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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0회(1927∼1929)
이유란 2003-07-09

영화사신문

영화사신문 제10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27 ~ 1929

<재즈싱어>을 개봉한 워너극장 전경. 최초의 유성영화에 관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아니, 배우가 말을 하다니<재즈 싱어> 첫 대사 삽입, 시사회 흥분의 도가니

“잠깐, 잠깐만. 아직 당신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니까.” 1927년 9월6일 마침내 영화가 말문을 텄다! <재즈 싱어>의 주인공 올 졸슨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시사회장엔 흥분과 놀라움이 출렁거렸다. 지난해 <돈 주앙> 이후 바이타폰영화들이 이어졌지만, 배우가 말을 하기는 <재즈 싱어>가 처음이다. 영화에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단 두 대목에 불과하다. 나머지 장면은 여느 무성영화처럼 자막으로 대사가 처리되었다. 하지만 그 ‘양’은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배우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열린 <재즈 싱어>의 첫 시사회 분위기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를 크게 고무시켰다. 워너는 회사의 사활을 걸고 유성영화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한편 유성영화의 도입여부를 고려하고 있던 다른 영화사들에도 <재즈 싱어>의 성공은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재즈 싱어>의 첫 공개와 관련된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아깝다, 워너 형제들. <재즈 싱어> 첫 시사회장에도 못 가고. 아니, 불쌍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시사회 하루 전 샘 워너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나머지 워너 3형제도 이날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이타폰 실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샘 워너는 옛날에 깨진 코가 원인이 돼 누관이 감염되는 바람에 극적인 순간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떴다. 샘의 죽음을 접한 해리, 알버트, 잭 워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뉴욕을 떠났다.

○…히트한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재즈 싱어>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펼쳐진다. 5대째 내려온 가업인 유대교 독창자(cantor)가 되도록 강요당하지만 재즈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올 졸슨과 부모의 갈등, 재즈 가수로 입신하는 과정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리면서 전개된다. 가출했던 졸슨은 유망한 재즈 가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는 그 순간 아들에게 ‘멈춰’(stop) 하고 소리친다. 여기에서 졸슨이 노래 부르는 중간중간 어머니와 나누는 간단한 대화, 그리고 ‘멈춰’라는 아버지의 호령이 <재즈 싱어>에 등장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성대사’다. 결말에서 졸슨은 재즈 가수로도 성공하고 아버지와도 화해한다.

○…재개봉관 극장주들도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를 반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돈 안 주고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무성영화 상영의 경우 음악을 들려줄 오케스트라단이 필수적이지만 재개봉관을 운영하는 처지에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단의 운영은 큰 부담이었다. 워너브러더스도 이를 공략해 극장주들에게 “이 발명품만 있으면 극장 규모에 상관없이 완전한 오케스트라 반주가 가능하다”라고 선전해왔다.

○…앞으로 할리우드 5대 제작사들의 행보도 귀추가 주목된다. MGM,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퍼스트 내셔널, 제작자배급협회, 이 5개 회사는 유성영화 도래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지난 2월 ‘빅 파이브 협약’을 체결했다. 어떤 음향 시스템이든 다 함께 가장 유리한 것으로 증명된 기계를 도입하기로 결의한 협약이었다. 지난해 워너가 <돈 주앙>을 내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바이타폰 바람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새로운 스튜디오의 설립, 극장 상영 기재의 변경 등 유성영화를 만들 경우 제작사들은 많은 것을 바꾸어야 했다. 이는 비용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작사들은 유성영화가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입장을 바꿔 이 협약을 맺었다.

<잔다르크의 수난>, 끝없는 수난흥행실패 이어 재촬영 네거티브 필름마저 불에 타

1929년 <잔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의 수난은 끝이 없어라. <잔다르크의 수난>의 네거티브 필름이 ‘또’ 불에 타 재로 사라졌다. 1928년 12월6일 UFA스튜디오에 불이 나는 바람에 네거티브 프린트가 연소된 데 이어 두 번째다. <잔다르크의 수난>은 판크로매틱(전정색성) 작업을 하느라 그곳에 있었다. 당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은 편집 뒤에 남아 있던 네거티브 필름와 일부 장면을 재촬영해 새 네거티브 프린트를 만들었다. 그나마 몇개의 복제 프린트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드레이어는 비교적 원본에 가까운 네거티브 프린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고몽영화사의 작업실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에 보관 중이던 새 네거티브 프린트가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잔다르크의 수난>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봉 전부터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드레이어가 덴마크인이라는 점, 가톨릭 교도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이 영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27년 1월 장 조세 프라파는 “아무리 재능있는 감독이라도 프랑스인이 아니면 진정한 프랑스 전통 위에 서 있는 잔다르크를 그릴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개봉을 앞두고 모욕감을 느낀 대주교들의 반발(<잔다르크의 수난>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들은 하나같이 비열하고 탐욕스럽고 신성모독적인, 악의 화신으로 그려진다)과 프랑스 정부 검열관들의 검열로 영화는 상당 부분 수정이 불가피했다. 설상가상으로 1928년 10월 개봉 뒤에는 대중에게도 외면받아 극히 저조한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커튼을 내려야 했다.

제1회 아카데미영화제

작품상에 <윙>, 찰리 채플린 특별상 수상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영화제 시상식이 로스앤젤레스 루스벨트 호텔에서 열렸다. 영화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이날 시상식에서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13개 부문의 수상자들에게 트로피를 수여했다. 남녀주연상은 각각 <마지막 명령>(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의 에밀 야닝스와 <선라이즈>(감독 F.W. 무르나우) 등에 출연한 자넷 가이너에게 돌아갔으며, 프랭크 보르자주가 <거리의 천사>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작품상은 반전을 호소한 <윙>(감독 윌리엄 웰만)이 수여했다. 또한 찰리 채플린은 “<서커스>의 각본, 연기, 연출, 제작에서 보여준 다재다능을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했다.

옛 명성은 어디가고…

전설적 이미지의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파리서 조그만 사탕가게 운영 ‘힘겨운 노년’

파리 몽파르나스역 인근의 구멍가게에서 사탕과 장난감을 팔고 있는 멜리에스.

1929년 갓 태어난 영화매체가 품고 있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쳐보였던 이미지의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가 살아 있었다. 멜리에스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가 마지막 영화를 만든 1913년 이래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시네 주르날> 편집장 레옹 드뤼오가 파리 몽파르나스 역 구멍가게에서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기억의 저 끝을 한참 헤집어야 겨우 생각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드뤼오의 손에 이끌려 홀연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느 날 드뤼오는 몽파르나스 역을 지나다 작은 가게에서 사탕과 장난감을 팔고 있는 멜리에스를 발견한다. 그 가게는, 잔 달시라는 이름으로 멜리에스 영화에 출연했던 아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를 발견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에게서 들은, 영화를 그만둔 뒤의 인생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멜리에스는 힘겨운 노년을 견뎌내고 있었다. 1913년 파테영화사가 그에 대해 벌인 법적소송에서 패한 것이 내리막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던 이듬해 그는 몽트뢰이유에 있는 스튜디오 하나를 극장으로 개조하는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을 벌였지만 뜻대로 되는 건 없었다. 1923년, 그는 완전히 파산했다. 채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법원은 그에게 전 재산을 팔 것을 요구했다. 이때 그의 필름의 상당수는 신발공장 재료로 팔려갔다. 그뒤 멜리에스는 지방 공연으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1925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사탕가게에 들어앉게 됐다.

한편, 그날 멜리에스를 발견한 데 감격한 드뤼오는 곧 동료 저널리스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들은 1929년 12월16일 파리 살 플레엘에서 멜리에스 환영회를 열어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기획비평 <메트로폴리스> 네살짜리 판타지

1927년 500만마르크에 이르는 제작비, 촬영기간 11개월 등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가 개봉했다. 제작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극심한 흥행부진을 보이고 있는 이 영화는 평단을 지지와 반대로 나눠놓았다. 논란의 와중에서 프랑스 비평가 장 프레보스트가 혹독한 비판문을 보내왔다. 그는 <메트로폴리스>를 “네살짜리의 판타지”로 깎아내렸다. 그의 글을 발췌해서 싣는다.(여기는 사체로 함이 어떨지...)

이 영화는 내가 본 가장 어리석은 영화들 중 하나다. 영화의 시작, 특히 그 5분은 부인하기 힘든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도시와 빌딩의 이미지는 정말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건 마치 편두통을 앓는 시인이 본 뉴욕 같다. 그러나 영화에 나타난 인간묘사는 너무 실망스럽다. 늙은 과학자는 센티멘털한 칼리가리나 다름없다. 도시의 지배자라는 설정도 진부하다. 상반된 두명의 인물로 나오는 마리아? 동정을 받아야 하는 역할에서는 너무 약하고, 미움을 받아야 하는 역할에서는 너무 멋있다.

단 신 들

할리우드 영화제작 규제안 발표

1927년. 할리우드의 자정과 이미지 혁신을 위해 설치된 MPPDA(의장 윌 헤이즈)가 일종의 영화제작 규제 코드인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주의해야 할 것’(Don’t and Be careful)을 발표했다. 11개 항으로 된 ‘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신성모독 ▲음란하거나 암시적인 모든 나체 ▲백인 노예 ▲백인과 흑인간의 성적관계 ▲출산장면 ▲불법적인 마약거래 ▲성 위생학과 성병 등이 포함된다. 이 조항들은 그것들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상관없이 절대로 스크린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말 그대로 ‘주의해야 할 것’에는 ▲국제관계 ▲방화 ▲살인기술 묘사 ▲범죄자에 대한 동정 ▲선동 ▲첫날밤 ▲강간 ▲과도한 키스 등 26개 조항이 담겨 있다.

“사운드, 몽타주의 예술 파괴”

1928년 8월5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조감독인 그레고리 알렉산드로프, 푸도프킨이 ‘음향에 관한 선언’(이 선언의 이름은 책에 따라 Statement on Sound, The advent of Sound Film, Sound and Image로 제각각입니다. 저는 보드웰의 책을 따랐습니다)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유성영화는 양날의 칼”이라면서, “사운드의 사용으로 자칫 영화가 고급문학을 각색한 드라마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럴 경우 사운드가 몽타주의 예술을 파괴하리라는 것이 이들의 우려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운드는 오직 시각적 몽타주에 대위법적으로 결합될 때라야 그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곧 사운드와 이미지가 충돌을 일으킬 때라야 그들이 추구하는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사용되기만 한다면 사운드는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며 사운드를 통한 혁신을 기대했다.

<조개와 승려> 시나리오 작가 시위

“제르맹 뒬락은 암소다!” 1928년 2월9일 초현실주의 여성감독 제르맹 뒬락의 신작 <조개와 승려>(The Seashell and Clergyman)가 상영되던 파리 우르술린 극장에 때아닌 시위가 벌어졌다. 시인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뒬락이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의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일군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동원해 위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린 것이다. 시나리오상의 에로티즘을, 뒬락이 꿈이라는 장치로 희석화했다는 것이 아르토의 불만이다. 한편 이를 보다 못한 극장 관객이 시위대에 맞서는 바람에 소동은 더욱 커졌다. 관객의 한 사람인 르네 클레르 감독은 “양쪽을 중재해 소동을 진화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독일 UFA, 위겐베르크가 이끈다

1928년 1월2일 앨프리드 위겐베르크가 재정 책임을 물어 경질된 에리히 폼머에 이어 독일 UFA의 수장에 임명됐다. 위겐베르크는 1912년 독립제작사인 델리그를 설립한 이래 프로파간다 영화를 전문으로 만들어왔으며, 우익 정당인 국가사회주의당의 주요 당원으로 활동해왔다. <메트로폴리스> <파우스트> 제작과 흥행 부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른 UFA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는 일이 그의 첫 번째 임무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