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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변화와 고민을 캐묻다 [1]
박혜명 2003-09-19

옛날부터 알고있었어, 우리 안에 악(惡)이 있다는 걸

황진미 평론가와 남동철 기자, 김기덕 감독의 변화와 고민을 캐묻다

김기덕 감독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록 그랑프리를 타지 못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널리 호평받은 로카르노영화제가 그에겐 큰힘이 된 듯하다. 지난해 <해안선>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한 뒤 국내에서 상당한 질타를 받았던 때와 대조적이다. 여러 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평단의 비판에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격한 감정 대신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 공식 기자시사회를 하루 앞둔 9월1일 오후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여성평론가로서 드물게 김기덕 감독 영화에 호의를 표했던 황진미씨와 남동철 기자가 나눈 2시간에 걸친 김기덕 감독과의 대화. - 편집자

황진미 | 일단 화면은 굉장히 좋다. 물, 산, 그 자체가 다 설치미술이자 행위예술이다.

김기덕 | 설치미술이지. 다 설치한 거니까. (웃음)

황진미 | 고양이 꼬리로 글씨 쓸 생각은 어떻게 한 건가?

김기덕 | 고양이, 출연료는 안 줬지만 화면에 자주 비춰주긴 해야 할 거 같아서, 라고 답하면 말도 안 되는 거고…. (웃음) 계절마다 한 동물을 등장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는 강아지, 닭, 고양이, 뱀, 거북이 이 다섯 가지 동물이 나오는데, 강아지는 아이와 정서적 동질감을 주기 위해 아이와 노는 장면에 집어넣었고, 닭은 아이들이 성적으로 눈을 뜨는 시기에 썼고, 고양이는 보통 붓들이 동물의 털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붓글씨 쓰는 데 동원했다. 그리고 뱀은 다비식 다음에 노승의 또 다른 이미지로 나온다. 노승이 죽으면서 뱀이 나와서 노승의 옷을 지킨다. 뱀은,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사악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물인데 이 영화를 하면서 뱀에 대한 편견을 좀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두렵고 징그러운 존재로 그려지지만 한번 다르게 해석해보자, 인간에게 가장 많이 비난받지만 영물로 이해해보자고 생각했다. 거북이는 뭐, 영물 중 하나다. 400년을 산다는 둥. 인간은 그렇게 장구하게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의미로 썼다.

황진미 | 이 영화가 높이 평가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매를 벌었다는 느낌도 든다.

김기덕 | 높이의 기준을 어디로 치고? (웃음)

황진미 |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역사성이나 사회성, 그런 것들이 다 배제된 상태, 현실의 시공간이 없고 천상이냐 지상이냐 논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다. 거기에 나오는 인간들은, 지극히 단순화하고 일반성만을 추출해낸 고도의 추상화된 개인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여지껏 김기덕 영화들이 많은 것을 보여주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된다. 너무 관념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막 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러니 과잉이 넘쳐나지, 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거다.

김기덕 | 감독들은 참 슬픈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작과 다르길 요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기를 요구한다. 다르면 변했다, 안 다르면 안 변했다. 어쨌든 도마 위에 파닥거리는 생선인데, 난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쉬자고 생각했다. 지나친 오해나 이해를 받고 싶지 않고, 나 스스로 결정판을 고민하지 않고 싶었다. 순전히 나 자신은 무엇이냐, 2002년 요란한 감독 중 하나로 살아가는 김기덕 자신은 무엇이냐를 알아내는 데 충무로 돈 10억원을 쓰고 싶었다. 관객도 쉬어주길 바랬다. 내 삶에서 영화감독이라는 걸 빠져나가보자, 그래서 연기도 했고, 영화 자체마저도 내가 좀 빠져나가보자, 남동철의 돈 10억원 가지고 깊은 산속에 40명 데리고 피서를 간다고 생각해보자, 했다. 너무 나갔나? (웃음) 무책임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그동안의 내 부지런함에 비해서. (웃음)

황진미 | 사실은 그게 기분나빴다. 자신감 넘친다 이거지? 이렇게까지 단순화하는 것. 관객은 기존의 김기덕 영화에 뭐가 나와봐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공간이라는 걸 눈치챈다. 역사도 없고 사회도 없고. 정말 얘기하고 싶은 바는, 지극히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거다, 라는 걸 눈치챌 사람은 다 눈치챘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그걸 배를 까뒤집고 보여주는 거다. 물론 그게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10억 가지고, 40명 끌고 깊은 산속으로 피서 갔지

김기덕 | 난 힘들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힘들지 않아야 하니까. 내가 힘들면 상대방은 그걸 못 볼 테니까. 좀전에 얘기한 것처럼 창피하지도 않았다. 올해 초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만들고나면 영화를 중단하거나 다른 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힘들었거든. 사실 영화 만드는 것은 힘들지 않다. 갈수록 내가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런데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정말 증발해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옛날에 월급 2만원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던 정서도 기대할 수 없고, <악어> 할 때 제작자한테 발로 채이면서 눈물 젖은 김밥 먹던 긴장감도 없고, 그러니까 두려워지더라. 저절로 떠밀려서 농부를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큰 마음을 먹어야 농부가 될 수 있다. 영화가 계속 망했으면 저절로 농부가 됐을 텐데. (웃음)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봄’, ‘여름’, ‘가을’을 찍었고 ‘겨울’까지만 찍고 빨리 털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봄’이 뭐 필요하냐. ‘그리고…’로 끝내면 되지. 이제 40 넘은 나이에 너무 건방지잖아. 너무 완결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리고 봄’을 찍지 않고 싶었는데 제작사에서 꼭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LJ필름 이승재 대표한테 그랬다. ‘겨울’에 김기덕이 출연했기 때문에 ‘그리고 봄’을 찍기가 너무 두렵다. 내가 출연하지 않았으면 객관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고 변명할 여지가 있지만, 김기덕이 거기 들어가서 인생은 이런 거야, 산 위에 올라가서 부처님 뒤에 숨어서 세상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리고 봄’을 찍기가 두려워진 거다.

황진미 | 이 영화는 외국 사람들이 진짜 재미있게 볼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동양적 판타지의 결정판이니까.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모르잖나. 그런데 이 영화는 정통 조계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두 가지의 도그마를 엮고 있다. 사실은 너무 과감하다. 이렇게 단순화한 것을 끝내주는 미장센과 같이 보여주면 서양 사람들은 이게 다다, 난 다 알았다, 이럴 것 같다는 거다.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동양사상을 쉽게 얘기해줬지, 동양적인 그림 죽이지, 좋아할 것 같다.

김기덕 | 좋아했지. 로카르노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당신 영화가 그랑프리다, 이러더라고. 결론은 그게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고. 자기는 영화가 캐릭터와 사건으로만 구성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과 공간으로도 영화가 된다는 걸 봤다. 고마웠다. 내가 생각했던 부분을 가지고 영화를 봐줬기 때문에.

남동철 |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구분한 것에 따르면, <봄 여름…> 이전의 영화들은 자전적인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시간순서로 따지면 <수취인불명> <해안선> <실제상황> <야생동물 보호구역> 순이고, <파란 대문> <나쁜 남자> <악어> <섬>은 그 변주라고 말했다. 이전의 모든 영화들이 자전적인 영화이고 <봄 여름…>은 아니다, 단순히 그렇게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자전적인 요소들이 추상화돼서 이 영화에선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당신은 이 영화 역시 자전적인 영화라고 말했는데….

김기덕 | 상황보다는 심리쪽일 거다. 마음의 고민에 대한. 이미지는 다큐적 사실이 아니고 어느 시공간에서나 가능한 사람들의 삶을 그렸지만 그것을 보는 내 심리는 2002년을 살아가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라고 생각한다. 카메라 숏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악어> <섬> <나쁜 남자>는 클로즈업영화다. 가까이서 인물의 눈, 코, 입까지 다 다루는. <해안선>이나 <수취인불명>은 풀숏이다. 사람의 몸을 보여주는 영화다. 사회나 국가 같은 게 나오고. <봄 여름…>은 그것마저도 희미해지고 불분명해지는 롱숏의 영화다. 더 멀리 빠져나왔다. 사람의 몸도 묻혀서 풍경의 일부분이 되고 눈, 코, 입은 전혀 형체를 못 느끼는. 이 영화가 허술하다, 스케치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 전작들을 끌어와서 비교하지 않으면 다 볼 수 없을 만큼 이 영화는 롱숏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이다.

▶ 김기덕 신작,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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