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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를 괴물로 그려서 당신이 착해지겠다고? <와일드카드>

<와일드카드>를 처음 보고 나오며 나는 이 영화를 두말할 것 없이 ‘나쁜 영화’라고 단정지었다. 비난이 아니라 비판의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두 번째 보고난 뒤 그 생각은 모호해졌다. 이 영화는 ‘착한 영화’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영화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정의의 영역 안으로 선뜻 들어서지 못할까? 자기 모순적인 판단의 혼란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유를 정리했다. 우선 이 영화는 정교한 미학으로 위장할 만큼 영악하진 못하다. 발로 뛰어 모은 형사들의 경험담을 성실하게 조합해낸 것에 가깝다. 그 점을 김유진 감독은 실제에 근거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성실함과 솔직함으로 엮어놓은 그 봉합 솜씨를 사람들은 ‘웰 메이드’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웰 메이드라는 평가 한마디가 안겨주는 면죄부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면죄부? 맞다. 면죄부라고 불려야 한다. 여기에는 그 면죄부를 받아들기 위해 순조롭게 처형당해야 할 이름들이 적힌 살생부가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표현이 잔인하다는 따위의 감정적 수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영화를 등지고 현실에 대해 묻는 질문이 될 터이고, 돌아올 대답은 곧장 이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 실제에 근거한 것이고, 오히려 영화에서는 순화하여 표현한 것이며, 실제로는 더욱 잔인하다. 그러므로 영화는 현실에 비교하여 정의롭고 올바르다. 여기까지 가면 제로섬 게임이 될 것이다. 이해 안 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와일드카드>에서 그 형사들의 진정성을 위해 희생되도록 강요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흉측한 괴물의 역할이 떠넘겨지는가? 그렇게 해서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살아남는가? 착한 영화 <와일드카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진상은 이렇다. <와일드카드>는 ‘나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착한 영화’이다. 여기에 문제제기의 시작을 내건다.

나쁜 태도를 지닌 착한 영화

‘나쁜 태도를 지닌 착한 영화’라는 괴상한 표현은 형사영화의 맥락 안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형사영화일 뿐만 아니라, 형사들 삶의 ‘건전함’(sanity)을 드러내기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공의 적>과 <살인의 추억> <와일드카드>는 형사들이 버텨내는 그 ‘직감’(직관이 아니다)의 역량이 범죄자에 의해 도전받는다는 점에서 같은 망에 얽혀 있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미친놈이며, 괴물이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은 본능적인 폭력성과 ‘직감’뿐이다. 더욱이 강철중은 도덕과 윤리와는 완전히 결별한 인물이다. 바로 그가 범인을 잡는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의 직감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이상 직감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그래서 합리적 추론과 이성으로 사고하는 자 중 그 누구도 범인을 가려내지 못하는 그때에 오로지 책상 서랍 안에 볼펜 한 자루밖에 없는 이 무식한 자의 직감만이 범인을 가려낸다. 천연덕스럽게 부모를 살해하는, 적어도 ‘윤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그 범인은 오로지 꼭 그만큼의 윤리를 갖추지 못한 자만이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공공의 적>은 형사와 범인을 ‘괴물 대 괴물’, ‘광인 대 광인’의 대결구도로 만들어놓는다. 둘 사이에 펼쳐지는 광기의 경주를 위해 범죄자만큼이나 악랄한 형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도 역시 직감을 믿는다. 그러나 그 직감은 지능적인 범인의 세포를 뚫지 못하며 농락당한다. 점점 더 그 직감은 패배의 운명 안에서 동료의 광기로 전이하고, 민족국가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시대적 만행과 알레고리를 맺으며 거대 광기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간다. 말하자면,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은 감독 개인의 영화적 아비투스와 시대적 알레고리 사이의 은근한 협상장소에 불려들어와 시대의 대변자이자 바보가 되어간다. <살인의 추억>은 시대가 괴물이 되어 범인을 놓아주고, 그 형사에게는 무능을 자인하게 만든다.

그러나, <와일드카드>는 명료한 이항대립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사와 범죄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와일드카드>는 우리가 형사들의 애환이라 부르는 것,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의 구체성, 예를 들어 언제나 차두리보다 빠른 놈을 뒤에서 쫓아다녀야만 하고, 칼 맞는 걸 각오하면서까지 범인을 덮쳐야 하고,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밤을 새워야 하는 그 세세한 일상사의 에피소드를 구체화하면서 형사들에게 삶의 건전성을 되찾아주려 한다. 여기에 이 영화의 선의가 있다. 그리고, <공공의 적>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과 이들이 다른 것은 직감을 포기하고 수세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항상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써 형사들은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 된다. 오영달은 도망가는 퍽치기 범인을 향해 총을 쏘려는 방제수의 총을 가로막는다. 어떻게 결과도 보지 않고 살인할 걸 아느냐는 오영달의 질문에 방제수는 “직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직감이 부추기는 행위를 포기하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형사의 운명이라고 역설하는 과정에 그들 삶의 건전성이 자리잡는다. “잡는 데도 규칙이 있고, 절차가 있는 거야.” 오영달의 이 한마디에 이들은 합리적인 정상인으로 되돌아온다.

범인을 괴물로 변질, 형사들 건전성 극대화

하지만 <와일드카드>는 형사들의 건전성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괴상한 방식으로 변질시키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이 영화에서 퍽치기가 하는 역할도 그것이다. 형사들은 퍽치기를 단순강도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부모를 살해한 천인공노할 살인자도 아니고, 강간과 살인을 계속하는 정신병자 살인마도 아닌 단순강도살인범이 등장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이 영화가 형사들의 평이한 삶에 모든 기준을 걸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퍽치기란 그들 곁에(우리 곁에) 바로 비일비재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사들의 캐릭터가 갖는 구체성에 반해, 노재봉을 위시한 퍽치기 일당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의도적으로 추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추상화는 공포심을 가중시키고 동정의 감정이 끼어들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흔하기 때문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극적 긴장감을 다시 고조시키기 위해 이들이 맡는 역할은 정체 모를 괴물이다. 노재봉은 주민등록 신고도 되어 있지 않고, 지문도 없는,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존재로 남는 것이다. 기껏해야 ‘양아치’일 뿐인 이들은 애교를 얻고, 원칙을 같이하면서(도상춘의 논리는 오영달의 논리와 같다. 진정한 도둑은 손님이 앉아, 기대고, 누워, 잘 때까지, 기다린다고 도상춘은 말한다. 도둑질에도 절차가 있고, 규칙이 있다는 말이 된다). 괴물의 역할에서 구출되는 도상춘의 캐릭터와 분명한 대비가 된다. <약속>이 양아치와 건달의 구별법을 설파하듯, 여기에서 양아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고, 도둑보다는 건달에 가까운 도상춘 일파는 거래의 동조자가 된다.

정상인과 괴물을 구분해내는 논리는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을 싸잡아 동성애자라고 부르는 그 호칭의 논리와도 같다. 일종의 동성애 호칭의 논리가 여기에 있는데, 이성애자를 건강한 정상인으로 만들기 위해 동성애자를 병리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도상춘의 안마시술소에 등장하는 게이가 웃음을 위한 코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깡패와 형사의 구분이 어렵고, 형사와 윤리선생의 구분도 필요치 않다는, 심지어 죄 지은 놈과 그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놈을 몽타주 하나로 찾아낸다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감별법(김민기의 몽타주를 들고 찾아온 오영달과 방제수에게 도상춘이 하는 말. “행님요. 이거 갖고 범인 못잡습니더. 우리나라 3분지 1이 이래 생겼습니더”)이라고 일갈하는 이 영화의 미덕 얹힌 논조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와일드카드>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은 영화 스스로가 ‘범죄의 심급’을 재조정하는 과정에 있다. 영화 속 질문. “야, 너는 퍽치기가 더 싫으냐, 강간범이 더 싫으냐.”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퍽치기이다. 이 질문은 흘러가는 대사가 아니다. 영화는 퍽치기가 강간보다 얼마나 더 나쁜가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퍽치기의 죄질을 높이기 위해 강간을 스스럼없이 동기화한다. 택시에서 내려 길을 가던 술집 여자(영화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여자가 바로 술집 여자라는 것이다! )는 택시기사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이때 “어 죽이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노재봉이 아니라, 그 패거리에서 가장 하수인 역을 맡고 있는 김민기이다. 적어도 우리가 보는 순간까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은 김민기이다. 그리고 지문이 나오고, 형사에게 잡히는 것도 김민기이다. 퍽치기 일당 중 하나인 김민기는 퍽치기범이기보다 강간범 역을 떠맡는다. 그리고 여자는 강간행위의 ‘피해자’가 아니라 퍽치기 일당의 인상착의를 증언하는 ‘목격자’로 기능한다. 형사들은 이 여자에게 미안해하지만, 퍽치기의 피해자를 보는 것만큼 분노하지는 않는다. 오영달의 부인에게 협박전화를 걸던 방규식이 강간전과범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다. 역시 강간보다는 퍽치기가 더 나쁜 것 아니겠냐는 주장이 여기에는 있다.

김유진 감독은 깡패가 청소년의 우상이 되는 것이 염려스러워 형사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적어도 한 가지는 기억하고 넘어가자. 5년 전을 되새길 수 있는 기억력이 있다면 이해하기 힘든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멋있고, ‘젠틀한’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는 바로 김유진 감독의 <약속>이다. 변치 않을 의리로 뭉친 깡패, 그러나 사랑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끼지 않는 깡패. 하지만, 이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영화 안에서 범죄에 대해 형사들이 느끼는 인간적인 분노의 강도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낮은 분노가 아니다. 그런데, 이 분노는 퍽치기범들을 향한 분노이지 범죄를 향한 분노는 아니다. 이미 설정된 바처럼 괴물에 대해 느끼는 건전한 정상인의 분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괴물을 지독하게 규정함으로써 애초의 건전성은 안전하게 지켜진다. 형사들의 충분한 활약상을 보았음에도 <와일드카드>는 동조하기 힘든 점들이 남는 영화이다. 내게 지금 기억나는 말은 이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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