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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의 마음바꾸기, - 어제는 범작, 오늘은 수작?

예측 불가능한 대중의 감응지점을 포착하고, 그 빠른 변화의 길목에 이정표를 세워야만 하는 저널리즘 비평의 태생적 속성은 때로 정확한 통찰의 시간을 갖기 어려울 만큼 물리적 긴급함에 얽매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생겨나는 성급한 판단과 오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론가 시절 명쾌한 직관으로 나쁜 영화와 좋은 영화를 분류해내던 프랑수아 트뤼포조차 몇달 사이에 브레송의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또 ‘수정’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판단착오의 기준으로 쓰여진 오해와 실수의 비평들은 감응속도만큼이나 빠른 대중의 망각속도에 떠밀려 물의없이 사장되기도 한다. 혹은 후세의 의견들에 의해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히려 부활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의 어떤 영화를 비판하기 위해 이전에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영화를 도리어 비교우위의 근거로 삼는 엉뚱한 사태를 빚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의 특별기고가 스티븐 파버가 ‘수정주의 비평의 역사’라는 논점하에 미국 저널리즘의 오락가락하는 비평 역사의 몇 가지 사례들을 짚어낸 것도 이런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스티븐 파버는 “부당한 비교는 옛 영화를 이상화하는 반면 새 영화를 폄하하는 관습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올드스쿨>을 가장 최근의 예로 든다. 이 영화는 20대 시절 광란의 생활로 되돌아간 남자들이 남성클럽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의 코미디이다. 파버는 이 영화를 1978년 존 랜디스가 감독한 영화 <동물농장>에 비교하는 요즘의 행태를 꼬집어 비판한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의 엘비스 미첼은 <동물농장>과 이 영화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며칠 동안 놔둬서 반쯤 김빠진 콜라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렇다면 <동물농장>은 과연 좋은 영화였던가?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었지만 <동물농장>은 개봉 당시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놀랄 만큼 지루하고, 모든 면에서 통속적”이라고. 무엇을 근거로 이 두 영화의 우위를 점칠 수 있겠는가? 또는 <시카고>의 최근 비평들에 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버라이어티>의 데이비드 루니는 <시카고>가 “<어둠 속의 댄서>와 <물랑루즈>에 비해 덜 창조적이고, 덜 경쾌한” 영화라고 깎아내렸다. <타임>의 제스 카글도 “<시카고>는 <물랑루즈>의 스타일적인 참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물랑루즈>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만 해도 그 영화는 스타일의 참신성이니 경쾌함이니 하는 등의 찬사를 받지 못한 채 그저그런 영화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혹은 다른 식의 수정주의도 있다. <타이타닉>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던 저널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상의 왕”이라고 외친 제임스 카메론의 일갈 이후에 일제히 돌아선 것은 영화에 치중하지 않고, 담론에 표류하는 짓거리라는 것이다. 한때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에 대한 악명 높은 험담가(이자 미국 저널리즘 비평계의 대모격인) 폴린 카엘이 그녀의 평론권력을 동원하여 데이비드 린 영화의 수준을 곡해시킨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

수정의 행위가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월스트리트 저널>의 비평가인 모겐스턴이 1967년 <보니 앤 클라이드>를 보고 <뉴스위크>에 썼던 처음 기사를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은 깨끗한 수정의 태도에 속한다는 것을 파버도 인정한다. 말하자면, 수정 자체가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수정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얄팍한 ‘수정주의’와 진심에 가득 찬 ‘수정’은 전혀 다른 행위의 차원이다. 어떤 작가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도, 어느 장르에 대한 창조적인 재정립도, 사실상 수정의 시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수정의 원칙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만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