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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용 식탁> 그리고 한국 공포영화 [1]

한국 공포의 새로운 발견

의 탈(脫)공포적 긴장에 주목한다

시사회가 열리기 며칠 전, 한 어머니가 두 아이를 던지고 한 아이를 안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앵커는 차분히 이 소식을 전했지만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TV는 그런 비극쯤 아랑곳하지 않았고, “저런 저런” 혀를 차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당신은 아마 을 보면서 현실에서 벌어진 이런 일을 떠올릴 것이다. 잠시 뉴스에서 흘려듣던 사건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당신의 신경을 긁는다. 쭈뼛 머리가 곧두서고 온몸에 파랗게 소름이 돋아나는 그 순간은 뉴스와 달리 한동안 당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은 공포물이기 전에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당신의 심장에서 피가 나는지 확인하는 영화다.

아직 완성이 안 된 <아카시아>를 제외하면 은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다. 이수연 감독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나 <소름>이 그랬듯 공포물의 어법에 얽매이지 않는 정말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로 세상에 나타났다.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등장하지 않건만 은 무섭다. 그건 공포를 만들어내는 영화적 트릭이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도시와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 자체가 간을 졸이게 만든다. 리안의 <아이스 스톰>조차도 처럼 도발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러는 너무 느린 영화라고, 귀신이 자주 나오지 없는 영화라고 불평을 하겠지만 은 ‘강추’에 한표를 던질 만한 작품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과 이수연 감독에 관한 이야기와 한국 공포영화의 현주소를 묶는 특집기사를 준비했다. - 편집자

- - - - - - - - - - - - 프 롤 로 그 - - - - - - - - - - - -

은 <식스 센스>(1999)가 예상치 못했던 반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기 전에 이미 태어났다. 1998년 말 시작해 99년 초에 완성된 시나리오는 여자배우들 사이에서 ‘아주 독특하다’는 긍정적 반응을, 남자배우들 사이에선 다소 심드렁한 반응을 얻었다. 시나리오를 받아든 고소영은 읽다가 너무 무서워 대본을 베란다에 내놓고 하룻밤을 보낸 뒤에야 마저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섬뜩함 때문이었을까, 의 수난은 유난했다. 가벼움이 득세하던 시기에 이 무섭고 무거운 시나리오는 배우들의 손에서 자꾸 튕겨져나왔고, <살인의 추억>(같은 배급사)과 <장화, 홍련>(같은 제작사) 덕분에 애초 잡혀 있던 개봉날짜는 한참 뒤로 미뤄졌다. 그 사이 악소문이 ‘멱살’을 낚아채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들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국내용 버전으로 시작하더니 ‘눈에 귀신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버라이어티>는 이 <식스 센스>를 베꼈다는 억측 기사를 내보냈다. 완성된 영화가 시나리오만큼 무서운지 객관적으로 측정할 길은 없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쓴 이수연 감독은 ‘한치의 양보없이’ 콘티북 그대로 촬영을 마치는 ‘완벽주의’를 보여줬고, 완성된 영화를 본 한 여성평론가는 “지금까지의 한국 여성감독 중에 가장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과 비교될 작품은 <식스 센스>가 아니라 <소름>(2001)이다. 한국형 호러의 계보를 만든다면 그 호명에서 빠질 수 없는 이 두 작품은 같은 기원을 갖고 있다.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절망과 공포의 사나운 얼굴을 또렷이 응시했다는 출발점. <소름>의 윤종찬 감독은 영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98년의 국제통화기금(IMF) 풍경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보였다. 사람들은 단절돼 있었고 서로 공격하거나 냉소할 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찔함, 소름 돋는 공포는 그런 거였다.” 공교롭게 의 이수연 감독에게도 98년의 IMF 풍경이 눈에 밟혔다. “놀랍게도 하필 요즘 비슷한 사건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때도 그랬다. 부모가 다 멀쩡한데도 고아원에 아이들이 넘쳐났다. 애를 놓고 도망치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피투성이 범벅이 예정된 신체들, 초현실적인 권능을 지닌 악령, 죽어도 죽지 않는 연쇄살인범은 그래서 등장하지 않는다. <소름>에선 허름한 변두리 아파트 그 자체가 괴물이었고, 그 안에 버티고 선 인간들은 더 흉악한 괴물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짜 공포가 나온다”는 윤종찬 감독의 인식은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과 아이를 죽이고, 오빠가 여동생을 죽이는 소름끼치는 운명을 만들어냈다. 에서 그 ‘패밀리 호러’의 시야는 더욱 좁혀졌고 분명해졌다. 어머니가 아기를 죽이고, 아이는 어머니의 생명을 뜯어먹고 산다. 모성애와 가족애는 불변의 신화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회로에 갇힌 듯하고, 탈출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패밀리 호러’라는 큰 테두리로 두 작품을 묶을 수는 있으나 그들이 선택한 길의 방향은 많이 다르다. <소름>에서 가족살해는 자신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추상화된 그 운명은 선과 획이 분명한 채색화라기보다 추론의 여지가 많은 여백의 어떤 것이었다. 살해된 용현(김명민) 어머니의 주검이 미금아파트 어디에 있는지, 선영(장진영)이 남편을 어떻게 죽였는지, 용현은 경찰이 찾는 약혼자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모성에도, 가족애도, 모두 허물어뜨린다

의 꽉 짜인 아귀는 1mm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한신은커녕 단 한컷만 들어내도 논리적 전개가 훼손될 판이다. 무엇보다 가족살해를 희뿌연한 운명에 맡기지 않고 명백한 의지로 펼치며, 상상에 맡기지 않고 직접 보여준다. 의 섬뜩함은 신화화된 모성애와 가족애를 아주 차갑게 허물어뜨리는 데서 나온다.

“가족이 무서운 건 내가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안다는 전제하에 아주 깊숙한 뼛속까지 파고드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거고, 더 무서운 건 외부 사람은 그 진행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렇게 신화화하고 표준화해서 팔아먹고 있는 가족애나 모성애의 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면 왜 우리 집은, 내 형제는, 내 부모는 딴 사람과 달리 날 사랑하지 않지, 난 왜 이렇게 이상하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렇구나 하고 굳세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당위라는 것과 인간의 본성이라는 걸 분리해서 제대로 한번 보자는 것이다. 인정할 걸 인정해야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어떤 이데올로기극인 건 아니다. 비록 그 접근 속도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어도 기시감이 없는 새로운 호러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기시감이라면 최근 신문 사회면을 차고 들어선 잇단 가족살해 혹은 가족의 동반자살이다). 공포영화의 클리셰는 아예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감독은 호러의 장르화된 문법에 포획된 사람이 아니다. 동서양 어느 쪽이든 공포영화에 대해 물으면 그는 입을 다문다. 취향의 차이로 본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링>의 어떤 버전도 그는 보지 않았다. 은 그래서 선연한 핏빛을 완벽하게 탈색했을 것이다. <장화, 홍련>이나 <여괴괴담> 시리즈의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지만 온전한 피를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왔다가 슬쩍 떠나가면 쓱 지워지는 것이어서 더욱 가공스럽다. 청소차가 다가와 아이를 치었고 그 아이를 하수구에 버리고 떠나가면 그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하철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드나들어도 엄마가 죽음으로 이끈 두 아이는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 아파트에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내려도 털끝만큼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파트 혹은 도시라는 공간은 고립된 숲속만큼이나 공포스런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이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그걸 드러내는 이미지는 대단히 강렬하고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정원(박신양)이 처음으로 귀신을 목격한 새벽, 그는 도망치듯 아파트를 빠져나와 차를 몰고 일산으로 달아난다. 질주하는 차량 뒤편으로 웅장하게 버팅기고 선 도시의 이미지는 공포스런 괴물의 아가리, 딱 그것이다. 동터오는 빛을 받아 가로등이 꺼지는 순간 오히려 그 아가리는 더욱 시커멓게 변해버린다. 정원이 같은 것을 보고 믿음을 나누기로 한 연(전지현)과의 끈을 잘라버리고 달아날 때, 그는 거꾸로 그 아가리 속으로 질주해 들어가버린다. 도시의 거대함이 아니더라도 미니멀한 이미지의 ‘4인용 식탁’이 등장할 때마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괴기스런 공포감을 전달하는 것도 특징적이다. 또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여인과 눈을 마주친다는 ‘상상’은 놀라운 동시에 끔찍하다. 정밀함과 거대함, 영화적 상상력과 현실적 논리력이 손을 꽉 맞잡고 있다.

조용규 촬영감독 인터뷰 “공포 아닌 고통을 묘사했다”

의 조용규 촬영감독은 1997년 <나쁜 영화>로 데뷔한 이래 <러브 러브> <미술관 옆 동물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품행제로> 등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조용규 촬영감독은 지난 2001년 6월 멤피스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호주에서 공부하던 중 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지금은 <효자동 이발사>의 콘티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최초의 제안을 받고 상상한 영화의 이미지는. 1년 과정의 호주 유학 도중 제의를 받았다(외롭기도 하고 영화도 좋고 해서 6개월 만에 귀국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감독과 대략적인 틀에 관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고민과 구상을 교환했다. 공포가 아니라 고통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호러영화라고 생각지 않았고 마음의 묘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초기 단계에 정한 촬영의 원칙은. 다른 영화나 그림을 참조하기보다 구체적 장소에 집중하려고 했다. 조명과 촬영이, 배우가 어떤 식의 느낌을 갖고 하는 연기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랐다. 무거운 느낌을 주기 위해 85B, CC20G 필터를 써서 녹색톤이 묻어나게 찍었다. 색보정 과정에서 많이 걷혀나가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연출하려고 한 카메라 움직임이 포함된 감독의 콘티가 영화에 그대로 들어간 부분도 많다.

스펙터클이 있거나 야외신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지만 2.35:1 비례의 슈퍼 35mm 촬영을 택했다. 기본적으로 어떤 장르의 영화든 2.35:1이 가장 영화적인 비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영화’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화면의 여백이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촬영의 관점에서는 공간을 어떻게 분류했나. 현재시제 장면 안에서는 인위적 구분을 짓지 않았다. 실내장면은 시나리오 느낌대로 너무 밝지 않은 로(low)키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고 회상장면의 배경인 김여진의 아파트는 거칠게, 전지현과 남편이 살던 집은 묵직하게 색보정을 했다. 집을 나온 전지현의 거처는 세팅을 최소화한 빈 느낌이다.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현상과정에서 손실되는 은 성분을 보존해 화면의 입자 느낌을 살리는 기법)의 현상을 통해 의도한 효과는. 블리치 바이패스로 얻을 수 있는 깨끗한 입자, 낮은 채도, 낙차 큰 콘트라스트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수연 감독이 박신양의 과거장면은 다른 부분보다 컬러가 들어간 느낌을 원했다. 현상과정에서 온도와 현상 탱크에 머무르는 시간을 달리해서 조절했다.

도시의 색깔, 질감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마지막 사건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를 오랫동안 찾아다녔다. 사방이 꽉 막힌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강변도로 장면에서는 달리면서 높낮이를 조절하는 일종의 스테디캠, 리프트캠을 사용했다.

처음 죽은 아이들을 본 박신양이 차를 몰고나가는 장면에서 저절로 꺼지는 가로등은 후반작업으로 연출했나. 아니다. 촬영을 하는데 때마침 가로등이 꺼졌다. 편집하면서 키포인트로 이용한 셈이다. 김혜리

▶ 그리고 한국 공포영화 [1]

▶ 그리고 한국 공포영화 [2]

▶ 그리고 한국 공포영화 [3]

▶ 그리고 한국 공포영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