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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신작,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2]

반복하면서 상승하는 작가 김기덕

그렇다면 <봄 여름…>은 김기덕 영화의 새로운 경지인가? 당연한 의문이 생기지만 이런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봄 여름…>을 특권화해 김기덕의 전작을 폄하하거나 김기덕의 전체 영화를 편의적으로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런 구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기덕은 그때그때 형편이 닿는 대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도 있고 다소 처지는 작품도 있지만 그는 자기식의 영화를 포기한 적이 없으며 데뷔작 <악어>부터 <해안선>까지 스타일과 세계관은 일관성을 지켜왔다. <봄 여름…> 또한 다르지 않다. 악명 높은 잔혹묘사가 없다고 해도 호수에 떠 있는 암자의 풍광만으로도 김기덕 영화의 표식은 선명히 드러난다. 김기덕 감독 자신은 <봄 여름…>을 ‘롱숏의 영화’라고 부른다. 전작들이 인물의 세부를 묘사하는 클로즈업의 영화 혹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그리는 풀숏의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거기서 더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기존 영화에 들어 있는 김기덕 영화의 요소들을 추상화했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이런 점에서 <봄 여름…>은 <섬>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기덕 영화의 원형을 이루는 남자와 여자, 물과 물 위의 공간을 추상화한 <섬>의 이미지는 <봄 여름…>을 보는 동안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수면으로 올라온다. 폐쇄적인 <섬>의 시공간에서 사계라는 시간축을 세우고 물 위에 유곽 대신 암자를 세우면 <봄 여름…>의 선경이 펼쳐진다.

<봄 여름‥ >의 이야기는 영화가 서술하고 있는 시간 순서처럼 '봄'에서 시작해서 '그리고 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단 '겨울'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나머지 장을 플래시백과 에필로그로 이해했을 때 이야기로서 온전해진다.

동어반복? 물론 그렇다. 김기덕은 같은 영화를 다르게 만드는 감독이다. 또는 김기덕은 김기덕 영화라는 장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매번 지적되는 단점마저 되풀이해야 추진력을 얻는 감독이다. 이런 사실이 비난의 이유가 될까? 예를 들어 <봄 여름…>과 <섬>의 관계는 <파란 대문>과 <나쁜 남자>의 관계와 같으면서 다르다. <파란 대문>과 <나쁜 남자>가 동일한 캐릭터로 만든 전편과 후편인 반면 <봄 여름…>은 <섬>을 품고 있는 영화다. <섬>의 남자가 죽지 않고 어린 시절 살았던 암자를 찾아온다면, 그가 감옥에 갔다와서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한다면,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을 가린 여자(희진)가 아이를 안고 찾아와 아이만 남겨두고 죽어버린다면, 얼음 밑 차가운 물속에서 자신의 과거가 얼어붙은 시신으로 떠올라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 남자는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봄 여름…>과 <섬>의 같지만 다른 시공간은 이 지점에서 자해와 고행이라는 갈림길을 제시한다. 육체가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소리를 낼 때 증오와 편견도 더불어 놀라 원수의 손을 기꺼이 잡을 것이다. 김기덕이 기어이 맷돌을 허리에 매달고 산의 정상까지 올라간 까닭이다.

아! 이 풍요로운 단순함

아마 <봄 여름…>을 보면 당신은 그 단순함에 말문이 막힐지도 모른다. 마치 호수에 절을 하나 지어놓았을 때 이 영화는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덩그러니 벽이 없는 문을 만들었을 때 이 영화는 스스로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놀랄 만큼 단순한 것이다. 그 작풍과는 어울리지 않는 집요함으로 그는 쉼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이코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논하면서 썼던 이 문장은 <봄 여름…>을 이야기하는 데도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그는 “극히 단순한 요소의 조합이 생각지도 못했던 풍요로움으로 화면을 활기띠게 한다”고 덧붙였다. <봄 여름…>은 풍요로운 단순함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하는 영화다. 김기덕이라는 단순함이 만드는 풍요함, 그것이야말로 지금 김기덕을 말해야 할 이유일 것이다.편집 심은하

본격 김기덕 연구서 <김기덕: 野生 혹은 속죄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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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을 통해서 우리 시대를 이해한다

최근 발간된 <김기덕: 野生 혹은 속죄양>(행복한 책읽기 펴냄)은 지금까지 나온 김기덕 감독에 대한 연구를 망라한 책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엮은 이 책에는 김기덕 영화 9편에 대한 작품론을 비롯해 작가론과 인터뷰, 김기덕 감독의 자필수고, 인물론, 대담 등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서 정성일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소 과장해서 바타이유의 말을 인용하자면 사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그런 인간을 만든 프랑스 혁명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김기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론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정성일씨가 쓴 <해안선>에 대한 평. <해안선>은 개봉 당시 평론계에서 비판의 표적이 된 작품이지만 정성일씨는 이 영화에서 김기덕의 동어반복이 그의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은 하나로 회귀한다. 그런데 그 회귀는 억압하는 것과 억압받는 것이 서로 술래잡기를 하면서 누가 누구를 쫓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전 <씨네21> 편집장 허문영씨가 쓴 <악어> 평과 여성평론가 황진미씨가 쓴 <수취인불명> 평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허문영씨는 <악어>가 사랑과 구원과 예술가적 욕망의 실패를 담은 영화라고 말한다. <악어>의 마지막 장면이 제시하는 기괴한 아름다움에서 철저한 예술가로서 생을 마감하는 데 실패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본 것이다. 반면 황진미씨는 <수취인불명> 평에서 대부분 여성평론가가 지적하는 김기덕 영화의 반페미니즘적 성격을 거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미군 병사를 받아들이고 제 눈을 찌르는 은옥의 태도가 남성 중심의 사고틀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흔들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영화에 대한 해석만을 담은 비평서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직접 쓴 글과 그를 인터뷰한 <하퍼스 바자> 기자 김경씨의 글은 그가 어떤 삶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공장을 다니던 10대 시절, 하루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기계를 만들어 공장장이 된 이야기, 1990년 2월 프랑스로 가 부랑자처럼 살며 그림을 그렸던 이야기, 국내에 돌아와 닥치는 대로 시나리오를 쓰던 이야기 등은 김기덕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흥미를 일깨운다. 김기덕 감독은 자필수고에서 한국의 평단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표했는데, 아마 이 책은 누구보다 김기덕 감독 자신에게 큰 위안과 격려가 될 것 같다.

▶ 김기덕 신작,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1]

▶ 김기덕 신작,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2]

▶ 김기덕 감독의 변화와 고민을 캐묻다 [1]

▶ 김기덕 감독의 변화와 고민을 캐묻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