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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카데미 20년 [1]
이영진 문석 2003-11-07

영화계 기둥들을 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한국영화 르네상스, 여기서 싹텄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20년을 맞았다. 1984년 남산 영화진흥공사 건물(현 영화감독협회)의 구석진 방에서 출발한 영화아카데미는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올해까지 배출한 296명의 영화인 중 대다수가 충무로 현장을 바쁘게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햇수로 20년 영화아카데미의 역사는 곧 한국영화의 최근사와 동의어나 다름없다. 2000년 만하임-하이델베르그영화제, 2001년 발라돌리드국제영화제 등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 특별전’이 열리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영화아카데미의 20년을 돌아본다.

<살인의 추억>

<싱글즈>

<지구를 지켜라!>

<4인용 식탁>

얼마 전 토론토영화제에 들른 임상수 감독은 이곳 프로그래머로부터 다소 엉뚱한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영화아카데미가 뭐하는 곳이냐”는. 이 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감독들은 임 감독을 비롯해 장준환, 봉준호, 박경희, 김기덕 감독이었는데, 이중 김기덕 감독을 제외하곤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돈도 없고, 선생도 없고, 학교라 하기에는 좀 그런 곳이다”라고 답하며 웃고 말았지만, 새삼 “아카데미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임상수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영화아카데미는 최근 10여년간 한국 영화계의 근간이 되는 감독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지면낭비일지도 모른다. 대신 올해 개봉한 영화로만 예를 들자면, <청풍명월>의 김의석, <싱글즈>의 권칠인, <보리울의 여름>의 이민용,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의 이수연,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이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다. 여기에 <오! 브라더스>의 박현철, <영어완전정복>의 김형구, 의 조용규 등 촬영감독과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싱글즈>의 노종윤, <아카시아>의 유영식, <장화, 홍련>의 김영 등의 프로듀서가 이곳 졸업생이다.

누군가 “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는 영화아카데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영화아카데미는 최근 한국영화의 발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해에 만들어지는 문제작 중 절반 이상이 모두 한 교육기관 졸업생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이 ‘불가사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열정, 졸속행정의 허술함을 이기다

“어느 날 영화실습을 나가서 촬영준비를 마치고 슈팅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투다닥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조명을 함께 맡은 김의석과 황규덕이 싸우고 있더라고요. 알아보니까 조명의 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말다툼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열정이 대단했다는 얘기죠.”(이용배 교수·1기)

지금에야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지만, 출범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이렇게 성공하리라 예측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영화아카데미는 ‘졸속행정’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문을 연 84년은 한국 영화계가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영화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은 20개의 제작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고,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또한 외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으니 경쟁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들은 영화법 개정 등 한국영화 진흥책을 마련해달라며 목청을 높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는 83년 후반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영화아카데미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신입생 모집공고를 낸다. 철통 같은 군사독재 시절, 정부가 만든 일종의 ‘관제기관’에 누가 지원했으랴 싶지만, 사정은 정반대였다. 8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씨앗을 불태우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영화를 제작하던 청년들에게 이곳은 ‘이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보였다.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갈팡질팡하던 이들에게도 이 모집공고는 단비처럼 여겨졌다. 대학을 다니며 막연하게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졸업생들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각기 출발점은 다르지만, 이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탓에 첫해부터 경쟁률은 높았다.

그들이 아카데미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실습 위주의 현장교육’이라는 모토 때문이었다. 응시생들은 ‘내 힘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점에 있어선 그 이후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초기 세대들의 경우, 열망의 정도는 더했다. 당시엔 영화를 가르치는 사설기관도 없었고, 대학이나 기타 기관의 장비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기 때문. 충무로의 사정 또한 경쟁률을 부추긴 원인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도제시스템도 확고했다. 2기 권칠인 감독에 따르면 “스크립터로 3편을 해야 세컨드로, 세컨드를 3편 해야 퍼스트로, 퍼스트를 3편 해야 입봉”이라는 속설이 나돌았다. 1기 김의석 감독은 “당시엔 교수님들도 충무로에 나가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우수인력을 양성해 현장에 배출하겠다’는 아카데미의 계획은 자연 연출의 포부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학기 초에는 이론수업이라는 명분 아래 지루하면서도 보수적인 내용의 강의가 이어졌다. 당장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될 줄 알았건만, 교실에 갑갑하게 갇혀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1기들은 84년 5월의 어느 날, 집단적으로 무단결석을 감행한다. 이들은 교외로 나가 밤을 새워가며 술을 마시며 단결력을 보여줬다. 이 ‘사보타주’ 이후 학생들의 요구가 대폭 반영돼 강사진은 이장호, 이두용 감독 등 현장 인력으로 바뀌었고, 본격적인 실습도 시작됐다. 85년부터 98년까지 영화아카데미의 행정을 맡았던 김재균씨는 “너무 다급하게 준비하느라 1기가 다니던 84년엔 충무로 현장의 장비를 빌려서 교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 열심히 임해줬다”고 회고한다. 결국 정부의 어설픈 ‘졸속행정’의 허점을 메운 것은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이다.

외부의 충돌, 내부의 결속

“우리가 다니던 게 87년이었잖아요. 동기 이수정 프로듀서는 수업을 빼먹고 명동 거리에 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미국 <CBS> TV의 촬영차 거리에 나왔던 유영길 촬영감독과 마주쳤대요. 알고보니 유 감독님도 강의를 해야 하는데 빼먹었다고 하더라고요.”(김태균 감독·4기)

시간이 웬만큼 흘러도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최소한 90년대 중반까지는.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학생들은 공무원들이 관할하는 조직과 다양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초창기에는 영진공 사무실에 안기부 직원이 상주했고, 간부들은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사실상 검열했다. 내용에 ‘불온’한 요소가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옛날 서류를 봤는데, 간부들과 안기부 직원이 학생작품을 시사하며 벌인 회의기록이 있더라. 내가 만들었던 단편에 대해서도 ‘영화에 왜 이렇게 판잣집이 많이 나오냐’ 등의 ‘지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박기용 감독의 이야기처럼, 아카데미는 정부 산하기관의 한 부서였던 탓에 더욱 민감한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사회에 뿌리를 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학생과 학교간의 예고된 충돌은 6기들이 다녔던 89년 일어났다. 당시 6기생들은 임수경의 방북을 소재로 공동작품을 제작하려 했으나, 학교쪽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와 맞섰다. 이때 벌어진 골은 끝내 좁혀지지 않아 교육과정은 파행 운영됐다. 결국 이 사건은 6기생 중 3분의 2가 졸업장 대신 수료증을 받는 것으로 귀결됐다. 6기뿐 아니라 대다수의 기수가 학교쪽과 마찰을 빚었다. “이렇게 대립이 치열해질수록 동기들끼리의 결속력은 좋아졌다”고 박기용 감독은 설명한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유난스런 동기애는 학교와 세상과 맞서는 가운데 싹텄다는 이야기다.

“우리 기수는 영화전공자보다 비전공자가 훨씬 많았는데, 다양한 관심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서로에게 자극이 됐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테크닉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런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조근식 감독·13기)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특징이 있다면, 인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한국영화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는 다양한 전공자들을 한데 폭넓게 수용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허진호, 장준환, 김태용 감독 등은 아예 카메라를 구경해본 적도 없는 ‘생짜 초보’였다. “입학시험을 보는데, 감독 5명이 제시되고 이들에 관해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타르코프스키, 베리만, 고다르, 뭐 이런 감독들인데, 그땐 영화를 잘 모를 때라 그중 딱 한명만 알겠더라. 결국엔 답을 아예 안 썼다. 시간이 없어서 못 쓴 것처럼 보이려고.” 허진호 감독처럼 영화의 ‘왕초보’들은 어떻게 단 1년 만에 4년간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과 비슷한 수준에 오를 수 있었을까.

박기용 감독은 “초반에는 전공자 또는 단편작업 경험자와 비전공자 사이에 수준차가 존재하지만, 첫 작품을 하고나면서 서서히 실력은 비슷해지더라”라고 말한다. 촬영, 조명, 녹음 등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해야 하는 탓에 경험도 많이 쌓이고, 상호교류를 하는 동안 전공자의 경험이 전달되기 때문이라는 것.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수진이 제대로 짜여 있지 않았던 탓에, 학생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품앗이’를 해야 했다. 1년 또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연출작을 포함해 4편 이상의 영화를 정신없이 제작하다보니 각자의 경험은 빠르게 축적될 수 있었다. 특히 ‘극성맞은 기수’로 소문났던 13기의 경우, 자신의 연출작 또는 동료의 연출작에 참여한 게 1인당 평균 20편 이상일 정도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초보자도 영화를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이수연 감독의 말마따나 “다양한 경험과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면서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에 힘입은 것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연혁

1984년 | 3월 한국영화아카데미설립(제1기 감독분야 12명 선발)

1985년 | 2월 제1기 졸업생 10명 배출

1995년 | 10월 영화진흥공사 홍릉사옥으로 이전

1996년 | 3월 교육연한 1년 6개월, 3학기제로 학제 변경(13기)

1999년 | 3월 한국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설립(제1기 12명 선발)

2000년 | 3월 영화연출 및 촬영전공 교육연한 2년, 4학기제로 학제 변경(18기)

2001년 | 2월 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제1기 졸업생 10명 배출

2001년 | 8월 영화 및 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교육공간 통합 이전(남산 옛 서울예대 예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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