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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질러버려서 시원해요,<은장도> 송선미
권은주 2003-10-22

송선미(29)는 엉뚱한 구석이 있다. 이런 식이다. 인터뷰 직전에 황급히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고 해서 얼마나 바쁘기에, 하고 말을 뗐더니만 “김밥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날씨도 너무 좋고. 소풍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되묻는다. 부족하다면 하나 더. “사람구경이 취미”라고 해서 독특하다고 했더니 “어릴 적부터 남들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습관”인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칠판 보는데 자신은 선생님 눈만 쳐다보고 있다가 “꼬시려 한다”는 누명을 쓰고 왕따를 당했으며, 등교 길에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지각하기 일쑤였다는 경험까지 들려준다.

그런 일면을 봤다 하더라도, <은장도>의 가련 역을 주저없이 맡은 건 의외다. <은장도>에서 송선미는 하사관 출신으로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기숙사 왕언니로 나온다. 이름은 눈물을 달고 살 것 같지만, 실제론 입 열면 욕이요 분위기 뜨면 망치는 푼수다. 은장도를 품고 다니는 민서(신애) 앞에서 ‘거미줄 타령’(?)을 늘어놓을만큼 앞뒤 안 재는 여자다. “지금까진 예쁘게 보이려고 자를 재놓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인간이란 게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그동안 너무 갇혀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가슴이 후련해요. 매번 조용하고 지적이고 뭐 그런 역할만 맡았는데….”

망가짐을 택했지만, 실행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배우들 기죽이는 거 싫어하는” 감독의 원칙 때문에 위아래 할 것 없이 장난치는 현장 분위기에 젖는 것도 어려웠다. 욕설이 반인 대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일례로 영화 초반부에 기숙사 방졸들과 함께 “생리대 값이 너무 비싸다”며 정부의 세금 제도를 탓하는 장면 촬영 때엔 2분 가까이 혼자 떠들어야 해서 탈진할 정도였다고. “리허설만 수십번 넘게 했는데 나중에 슛 들어갈 때쯤 되니까 허기가 지던데요”전직이 여군이라는 설정 등을 최면 삼고서야 가련의 무식한 악센트를 구사하기 시작했단다.

한때 송선미는 연기를 그만두려 한 적도 있다. 모델 일을 접고 <미술관 옆 동물원>의 다혜 역을 시작으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그는 “배우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자학에 시달렸고 “겁이 나 다음 작품 고르기조차 힘들었다”고 말한다. “뭘 하든 전 목숨 걸거든요. 그때는 자살까지도 염두에 뒀어요” 그때마다 “딱 1년만 더 해보자”는 다짐으로 지금까지 견뎌냈고, 그동안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영화 <두사부일체> <도둑맞곤 못살아> <국화꽃향기> 등과 드라마 <거침없는 사랑> 등이 추가됐다. “우리 나이로 서른이잖아요. 사물이나 세상을 보는 제 관점이 생긴 것 같아 좀 안정이 돼요. 20대에는 좌충우돌 우왕좌왕했는데….”

그녀는 얼마 전 <목포는 항구다> 촬영을 끝냈다. 조재현과 함께 마약 조직에 위장 침입하는 여검사로도 나오는 그녀는 8월 한여름에 <은장도> 촬영장과 번갈아 오가느라 육신이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말미에 배우 안 했으면 뭐 하고 있을 것 같냐고 했더니 송선미는 “소녀 취향 못 버리는 센티멘털하고 철없는 아줌마가 됐을 것”이라며 깔깔대면서 다음엔 스릴러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조심스레 내비친다. “연약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나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내친 김에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에드워드 노튼과 부드러움과 강함의 경계를 지우는 메릴 스트립을 닮고 싶다”고도 했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