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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풍자극,게르기 쿠바니 감독의 <슬로건>
심은하 2003-11-26

Slogans, 2001년감독 게르기 쿠바니 출연 아터 고리슈티EBS 11월29일(토) 밤 10시

“세상에 간단한 일이란 없죠.” 영화 <그녀에게>의 마지막 대사였다. <슬로건>의 세계도 비슷한 것은 아닐까. 영화 속 아이들은 가엾다. 학교 교사들은 학업에 열중하는 것보다 학생에게 혹독한 요구를 한다. 국가에서 장려하는 정치적 구호에 골몰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공산주의여 영원하라”는 식의 구호를 자연스럽게 생활처럼 여기면서 산다. 교실에서의 폭력도 자주 발견된다. 어른들은 학생의 교육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 <슬로건>에 스며 있는 폭압적 공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가 제작된 알바니아 역사를 이해하면 좋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분쟁, 독재정권의 수립과 독재자 호자(그는 1980년대에 사망했고 영화는 이전 시기가 배경이다)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폐쇄정치에 이르기까지 알바니아의 역사는 굴곡이 심했다. 영화 <슬로건>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현대사의 순간을 기묘한 상징으로 압축해놓는다.

<슬로건>은 독재적 정권을 비꼬는 한편의 풍자극으로 앙드레라는 교사의 이야기다. 그는 어느 산골 초등학교 교사로 전임한다. 그의 첫 임무는 학급의 공식 슬로건을 고르는 것. 학교 교사들은 공산주의 선전을 주입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언덕에 흰 돌로 슬로건을 커다랗게 만들어놓는다. 앙드레 역시 슬로건을 정하는데 잘못하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상황의 터무니없음을 지켜보지만 불행히도 정부의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한다. 영화 <슬로건>에서 앙드레는 양심적 교사로 나온다. 여기엔 약간의 유머가 섞여 있다. 읽고 쓰지 못하는 마을의 한 양치기가 하나의 희생양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가 읽고 쓰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정치 슬로건에 저항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자 교사 앙드레는 상황에 분개한다. 억울하게도 반혁명의 낙인을 얻게 된다.

상황은 곧 긍정적인 방향으로 역전된다. 앙드레와 교사 다이아나의 사랑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영화는 정치풍자극에 더불어 멜로드라마까지 구색을 갖춘다. 인물 상황을 암시하는 것은 경사의 모티브를 통해 극적으로 시각화된다. 아이들이 정치 슬로건을 작업하는 언덕의 경사, 아찔한 높이의 위기감은 영화에서 긴장을 부추긴다. 위태로운 정치 상황에 관한 암시는 <슬로건>의 후반부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극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아쉽게도 게르기 쿠바니 감독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그는 직접 만든 단편영화가 베니스 등의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슬로건>은 그의 최근작이며 여러 분야에서 글을 쓰고 시나리오를 썼다. 연출 외에도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2001년 칸영화제 수상작인 <슬로건>을 통해 게르기 쿠바니 감독은 지나침이나 모자람 없이, 세심한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