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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류 현실과 깡패 신화, 가깝고도 먼
2001-05-09

장르 변주의 두가지 길 보여주는 <파이란>과 <친구>

● <파이란>의 무대는 인천이고 주인공은 3류 건달이다. <친구>의

무대는 부산이고 주인공은 1류 건달이다. 무대의 이미지와 주인공의 직업은 비슷하지만, 두 영화는 거의 정반대의 길을 간다. <파이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친구>는 신화적이고 추상적이다. <파이란>이 일본소설을 각색했다는 것과 <친구>가

감독의 체험을 밑그림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언뜻 이상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게 자연스럽다. 영화와 소설에서 현실감이란,

그 이야기의 실재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그것의 형식적 자질에 달려 있다. 잘 짜여진 허구가 대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두 영화의 감춰진 공통점은 변칙장르영화라는 점이다. <파이란>은 깡패 장르와 멜로의 길을 열어놓고도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친구>는

깡패영화의 힘으로 밀어붙이지만 정서적 동력은 다른 곳에서 얻고 있다. 아마도 <파이란>은 깡패 장르와 멜로의 이중주인 <약속>의

길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란>은 깡패 장르의 관습과 멜로의 경계를 넘어 캐릭터 드라마로 간다. <친구>는

성장영화와 깡패영화를 뒤섞은 <비트>의 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친구>는 <비트>와 흡사한

구성이지만 성장의 고뇌에도 깡패 세계의 생리에도 깊이 다가서지 않으며, 김영하의 표현을 빌리면 “누아르도 휴먼드라마도 액션도 아닌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다(중앙일보 4월12일). 장르적 관습의 변주는 드문 일이기는커녕 대중영화의 매우 일반적인 전략이지만, 두 영화가 선택한 길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파이란>,

장르적 관습을 지워나가다

<파이란>의 초반부는 깡패영화의 설정으로 시작했다가 깡패영화의 표지를 지워나가고, 후반부는 멜로적이지만 멜로의

관습을 끝내 거절한다. 빌빌거리는 한 깡패가 있다. 그와 위장결혼했던 중국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녀가 남긴 착한 편지에서

사랑을 느낀 그가 깡패짓을 그만두려는 순간 조직에 의해 살해된다. 이야기만으로 보면 이건 깡패영화도 되고 멜로도 된다. 그러나 <파이란>은

리얼리스트의 카메라 혹은 앙드레 바쟁적인 의미에서 미장센의 윤리학이라 부를 만한 방식으로 장르적 관습의 유혹에 맞선다. <파이란>의

카메라는 인물의 동작이나 표정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프레임 안의 모든 피사체들을 관객이 찬찬히 볼 수 있도록 원거리 혹은 중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영화의 무대를 비추는 첫 장면에서부터 어딘지 심심하다. 인천은 바다 건너 온 중국의 3류 인생들이 한국의 3류 인생과 뒤섞여 사는 변두리

공간이다. 카메라는 어떤 채색도 기교도 없이 이 우중충한 공간의 누추함을 고스란히 전시한다. 파이란이 입국심사대를 지나는 첫 장면의 모노톤은

과거시제를 암시하는 것 외의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후론 어떤 필터도 쓰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과장된 빛도 없다. 시작한

지 15분쯤 뒤에 나오는 강재의 방은 아마 한국영화사상 가장 지저분한 방일 것이다.

사건의 진행속도가 조금 빨라져도 카메라는 사건의 뒤를 바쁘게 쫓아다니지 않는다. 강재와 하급 조직원들이 두목 용식에게 두들겨맞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용식의 방 밖에서 이 광경을 한참 쳐다본다. 조직원들 셋이 방을 나오고 강재만 남는 시점이 돼서야 카메라는 방 안으로 들어간다.

싸우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컷의 마술을 부리지 않으며 현실의 속도를 과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종종 창문 밖에서 등장인물들의

동작을 구경해야 한다. 강재가 연탄재로 하급조직원들과 다투는 장면은 심지어 원거리 촬영이다. 그들의 싸움은 긴박하거나 영웅적이기는커녕,

시나리오상의 표현을 빌리면 개싸움이다. 이쯤 되면 <파이란>은 깡패영화의 장르적 무기인 비장미와 속도감을 폐기처분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강재가 술먹다 옆자리 손님과 싸우는 장면에선 아예 관찰을 중도 포기한다. 3분이 넘는 롱테이크에서 마지막 10여초 남기고 카메라는 포장마차를

빠져나와 밤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파이란>은 즉각적인 감정전달을 지속적으로 지연시킨다. 첫 장면만 제외하면,

음악이 처음 사용되는 건 강재가 징역살이와 거액의 보상금 교환을 결심하고 용식에게 전화를 걸 때다. 이때도 카메라는 강재의 서글픈 표정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강재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중거리에서 응시하다 공중으로 솟아올라 부감으로 비춘다.

즉각적인 임팩트는 없는 대신 <파이란>은 느낌을 천천히 쌓아나간다. 최소한의 인내심과 배려를 관객에게 요청하는 셈이다. ‘국가대표

호구’의 쓰레기 같은 삶, 구원의 욕망조차 갖지 않은 벌레 같은 삶의 전체상에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다가선다. 그러나 <파이란>은

작가적 고집으로 일관하는 영화가 아니다. 깡패 장르의 관습은 거의 거들떠보지 않지만, 멜로적인 것에 대해선 얼마간 우호적이다. 강재가 법적

아내의 시체를 수습하러 가는 장면부터 영화엔 물기가 조금씩 번진다. 강재의 현재와 파이란의 과거를 교차편집하면서, 감독은 여기서부터 일종의

트릭을 쓴다. 강재는 파이란의 모습을 명함판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관객은 생전의 그녀를, 수줍고 청량한 얼굴을, 마지막 구조 신호마저

거부당한 채 쓸쓸히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관객은 강재와 다른 감정선을 타고 가며, 강재는 관객보다 한발 늦게 감정적 고조에 오른다.

이 묘한 시차는 교차편집의 기교가 구사되는 후반부에서도 영화의 리듬이 훼손되지 않는 절묘한 절제 효과를 발휘한다.

이 트릭의 좀더 깊은 효과는, 파이란이 강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일 뿐 아니라, 관객의 거울임을 내러티브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관객은

강재가 볼 수 없는 그녀의 새하얀 난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특권을 누리지만, 그리고 강재가 숨을 거두고 나서도 엔딩 화면을 가득 채우는

파이란의 착한 미소를 바라보는 마지막 특권을 누리지만, 이 특권은 그녀의 무구한 고백과 안타까운 구원 요청을 무기력하게 지켜만봐야 하는

쓰라림을 동반한다. <길>의 앤서니 퀸이 백치 젤소미나의 죽음 앞에 오열을 터뜨릴 때만큼 아픈 비애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파이란의 모습은 판타지일 뿐이며, 관객의 특권으로 그것을 목격하지만, 이 판타지에는 유희와 쾌락이 들어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파이란>은 2001년 한국영화의 중대한 성취다.

<친구>,

어떤 신화보다도 절절한

<친구>의 전략은 일견 명료하다. 70년대의 부산이 오늘의 인천보다 더 아름다울 리 만무지만 <친구>의

카메라는 필터와 특수촬영 및 현상을 통해, 구름처럼 디디티 개스를 뿜어내는 소독차를 쫓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이 어지러운 해안도시를 회한과

노스탤지어의 톤으로 채색한다. <친구>의 모든 장면들은 각각의 의도가 분명하다. 유년 시절의 장면들은 모노톤에 가까운 화면을

애상조의 음악이 감싸고, 고등학생이 된 친구들이 거리를 질주할 땐 카메라가 함께 달리며 의

강렬한 비트가 흘러나온다. 피가 튀는 칼부림 장면에선 어김없이 격한 호흡의 편집과 불안한 사운드 효과가 조력한다.

<친구>는 지극히 관습적이고 자극적으로 깡패 장르의 정형에 다가간다. <친구>는 준석과 동수라는 두 깡패 영웅의 신화다.

반영웅의 신화를 완성하는 데 있어 <친구>는 거의 모범적이다. 준석과 동수의 깡패 세계는 강재의 양아치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살인을 서슴지 않지만, 구멍가게 아주머니를 등쳐먹거나 오락실의 10대에게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비열한 짓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당당하며 엄격한 규율을 지킨다. 그러나 모범생답게 <친구>는 그 세계를 멋지게만 그릴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준석에게 그 세계는 오랫동안 저주한 운명의 굴레였고, 동수에게 그 세계는 열등한 삶의 유일한 출구였다. 준석이 히로뽕에 젖어 폐인으로 살고

있을 때, 음모와 살인의 지령을 완수하고도 동수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질 때, 우리는 이 멋진 사내들이 내면적으로 그 세계를 즐기기는커녕

더욱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친구>의 내러티브는 이들을 징벌함으로써 대중영화의 관례적 도덕률마저

준수한다. 동수는 친구에게 살해당하고, 준석은 사회적 율법에 의해 처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웅 신화는 징벌의 순간에 오히려 눈부신

절정이다. 30여군데 찔리고도 동수는 삶을 구걸하긴커녕 살인자를 주눅들게 하며, 준석은 석방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그러나 그게 <친구>의 전부가 아니다. 이 신화는 아름답긴 해도 새롭진 않다. 반영웅의 신화는 1930년대부터 할리우드가 서부극과

갱스터와 누아르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쏟아냈고, 한국으로 범위를 좁혀봐도 <모래시계>에 뒤이은 한국식 누아르의 전성시대를 이미

1990년대 중반에 거쳤다. 이야기의 풍부함이란 면에서 <친구>가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조차 앞설지는 의문이다.

<친구>에서 깡패 세계는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대신, 준석과 동수의 어둡고 강인한 얼굴은, 영화 전체가 두 영웅의 초상화로 느껴질

만큼, 빈번히 스크린을 채운다.

<친구>의 강렬한 정서적 힘의 비밀은 상택이 쥐고 있는 게 아닐까. 상택의 존재는 묘하다. 극의 진행에 어떤 주도적 역할도 하지

않고 어떤 해석도 내리지 못하지만, 준석은 그에게 최상의 배려를 아끼지 않고 그를 ‘친구’로 받아들임으로써 영웅의 정신적 궤적에 동참시킨다.

비유컨대 그는 신화에 끼어든 인간이며, 신은 별다른 이유없이 그를 환대하고 때로 그에 의존한다. 그의 존재가 끼어드는 순간마다 이야기의

명료성은 흐려지지만 그의 소극성과 맹한 태도는 그 자체로 매우 자연스럽다. 상택은 바로 관객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아마도 상택과 비슷했고,

준석과 같은 이미지의 동급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한 교실에 함께 앉아 있었다. 학연과 지연의 오랜 그물 속에 살아온 우리에게 상택과

준석의 친교는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관객은 자신의 대리인인 상택을 통해 영웅 신화를 우러러 보는 게 아니라, 이제 그것과 대화하고 때로 열렬하게 포옹한다. 상택이 준석과 교도소

유리창에 손을 맞대며 울먹이는 장면은, 감정 과잉이라는 의구심이 들면서도 솟구치는 느낌을 억누르기 힘들다. <친구>의 깡패 신화는

그 피상적 묘사로 인해 구체성을 잃었으면서도, 이 묘한 인물의 개입으로, 어떤 세련된 신화보다 절절한 감흥을 불러낸다. 이것이야말로 체험담이

가진 불가사의한 위력 아닐까. <친구>는 다시 나오기도, 누가 모방하기도 힘든 영화다.

허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