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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라, 자유라는 이름의 감옥을, <똥개>의 정우성

구릿빛을 오버한 오동나무색 피부와 헝클어진 머리와 콧수염, 턱수염과 정우성. 여전히 멋들어지고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는 지금 저 속에 다른 생각과 말을 품은 채 이 자리에 와 있다.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발표한 신작 프로젝트에 정우성의 캐스팅 소식이 이어지면서 장안 구석구석이 떠들어온, 영화 <똥개> 때문이다.

그는 요즘 밀양에서 경상도사투리를 억세게 써가며 촬영 중이다. 촬영분량이 5% 정도 남은 이 영화에서 정우성의 역할은 경찰인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백수 청년 철민. 이 친구는 늘 아버지와 티격태격하고, 자기가 정의라고 믿는 일에 대해선 무모할 만큼 대담하게 덤벼들어 사고를 자초한다. 외양이 때깔난다거나 일부러 폼을 재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정우성이 철민을 맡기로 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인 매체물결을 타자마자 많은 언론들은 ‘<똥개>의 정우성, 완전히 망가진다’는 식의 헤드라인으로 정우성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불만스러웠다. “잘못된 표현인 것 같다. 철민이라는 친구는 표현방식과 생활모습이 조금 다를 뿐, 내가 이제까지 추구해왔고 갖고 있었던 것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한때 정우성을 묘사하기에 매우 유용했고 아직도 유효할 것 같은 표현들이 있다. 식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두가 그의 이름 앞에 갖다붙이곤 했던 말들, 반항 그리고 자유로움. 좀더 자세히 풀면 ‘기성세대의 질서에 편입되기 싫어하는 고집’이나 ‘위험천만한 속도를 가진 자유’라는 어구가, 그리고 ‘한순간, 외로워 보였다’는 증언이 있었고, 이 표현들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이런 모습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으니까. 또한 이건 증명될 수밖에 없었다. 정우성 자신이 그런 고집을, 위험천만한 속도를, 외로움을 가졌다고 고백해왔으므로.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동경하고 꿈꿨다. 젊음의 힘을 받아 반항하는, 그 대가로 주어진 자유를 맘껏 누리는 것 같은 정우성은 오랫동안 모두의 우상이었고 동시에,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고고한 영역에서 유유히 존재하는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유는 거짓말이었다. 날개없이도 날 수 있는 힘찬 젊음은 ‘이미지’라는 커다란 쇠사슬이 되어 그의 발목을 죄었고, 그는 날갯짓을 했지만 늘 어떤 중력장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정우성 안에서부터 비롯된 구속이었을 수도 있다. 기성세대의 질서에 편입되기 싫어하는 자신의 고집 때문에,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그 이미지로 다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문화 속에서 그는 ‘팔딱이는 청춘’의 아이콘으로 역설적이게도 무생물처럼 박혀 있었다. 그를 우러르거나 질투하는 이들이 정우성과 ‘자유’라는 말을 동의어로 인식할 때 정작 본인은 자유라는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어떤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무사>를 즈음해 정우성은 ‘폼’과 ‘진짜 멋스러움’의 차이를 깨달았고 조금씩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의 매력으로 잦아들어갔다. “그 와중에 <똥개> 시나리오를 만났다.” 살아 있는 드라마와 뭔가 다른 자기 모습을 보여줄 캐릭터에 대한 목마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는 쉽게 철민에게 다가가고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찍으면서 이렇게 신이 난 적이 없었다”는 말이 그에게서 몇번이나 반복됐다. 달리 말하면 그는 이제껏 아홉 편의 영화를 찍을 동안 늘 경직돼 있었다. “비주얼에서 스타일리시한 캐릭터들을 해왔다. 그런 캐릭터들은 대개 연기로 뭔가를 보여주기에 한계가 있다. 그런 걸 깨보고 싶었다.”

<똥개>는 정말 편안하게 그리고 더 자신감 있게 연기하는 작품이라서 정우성 본인의 개인적인 기대도 크다. 게다가 이제 그는 배우생활 11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내 배우경력에 어떤 획을 긋는 작품이 될 것이란 기대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영화가 완성된 뒤에 사람들이 평가할 부분이다.” 11년간 연기한 그가 놀랍게도 “연기를 즐겨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우성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었던 시절 지겹도록 귀에 걸린 또 한 가지 구절은 ‘견딜 수 없게 눈부신 아름다움’이었다. 나의 미(美)를 신(神)이 박탈해서 그에게 몰아주었다며 원망하고 있을 이들에게조차 이것은, 그를 설명하는 모든 말들의 공통분모였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월의 풍화에 마모되고 무뎌질 순간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우의 얼굴과 이미지를 보면서 그 배우에 대해 영화적인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미남미녀들은 일상을 벗어나서 지극히 영화적인 소재에 어울리고, 우리나라엔 그런 소재를 가진 영화들이 드물게 제작된다. 그런 핸디캡을 이겨내는 건 결국 배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이겨냈다. <무사> 전까지 자신을 힘들게 했던 또 한 부분을 지금은 다 덜어낸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무거운 이미지다.” 남들이 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해왔다. “고독에 갇힌 어두운 캐릭터를 주로 맡아와서” 그런 것 같다고 스스로 이유를 덧댄다. 하지만 배우가 어떤 일관된 캐릭터를 고수해왔을 때는 이유야 어쨌든 본인의 자의와 의지가 개입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특정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소비당할 만큼 무기력하지 않다면 말이다. <똥개>의 철민도, <비트>의 민과 <태양은 없다>의 도철처럼 순수함와 무모함을 위험하게 간직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어떤 연장선상에 있다. 그가 웃는다. “맞다. 내가 그런 성향이….” 그리고 말을 고르려는 듯 잠시 간격을 놓는다. “짙다고 할 수 있다.”

찬찬히 되짚어보면 그는 지금까지 상반된 증언을 하고 있었다. 철민이란 필터를 통과함으로서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반항’의 이미지에 반항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되뇌이면서도, 이 지점에 속시원히 터닝포인트 깃발을 내려꽂으려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그의 이미지들이 결코 허상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질은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고정된 것들에 몸을 부딪쳐 반항하고 자유로움을 갈망했고 이는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므로, 그의 본질은 또한 태초부터 외로웠다. 문제라면, 연약한 자신을 기댈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늘 숭배의식을 치러온 인간의 종교적 특성이었다. 정우성은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에 갇혀 있었고 우리는 그런 그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젠 정말로 그가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도 복제하기 힘들었지만 그만큼 그를 짓눌렀던 이미지에서 벗어날 거라고.

정우성의 표현대로 <똥개>는 비주얼을 자랑하는 영화가 아니라 홀아비와 외아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따뜻한 드라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다른 모든 말들에 앞서, 이 영화는 배우 정우성이 자유라는 이미지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 탈출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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