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의 디자이너 나난(장진영)에게는 재앙이 엎친 데 덮친다. 원형탈모를 발견한 날 애인에게 결별 통고를 받더니, 비열한 상사 탓에 느닷없이 외식사업부 레스토랑 매니저로 발령이 난다. 청천벽력을 맞은 나난의 피난처는 동갑내기 죽마고우인 두 친구 동미(엄정화)와 정준(이범수)이 각방 쓰는 룸메이트로 생활하는 아파트. 그러나 남녀상열지사에 통달한 입 걸고 정 많은 동미에게도, 착하고 자상한 정준에게도 얼마 안 있어 일과 연애의 ‘대형사고’가 닥친다. 한편 나난에게는 어수룩하지만 그녀를 오래 지켜봐온 것이 분명한 증권회사 직원 수헌(김주혁)이 접근해온다. 스물 무렵, 일과 사랑 중 하나쯤 이루리라 꿈꾸었던 나이 서른이 임박해오는 가운데 나난과 친구들은 결단의 기로에 선다.
■ Review여자의 스물아홉살은 이래저래 스스로에게 깜짝깜짝 놀라는 나이다. 강한 여자를 꿈꾸었건 아름다운 여자를 꿈꾸었건 20대까지 그녀가 상상한 ‘셀프 이미지’는 지각대변동을 맞는다. 우선, 절대 내 것이 되리라고 상상 못했던 일들이 슬그머니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TV를 켜면 드라마나 CF의 여주인공은 몽땅 나보다 어리다. 거추장스럽게만 느꼈던 화장품이 떨어지면 불안하고, 돌보지 않으면 고장나기 일쑤인 몸은 헬스클럽이며 찜질방 문을 두드리며 한때는 놀기에도 모자랐던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럭저럭 4, 5년차에 접어든 직장에서도 경악은 수시로 찾아온다. 이게 내가 인생 걸겠다고 잘난 척했던 일인가, 나한테 이렇게 못되고 독한 구석이 있었나 철렁하다가 때로는 이 질긴 인내심이 나의 어디에 숨어 있었나 감탄한다.
물론 여기서 스물아홉이란 특정한 육체의 연령이 아니라 스물일곱에서 서른세살 언저리를 포괄하는 이행기다. 이 상징적인 나이를 현재진행형으로 공감하는 관객 집단을 겨냥한 <싱글즈>는 적어도 과녁을 놓치지 않는 사수다. 불 꺼진 광고판을 거울삼아 얼굴을 점검하다 젊은 모델의 자태가 광고판에 떠오르는 순간 총총히 돌아서는 나난과 동미를 잡은 짧은 장면은 <싱글즈>가 접속하고자 하는 감수성의 단면이다.
<싱글즈>의 캐릭터는 기획영화 레서피의 좋은 사례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는 20대 후반 위기의 보편적인 징후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난. 그녀는 현실의 대다수 싱글 여성들이 그렇듯 야심찬 커리어우먼도 현모양처 예비군도 아니라 “일하기 힘들다고 땡깡부리면서 계속 직장에 다닐” 여자다. 떠난 남자 앞에 섹시한 모습으로 나타나 복수하려다가 엉겁결에 “레스토랑 쿠폰 줄까?”라고 말문을 열고, 휴대폰으로 연인에게 애교떠는 여자를 두들겨패는 환상에 젖는 어설픈 나난은 <앨리의 사랑 만들기>의 히스테리컬한 변호사 앨리의 수더분한 버전이다.
1인칭 내레이션은 나난의 몫이지만, <싱글즈>의 제목은 엄연히 복수(複數)다. 영화의 따스한 재미도 독신 친구들의 연대에서 솟는다. 제작진은 아마도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노팅힐>의 매력에 주목했을 터다. 나난을 풍만한 가슴으로 품어주는 단짝 동미는 역경을 희롱할 줄 알고 남자의 점수를 낭만적 사랑이 아닌 동거의 상대로서 매긴다. 등장하는 장면마다 시선을 장악하는 엄정화가 분한 동미는, 마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건강한 여동생처럼 보인다. 한편 <싱글즈>의 남자들은 두 부류다. 만화 속 악당처럼 성희롱이나 일삼는 한심한 사내들은 통괘한 벌을 받고, 착한 남자들은 여자들의 친구로 인정받는다. 삼총사의 청일점 정준과 나난의 새 애인 수헌은, 여자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한 할리우드영화 속 게이 남자 친구를 닮았다.
싱글이란 독립의 의미를 포함한다. 스물과 스물셋, 스물일곱살 시절의 꿈을 되돌아보던 나난, 동미, 정준은 중얼거린다. “열아홉살에는 우리 셋 다 집 나오는 게 소원이었지.” 부모의 지붕을 벗어나는 제1목표를 성취한 스물아홉살의 과제는 “내가 있을 곳이 정말 여기일까?”라는 회의를 통해, 결혼을 하건 안 하건 관계와 사회 속에서 정착할 ‘집’을 찾아내는 것이며, <싱글즈>의 굵은 테마도 마찬가지다.
일본 TV드라마이자 소설로 출간된 를 개작한 <싱글즈>가 그와 같은 주제를 풀어내는 과정에 보여주는 장점과 약점은 TV드라마적 미학에서 비롯된다. 군더더기 없는 연기와 시류를 포착한 순발력 있는 대사, 여배우의 매력이 활개치게 만드는 시나리오와 카메라의 앵글(여성 캐릭터에 관한 한 한국영화는 아직 TV드라마에 미치지 못한다)은 유쾌하다. 그러나 에피소드의 벽돌을 모아 클라이맥스의 첨탑을 쌓아올리는 호흡은 다소 미진하다. 인물들이 겪는 모욕은 충분히 아프지 않고 위기는 충분히 위태롭지 않다. 아무리 비감한 상황도 궁극에는 비슷한 리듬으로 즐겁게 끝나는 시퀀스들의 청량감은, 현실의 평범한 여성으로 설정된 나난과 동미가 (현실적으로) 비범한 용기를 내는- ‘왕대박’ 구혼자를 거절하고 미혼모의 길을 택하는- 순간의 상쾌한 각성과 합당한 쾌감을 반감시킨다. 두 여주인공의 필요가 닿는 부분만 구체화된 남성 캐릭터의 못다 핀 성격도 아깝다.
“마흔살이면 뭔가 성취했을까? 아님 말고”라며 눈에 선 핏발을 지우는 유유한 인생관, 임신과 결혼에 예속되지 않는 여성의 섹스, 사랑으로 팔자 고치려 하지 말자는 연애관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인 동시에 여전히 판타지다. 그런 삶의 방식을 짐짓 기정사실로 다루면서 “문제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다”고 생글생글 결론짓는 <싱글즈> 역시 세태드라마인 동시에 딱 한뼘만큼 지상에서 발을 떼고 있는 판타지다.
:: 권칠인 감독 인터뷰<싱글즈>는 배우의 영화다
<사랑하기 좋은 날> 이후 8년이 넘는 공백기가 있었다.한번도 충무로를 떠난 적은 없었다. <싱글즈>도 5년이 소요된 기획이다. 애초 <나는 아름답다>라는 제목으로 <태양은 없다>의 여성판에 가까운 영화를 구상했다가 소설 를 자료 삼아 보았는데 섹스 없는 동거, 우연히 친구 아기를 임신하는 사건 등 중요한 모티브가 비슷해 도저히 피해가기 힘들겠다는 판단으로 판권을 정식으로 획득했다.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20대 후반의 생활에 관한 리서치가 있었나.세명의 작가 손을 거쳤고 그렇게 많은 취재를 하지는 않았다. 인터넷을 통한 관찰 정도랄까? 20대 후반 독신 생활을 다룬 <섹스 & 시티> <프렌즈> <앨리의 사랑 만들기>에 호응이 커서 그간 영화계에서도 유사한 각도의 기획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시나리오에 비교하면 세 친구의 역사나 남자들의 사연, 29살라는 나이의 절박함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생략됐다.에피소드 중심적인 구조도 편집을 어렵게 만들었을 듯하다. 정준이 애착이 많이 가는 캐릭터였는데, 정리하다보니 두 여자 이야기에 치우쳤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텔러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풀어가는 스타일인데, 듣는 사람의 주의를 잃지 않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려다 보니 ‘화물차 편집’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죽 연쇄시키는 편집이 됐다.
치고받는 대사가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특별히 촬영에 애먹은 장면은.<싱글즈>는 감독의 영화라기보다 배우의 영화다.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텍스트로 보지 말고 하나의 제안으로 받아들이라고, 자기 안에서 인물의 자료를 찾으라고 부탁했다. 배우들이 이 나이 또래 캐릭터의 삶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 믿었다. 배우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 번 테이크를 간 장면은 나난이 혼자서 넋두리하는 장면이다. 정말 술도 마시고 눈물도 흘리고.
영화 속 싱글들이 사는 집의 공간 컨셉은 무엇이었나.동미와 정준이 동거하는 집은 그 나이 또래 사람이면 한번쯤 살아봤을, 기억 속에서 익숙하고 얼마 안 있어 사라질 20년쯤 된 주공 저층 아파트다. ‘트렌디’에 동떨어진 것 아니냐는 평도 있었지만, 섹스없는 동거라는 튀는 느낌의 설정을 중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난의 집은 봉원사 뒤쪽에 있는 실제 가옥으로 멜로적 느낌, 싱글들이 살아보고 싶어할 집을 골랐다. ‘트렌디’를 스타일로 티내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나난에게 튀는 이름을, 개성 강한 동미에게 흔한 이름을 준 것도 같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