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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고골리에 대한 기억,<악령-비>
김용언 2003-09-04

18세기 러시아의 한 시골 마을. 신학생 토마는 하룻밤 묵게 된 농가의 주인이 마녀임을 깨닫는다. 반쯤 죽을 정도로 마녀를 두들겨패고 달아난 토마는 다음날 지역 영주의 외동딸이 죽어가면서 임종미사를 집행해줄 사람으로 자신을 지명했다는 전갈에 의아해한다. 영주의 저택에 도착한 토마는 그 딸이 바로 어젯밤 자신이 만났던 마녀임을 깨닫는다.

러시아 국민작가 니콜라이 고골리는 유럽 곳곳에 퍼져 있던 마녀 전설을 거의 훼손하지 않은 채 단편 <비이> 속으로 간결하게 옮겨왔다. 마녀와 괴물과 악령이 신성한 교회를 장악함으로써 신성모독과 믿음 사이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는 설정은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모호한’ 테마이다. 현실 세계 곳곳에 만연한 악의 잔혹함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고골리가 이 전설에 매혹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내가 들은 그대로 한치의 가감없이 쓴’ 고골리의 작품을 일대일의 비율로 스크린 위에 옮겨온 영화 <악령-비> 역시 고골리의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끌어안는다(흥미로운 건 마리오 바바의 호러클래식 <블랙 선데이> 역시 <비이>를 원전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원작 줄거리와 거의 상관없었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과 비슷한 케이스다).

그런 의미에서 <악령-비>는 미하일 바흐친이 고골리를 메니피아 장르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선언한 지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고대 기독교 문학과 비잔틴, 중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불확실한 완결성 너머로 현실의 굳건한 권위들에 의문을 제기했던 환상문학의 전통을 계승했던 메니피아는 (바흐친적 의미로서) 카니발의 쌍둥이기도 하다. ‘그들 자신과 일치되기를 멈추고’ 시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카니발은, 사실주의를 통해서는 결코 말해질 수 없던 어떤 어두운 진실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어주지 않았던가.

<악령-비>는 문자 그대로 가뿐하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활보하는 카니발적인 특성으로 충만하다. 브뢰겔의 회화를 보듯 소박한 정취와 넉살 좋은 웃음으로 가득하던 영화 초반부는 토마와 마녀의 첫 만남에서부터 조금씩 다른 길로 들어선다.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과 허나드 버만을 적절히 버무린 듯한 스코어가 울려퍼지며 악마에 사로잡힌 채 질주하는 토마의 실루엣은,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영역에 훌쩍 진입하는 순간을 마주 대할 때의 머뭇거림을 일깨운다. 그리고 토마가 마녀와 함께 밤을 지새야 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 이르러 등장하는 바로크적인 그로테스크함은 영혼과 육체, 성과 속 사이의 격렬한 투쟁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신성모독의 현장이 펼쳐지는 교회는 검은색과 흰색, 붉은색으로 채색된 채 무시무시한 탐미주의로 과잉된다. 그 순간 수도사의 옷만 걸친 무뢰한 같았던 토마는 비로소 진정한 악의 공포에 맞닥뜨리며 간절하게 신을 갈구하게 되고, 망자를 위한 기도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위한’ 기도로 바뀌어간다. 증오와 복수심에 눈을 희번덕거리는 아름다운 마녀가 교회의 낡은 벽으로부터 악령과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들을 불러내고, 교회는 어둠의 세력이 장악하는 곳으로 바뀐다. 신에게 기대려던 인간의 연약함은 절대적인 패배를 거둔다. 통제력을 상실한 영혼과 육체에 대한 두려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 악은 승리할 것이다. ‘오직 우리 마음과 신만이 아는 것들’의 매혹적인 지옥도, 이 순간 떠오르는 괴테의 문장, “오직 왜곡된 환상만이 여전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단언했었다.

김용언

Viy or The Sprit of Evil, 1967년감독 기요르기 크로파치요프, 콘스탄틴 예르쇼프출연 레오니드 쿠라블리요프, 나탈리야 발레이, 알렉세이 글라지린 장르 공포DVD 화면포맷 1.33:1오디오 돌비디지털 5.1출시사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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