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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본 <질투는 나의 힘>
심영섭(평론가) 2003-05-03

마초 남성들에게 한방

모 일간지에 남편과 정기적으로 영화대담을 하는 자리가 있다. ‘한 영화 두 소리’라는 대담 타이틀에 걸맞게 요번에는 똑 소리나는 한국영화에 대해 토론해보자는 모종의 암묵적 합의를 하고, 남편과 나는 <살인의 추억>을 보았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까 대담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일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지붕 한 마음 사수대회도 아니고, 부부간에 서로 안 봐주고 칼로 물 베기 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독자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뒤 본 것이 <질투는 나의 힘>이었다. 그런데 극장 문을 나오는 남편은 내내 불만 투성이의 얼굴을 하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연발했다. 분명 낄낄거리며 사이좋게 영화를 보아놓고는, 뭐가 그렇게 이해가 안 간단 말인가?

그런데 남편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조교 시절 원상의 입장은 무척 많이 경험했지만, 특히 문성근이 연기한 편집장 역의 윤식을 이해할 수 없노라고 했다. 예를 들면 바람을 피운 것을 들킨 장인 앞에서 ‘후회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편집장 윤식의 후회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살겠다는 고해성사인가, 지금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앞으로도 못 피울 거 같다는 미꾸라지 그물 빠지기식의 변명이었는가, 그도저도 아니면 그저 장인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앞으로도 주욱 여자나 꼬시며 살겠다는 자기 기만이었는가. 또 술에 취해 성연을 사장 앞에서 끌어안고 난리 블루스를 추는데, 윤식의 성격으로 보아 그건 박찬옥 감독의 오버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윤식이란 이름에서 ‘돌려먹는다’는 뉘앙스가 풍긴다는 둥, 해부학적인 번뜩임을 드러내는 이 사내가, 윤식과 똑같은 중년 남자인데다가 먹물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사나이가 윤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남편이 갑자기 더 괴기스럽게 느껴진 것은 자신은 주변에서 윤식 같은 남자를 많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이 어떤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다 달랐다. 나는 영화에서 관계를 보았고, 남편은 욕망을 보았으며, 모 여기자는 외로움을 보았고, 어린 제자들은 그저 혼돈스러워했다.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다른 사람과 섞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혼자 사느냐 일부일처제 안에서 기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들은 한 영화에 대해 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질투는 나의 힘>의 강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인물들도 그리고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도 ‘일관성의 부재’라는 거대한 아노미의 세상에 서로 부대끼고 출렁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해답도 던져주지 않고 선문답을 툭툭 던지는 것 같은 이 영화의 매력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다른 모양으로 지각되었던 국제빌딩을 처음 보았을 때의 신기함. 벗기고 또 벗기고 싶지만 신비에 싸여 있는 아련한 사내와 연애했을 때와 비슷한 모호함의 미덕과 악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관성의 기대를 버린

필시 아줌마 평론가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의 소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질투는 나의 힘>은 분명 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마초 남성들에게 한방 먹이는 구석이 있는 여성영화이다. 이 영화가 일단 관습적 영화보기의 틀 내에서 이물감을 느끼게 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종래의 우리가 생각하는 캐릭터의 일관성의 기대를 저버리며 이상한 갈지자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그것을 탈중심화라고 부른다면 홍상수 감독과 구별이 안 되는 지점으로 박찬옥을 몰고가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단어는 사양하겠다). 그러나 더 가만히 이 영화를 들여다보면 이 영화의 인물들, 특히 남자들의 행보를 붙잡는 결정적인 욕망의 법칙 중 하나는 권력이라는 게임의 술수이다. 즉 원상과 윤식은 그들이 만나는 관계가 남성이냐 여성이냐, 수직적인 관계냐 수평적인 관계냐에 따라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원상은 내일 논문이 마감일이 걸려 있자, 하숙집 딸에게는 왜 그렇게 할 일이 없냐는 퉁명을 떨지만, 편집장이 술집에서 부르자 결국에는 달려나간다. 윤식 역시 성연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하자 그녀를 순순히 놔주지만, 부하인 원상이 일이 있어서 못 나가겠다고 하자, 택시 값을 주겠다며 자신에게 오라고 강제를 부린다(그러나 막상 원상이 그곳에 갔을 때, 윤식은 자리를 뜨고 없다). 인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심지어 그들이 물을 대하는 태도와도 아주 흡사해서 아무런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행동에 묘한 일관성을 부여한다. 윤식은 수돗물은 똥, 오줌으로 모두 오염되어서 생수만 마신다고 하고, 원상은 성연의 집에 가서 수돗물을 마셔야만 하자 냄새를 맡아보고 주전자로 끓여 먹는다.

이 와중에 인간에 대해 혹은 사물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게 대하는 유일한 사람은 사진작가인 성연이다. 한국 영화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여성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성연이라는 캐릭터는 자유주의자면서 독립적이고 애정이나 결혼이라는 관계의 금 위에 매여 있지 않다. 그녀는 의사가 곡기를 먹으라고 하자 밥이 아닌 뻥튀기를 사다 먹으며 윤식이나 원상과 달리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그런 여자이다. 수의사라는 모성적인 작업과 사진이라는 한순간을 잡아내는 예술적인 작업을 같이 할 수 있고, 남을 찍지만 자기도 찍을 수 있는 그런 여자. 머리 안에 금이 별로 없기에 융통성이 있는 그녀의 캐릭터가 가장 매혹을 발휘하는 대목은 윤식이 그녀와의 잠자리에서 왜 키스를 하지 않냐고 물어보자 그에게 그.냥. 키스를 해주는 대목이다(허문영 편집장은 성연이 원상과는 키스하지만 섹스하지 않고, 윤식과는 섹스하지만 키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니다. 그녀는 윤식이 원하자 가볍게 키스해준다). 또한 이 자그마한 순환론적인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제법 위에 있어 보이는 편집장에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위계의 가장 밑에 있을 법한 하숙집 딸, 혜옥이었다.

그러나 성연은 외로워한다. 성연의 속내가 가장 절절하게 감지되는 대목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우리 여관 가요. 누가 한 말 반대로 하고 싶어”라고 했던 오뎅 먹는 장면이 아니라, 그뒤 그녀가 택시 안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하는 장면이다. 친한 친구가 자기 아이와 오롯이 같이 잘 때 그 옆에 누워 있는 그녀가 느낄 외로움, 자신이 같이 잔 남자의 아내와 대면했을 때 그녀가 느낄 복잡한 심정들. 박찬옥 감독은 원상과 내경(배종옥이 1인2역을 한) 혹은 원상과 성연이 헤어짐을 반복하는 극적인 순간 제삼자의 시선을 툭툭 개입시키며 그들을 멀리한다. 그러나 막상 성연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남겨져 있을 때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남자들의 심리적 틈을 잔인하게 벌려

나에겐 바로 그것이 보였다. 남편을 비롯한 많은 남성 평자들이 원상과 윤식이 나란히 누워 오이디푸스적인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을 즐거워할 때, 그것은 거꾸로 감독의 독설로도 들렸다. 성연이 영화에 떡하니 처음 나와서는 “위와 자궁이 비슷해서 구분이 안 간다”고 말할 때, 내게는 먹는 장소와 섹스하는 장소가 비슷하다고밖에 들리지 않는 이 선언은, 이후 정말 주인공들이 먹고 자고 하는 장면을 쉬지도 않고 보여주다 마침내 두부조림을 나눠 먹는 두 사내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윤식의 딸의 시선으로 처리된 이 관계는 결코 이 둘이 서로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외부자의 시선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남성 평자들이 ‘친밀감의 공모’로 본 이들 사내들의 관계는 뒤집어보면 ‘어떻게 다시 한번 사내들은 가부장제의 그물을 짜느냐’에 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곤 떠올랐던 것은 화면에는 없지만 자유주의자라서 그저 괜찮아 보이는 성연의 남겨진 모습과 원상이 남겨준 전세금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혜옥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박찬옥이란 여성감독이 원상의 편에서 남성들을 마냥 너그럽게 관찰하는 그런 감독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스타일이 참으로 매혹적인 까닭은 그녀의 영화적 어법이 깊게 숨겨져 인간을 따뜻하게 참아주다가도 어느 순간 무척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 사이의 틈을 벌려놓는다는 것이다. 혜옥과 정사를 벌일 때 원상과 그녀의 정사를 잡아내는 카메라의 냉랭함이라니. 그것은 근친상간적 느낌을 풍기기보다, 성연과 혜옥, 각기 다른 여자를 따먹는 남자들의 각기 다른 자세와 심리적 거리감을 카메라는 정확히 접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빈 술집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 걸어 결국 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낼 때 장인은 죽고, 뒤늦게 ‘그냥 다소곳이 듣고 있을걸’이라면서 후회하는 윤식이 보이는 바보스러움. 더 나아가 어쩌면 심장이 약한 장인의 죽음이 단 한번 스쳐지나가는 듯 마주친 성연과의 만남 때문일 수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잠재하고 있는 부조리한 인생의 틈들 말이다.

박찬옥의 영화의 핵심은 홍상수처럼 중심에서 도망가거나 미니멀하게 영화를 미적하는 것이 아니라 쌓고 또 쌓는 중층의 묘미, 적분의 마법에 있다고 본다. 영화 형식의 측면에서 그녀는 정말 끝까지 가야 속을 내주는 브람스 음악과 비슷하고 또 잔인한 유머 감각의 측면에선 우디 앨런을 닮았다. 박찬옥이 창조한 신경망 같은 인간관계의 그물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전혀 얼굴도 보지 못한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들 모두는 인간적인 원형과 각자의 특질을 함께 가지는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촬영할 때 뜨개질을 한다는 박찬옥 감독의 버릇처럼, 그녀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중층으로 짜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보라. 결국 그녀는 이 잔잔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일상 가운데 윤식의 입으로 결정타를 날리지 않는가.

“싸구려 양주. 자꾸 마시게 돼. 근데 괜찮아.” 우디 앨런이 <애니 홀>에서 “이 집 음식은 맛이 없어. 근데 양도 적어”라는 결정타를 날린 이후, 나는 인생에 대해 이처럼 근사한 은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제발 박찬옥을 여자 홍상수라 부르지 말라. 그녀는 제1의 박찬옥이며, 앞으로도 쭈욱 그러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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