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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산부인과>에서 <보리울의 여름>까지,박영규 스토리 [3]

애들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게

<보리울의 여름>

<라이터를 켜라>

“내가 우남 스님이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면서 갖고 갔던 거는 종교인 하면 연상되는 관념적 딱딱함 같은 걸 깨고 싶었던 거야. 저 스님은 수녀님하고도 연애할 수 있는 사람, 아이들하고 어울릴 때는 동심의 세계에서 막 놀 수 있는. 대사도 있죠. 어린애 같은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다. 우리 인간은 그걸 다 잊어버리잖아. 그러니까 우남 스님은 어른이 잊어버리고 있는 어떤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난 성경도, 불경도 공부 안 했지만 근본교리를 보면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 그런 거잖아. 내 마음에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없으면 행복이 없어져버린다구. 애들은 조금만 행복해도 자지러진다구. 조그만 일에 웃겨서 참지 못하고. 어른은 못 그런다구. <보리울의 여름>은 어른이 잃어버리고 있는 마음과 생각을 다시 생각해보는 거라구.”

마음속에 아이가 살고 있는 어른, 그건 미달이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빠 못지않은 욕심꾸러기 미달이가 들어 있어 골치아프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박영규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이유도 그 안에 천진한 동심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스톱치다 개평 때문에 승강이를 벌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간다. 점잖은 체 물러나지 않고 온몸으로 인터뷰하는 모습 역시 흔히 생각하는 어른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단순히 타고난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구속받지 않고 살겠다는 삶의 태도와도 연관된다. 박영규는 연극과 교수를 맡아달라거나 자서전을 내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책을 내면 책에 쓴 대로 살아야 하고, 연기를 가르치면 자신이 하는 연기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예술가로서, 배우로서 창의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거지.” 그의 삶이 아무리 미달이 아빠 같은 요소를 갖고 있다 해도 이런 점에선 전혀 다르다. 미달이 아빠라면 돈이 생기는 이런 일은 냉큼 챙겼을 것이다.

무척 적극적인 자세로 인터뷰에 응했지만 그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농담처럼 돌려 말한다. 그러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잠시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줬다.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가 생사의 고비에 놓여 있을 때 의사도 포기한 아들을 되살린 분이다. 박영규는 탤런트로 성공한 뒤 벤츠 몰고 고향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공고 전기과를 다녔지만 전기기사 시험을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가 결국 배우가 된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한다. “엄마, 나 그때 시험 안 보길 잘했지?” 어머니가 답한다. “그럼, 잘했지. 봤으면 전봇대에나 올라갔겠지, 뭐.”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남긴 유언도 덧붙인다. “영규야, 내가 넌 잘생기게 낳았잖니. 나 죽으면 형들 잘 돌봐야 한다.” 슬쩍 눈물이 고이는 듯도 보였지만 박영규는 그런 이야기를 모두 웃기는 말로 가공해 들려줬다. 그건 배우는 슬픔을 코미디로 바꿔 말하는 사람이라는 은밀한 전언 같다. 그렇다. 배우 박영규는 미달이 아빠, 그 너머에 있다. 가난과 설움, 배고픔과 시련, 재능과 훈련이 두텁게 쌓아올린 삶의 무게감은 미달이 아빠가 아니라 박영규의 것이다. 그걸 인정받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무심했던 시간들이 지금 박영규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 점에서 세상은, 공정하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장소협찬 성곡미술관

박영규 연기론 4장 "배우가 근성이 있어야지"

1장. 배우에겐 인간이 산소다 ‥

인간은 산소를 먹고살지만 배우는 인간을 먹고산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접촉하지 않고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감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나는 시골장터에 가도 그 사람들과 얘기하고 그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배우들이 자칫 놓치는 것이 뭐냐면요. 어느 정도 인기있는 스타가 되면 자기를 자꾸 싼단 말이야. 안 만날려 그러고. 피곤하지. 인상쓰게 되고. 그럼 사람들은 그런단 말야. 저 새끼 뭔데 저러는 거야. 그럴까봐 아예 접촉을 피해버린다고.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엔 어떠냐 하면 적극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러니까 시골가면 시골 아줌마, 어린이랑 어울릴려고 그러고 접촉을 많이 하려고 하고. <보리울의 여름> 마지막 촬영 마치고 파티할 때 나는 새벽 1시까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블루스 한번씩 다 땡기고 그랬어요. 그런데 동네 시골 노인네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잖아요. 내가 놀란 게 야, 세상을 살면서 항상 겸손해야겠다, 생각한 게 뭐냐면, 할머니 한분이 그러는 거야. 박영규씨가 이렇게 해주니까 박영규씨는 그래서 연기를 더 잘하시나봐요,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가만 생각해보라구. 아는 거야, 인간은. 못 배웠지만 오감으로 느끼는 인간적인 어떤 것, 어떤 마음이 있는 거야. 시골 할머니도 그걸 아는 거라. 저 배우가 인간적으로 됐다, 그러면 좋아하게 된다. 배우는 휴머니티를 먹고사는 거라. 그럼 그런 휴머니티가 나올 수 있게끔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거라. 그죠. 그래서 사람을 먹고사는 거야, 배우는. 우리한텐 인간이 산소야. 사람이 없으면 우리 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2장. 캐릭터는 생존게임이다 ‥

캐릭터는 그래. 생존게임이야. 캐릭터는 그 역할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생존이 있어야 돼. 그러니까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왜 사람들이 웃었냐 하면 이 사람은, 주유소 사장은 자기 주유소를 위해서 모든 쪽팔림과 자존심을 다 버린 사람이야. 노래 불러, 그러면 부르고 대가리 박어, 옛, 박는 거야. 그래. 어떻게든 시간 끌어갖고 지킬려고. “내가 사장인데…” 그러다가도 박어, 그럼 박고. 노래하라니까 “내가 사장인데 어떻게?” 하다가 물건 부수니까 “노래할게, 부수지 마, 노래하면 될 거 아냐” 그러잖아. 왜? 돈을 벌어서 이거 하나 지은 사람이야. 자기 모든 걸 바쳐서 주유소 하나 지은 건데 그걸 부수니까 자기 살덩이가 없어지는 것처럼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노래하라니까 노래하잖아. 그런 게 캐릭터야. 생존이 개입되지 않은 것은 캐릭터가 아냐. 내가 하는 거 보면서 왜 웃냐면 그 안에 생존이 있잖아. 장인, 동서 눈칫밥 먹으면서 눈물나오잖아.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면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꼬리 싹 내리면서. 미달이 아빠와 밉지만 밉지 않은 게 그런 거잖아. 누구나 그럴 수 있어. 회사에서 화나면 당장 사표 쓰지만 밤새 사표 써놨다가 부장이 ‘박 과장, 결제 서류 어떻게 됐어?’, 그러면 ‘아직 못했는데요’ 그러면서 비굴한 모습 보이는 게, 그게 사는 거잖아. 서랍에 사표가 있는데 이걸 못 내는 거야.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어. 우리 세상은 그래서 존재하는 거야.

3장. 고통의 시간이 배우를 만든다 ‥

박영규의 인생은 좋은 차 타고 다니고 즐거운 일만 있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런 거 아니야. 장국영이 죽은 거도 난 어느 정도 이해해. 그 외로움, 정말로 그 외로움, 있잖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외로워. 장국영 얼굴 보면 외로워 보인다구. 하드타임, 고통의 시간이 없으면 배우는 안 되는 거야. 어떻게 보통 사람처럼 살고 남을 감동시키고 남에게 자기 삶을 통해 용기를 주는 배우가 돼? 하드타임이 있으면 있을수록 많은 사람 감동시키게 되는 거야. 상식적인 사람 같은 사고로는 안 된다고. 배우들이 젊었을 때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걸로 잠깐은 먹어, 그리고 개성있는 애들, 그런 애들도 개성으로 잠깐은 먹어. 그런데 서른살만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인생이야. 자기 삶을 갖고 싸우는 거야. 그러니까 서른 넘고 마흔 넘으면 못 견디잖아. 심은하가 대표적인 경우야. 에이, 못하겠다. 곤조없는 사람은 못해. 내가 곤조있는 사람이니까 되는 거지. 내가 남하고 똑같은 배우 되려면 뭐하러 연기하겠어. 그럴 거면 뭐 근근이 개런티 받아먹고 살려면 뭐하러 살어. 어떤 것이 배우가 가야 할 길이야, 적어도 그런 싸움을 해야지.

4장. 슈퍼스타는 패스를 잘하는 사람이다 ‥

배우가 어떻게 늘 주인공만 하겠어요. 주인공만 해야 된다, 그런 건 굉장히 위험한 사고야. (축구에 비유해서) 나한테 공 안 주면 너네 골치 아퍼, 그런 사람은 슈퍼스타가 안 돼. 마라도나랑 펠레랑 차이가 있잖아. 태클이 들어오면 마라도나는 넘어져, 펠레는 안 넘어지거든. 내가 공을 줘야 될 때가 있고, 어시스트를 해줘야 될 때가 있다고. 정말 슈퍼스타는 내가 패스를 할 때 공을 받는 사람이 공의 정면을 결정적으로 제대로 맞힐 수 있게 타이밍과 거리를 정확하게 재주면서 할 때 그게 정말 슈퍼스타야. 배우도 마찬가지야. 조연을 하면서 주연이 골을 넣을 수 있게 제대로 패스해주는 사람, 그게 정말 슈퍼스타야. 축구선수는 10년밖에 못하지만 배우는 평생 그래야 돼. 그러니까 서두르지 않아야 돼. 나는 평생 싸워야 되는 축구선수야. 요때는 이렇게 패스하고 요때는 이렇게 어시스트하고 그러다 결정적인 때는 골도 넣어주고. 늘 그런 마음으로 살면 전체를 보는 관객 입장에선 그 사람의 궤적을 보면서 대단한 걸 보게 돼. 그러면 팔로우를 하게 된다고. <보리울의 여름>에서 주인공을 했지만 다음 영화도 주인공을 해야 된다, 그런 거 없어요.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게 대표적인 경우지. 여러 사람한테 볼 배급을 정확히 해주잖아. 딱딱 갖다주니까 걔들은 그냥 질러버리면 골이 들어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