이미지가 미처 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영화를 한번 상상해보라고 권유한다. 즉 사티아지트 레이나 비토리오 데 시카의 날카로운 관찰력의 영화와 정밀하게 짜인 프레임 안에서 명상적 아우라를 풍겨내는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의 ‘초월적’ 영화가 교차하고 그 위에 마틴 스코시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거친 도시적 감수성이 가끔 배음으로 울리기도 하는 경우. 그것이 바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건 허우샤오시엔이 휴머니스트적 혈통을 제대로 이어받은 위대한 이야기꾼이면서 그렇다고 영화형식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뒤로 밀어놓지 않는 위대한 형식주의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볼 때 허우샤오시엔과 대등한 자리에 놓일 수 있는 현재의 시네아스트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프레임 안에 허우샤오시엔의 우주가 >> <비정성시>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부터 이미 허우샤오시엔은 평단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대상의 목록에 오른 존재였다. 아마 그건 무엇보다도 <비정성시>에서 한 정점에 오르기 전부터도 이미 매혹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허우샤오시엔적 스타일의 공이 컸을 것이다. 그것에서 평자들(특히 서구의)은 새로운 영화적 미학의 영역을 발견해냈다.

아주 간단히 말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어떤 대상을 거리를 유지한 채 정적인 자세에서 물끄러미 오랫동안 바라보는 식의 시선으로 먼저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또는 손사래치며 물러나게 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시선으로 빚어낸 그의 프레임은 분명 하나의 독특한 ‘지대’(zone)를 형성해냈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다. 이 ‘지대’란 관습적인 영화들에서의 프레임과는 달리 초점의 중심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고 또한 화면 밖 공간과의 소통에서도 제한이 별로 없는 그런 공간이다. 존재론적 리얼리스트로서 허우샤오시엔은 그처럼 무확정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공간 안에서 그 스스로 말한 바 있듯이, 인물들이, 그리고 공간과 장면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게끔 유도해냈다. 결국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종종 무언가 비어 있는 듯해 보이기도 하는 그 공간에서 슬픔이나 비애 같은 어떤 ‘감정들’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허우샤오시엔은 일본의 거장 미조구치 겐지가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인장이 확실히 찍힌 자신만의 우주로서의 자기식의 프레임을 구축해낸다.

한편으로 허우샤오시엔은 그처럼 영화형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스토리텔링의 문제 역시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네아스트이다. 사실 후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따지고 들어가보면 비록 할리우드식의 ‘매끄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허우샤오시엔 영화들의 내부에 내러티브의 어떤 선로가 놓여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그것이 중간중간 틈이 많은 다소 낯선 형태로, 그래서 오히려 독창적으로 구축될 수 있는 형태로 영화에서 드러날 뿐이다. 여하튼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은 삶의 미세한 결들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여타의 어떤 영화감독들과는 달리 그저 디테일들을 축적하는 데에서 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꾼/역사가로서의 영화감독 >> 그는 아주 창의적인 이야기꾼이다. 그런 이야기꾼으로서 그는 종종 역사가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 즉 이야기꾼/역사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대만의 근현대 역사를 이야기 속에 융합한 영화들, 이른바 ‘대만 현대사 3부작’이라 불리는 걸작들인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를 만들면서 특히 그는 세계 영화계의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 영화들 이전에 허우샤오시엔이 대만의 역사를 자기 영화 속으로 슬그머니 끌고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년왕사> 같은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영화이지만 그 후면에서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즉 본토에서 대만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결국에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시기까지를 다루면서 대만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은근슬쩍 던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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