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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이 <살인의 추억>에 불편해하는 이유는

80년대가 나쁘지만 귀엽다고?

살인을 ‘추억’할 수 있는 자는 복되다. 그는 적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호기심으로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고, 자살할 용의가 없다면 범행의 공포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마처럼 지겨운 연쇄살인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있다. 그는 지금 어느 극장 한 귀퉁이에서 과거의 권능을 회상하며 관객의 비명과 웃음을 즐기고 있을까?

부처님이 오시기 하루 전인 7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만약 범인이 살아 있어서 영화를 본다면 디데이를 오늘로 삼았지 않을까 하는 찜찜한 기분으로 <살인의 추억>을 봤다. 영화는 우울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농담 좀 해야겠다. 경기도 화성군 태령이란 시골 마을에서 여자 10명이 살해됐다. 범인은 비오는 날 밤만 골라 범행을 했기 때문에 강수량이 범죄율과 관계가 있다는 새로운 학설을 낳을 뻔했다. 그러나 한순간 그는 본인의 의지로 살인을 중단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살인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 풍문과 상처만 남겼다. 그가 완전범죄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틈새시장의 개척이다. 그는 세상의 시선이 서울의 도로에 집중해 있을 때 한적한 시골길을 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이 터지던 시기에 바로 등잔 밑의 시골을 향했다. 그리고 서울대생을 건드리거나 운동권 여자를 성희롱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학습하여, 시골의 힘없는 여자만 골랐다.

둘째는 자신이 물러날 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잇단 시국사건이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도하면서 5공화국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민주화의 도래로 민생치안이 강화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그는 그 무렵 자진해서 살인을 중단했다.

연쇄살인이 종지부를 찍은 시점은 민주화가 진행된 시점과 일치한다. 거리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뜨거운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숲속에서는 비열한 살인이 진행됐다. <살인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80년대의 환부로 들이민다. 죄없는 여자들이 죽어가는데, 형사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는 배경을 이 영화는 ‘80년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너무나 잡고 싶었던 범인은 개인을 희생시킨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감독은 역사와 가장 무관해 보이는 시골 여자들의 죽음이 사실은 역사의 불똥을 맞은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지만 시대와 살인을 연결짓는 코드는 탁탁 걸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 영화가 상정하는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피살된 여자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말이 없이 시체로만 등장한다.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다룰 때 희생되는 개인은 개인의 삶을 통해서 보여줄 때 설득력을 얻는다. 여기서는 경찰을 매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의 입을 통해 시대분위기가 외삽된다. 예컨대 “시위 진압하는 데 경찰이 동원되지 않았으면 여자들이 죽었을까?”라는 직설적인 질문의 형태를 띤다. 이 질문은 센티멘털리즘이다. 센티멘털리즘은 한 인물의 위치를 특권화해서 감정을 유발한다. 여기서는 피해 여성들과 시대상황이 이항대립된 상태에서 피해 여성들의 위치를 특권화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80년대를 나쁜 과거, 그렇지만 귀여운 과거로 박제하는 것 같다.

<러시아 지성사>를 쓴 베르자예프는 러시아 혁명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역사와 도덕은 무관하다”는 말을 했다. 이 말 속에는 ‘나쁜 역사’에 대한 이성적 인정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역사에 기여하지 못하지만 개인적 도덕에 대한 애정이 함축돼 있다. 80년대 이후 역사를 강변하는 권위주의와 개인을 특권화하는 감상주의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징후가 되었다. 이 둘을 얼마나 적절하게 섞어서 구사하느냐가 담론 시장의 게임의 법칙이 되기도 한다. 살인을 추억할 수 있는 자는 범인을 아는 자, 연쇄살인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자, 역사의 비밀을 아는 자이다. 우리는 다만 살인 현장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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