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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만영화 국제 심포지엄 - 차이밍량이여, 울음을 그쳐라

1. 허우샤오시엔의 리듬을 느끼다

몇년 전 처음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 대만국립대학의 캠퍼스를 혼자 걷게 되었다. 밤이었다. 그러나 낮의 뜨거운 지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잠깐 바람이 불었고 하늘을 쳐다보자 엄청난 키의 종려나무들이 보였다. 옆으로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나는 그들보다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기시감, 데자뷰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건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리듬이었다. <호남호녀>가 아마도 가장 가까울 것이다. 나는 꿈결 같은 그러나 슬픈 그 리듬감을 몸에 새기고 한국에 돌아왔던 것 같다.

지난 몇년을 돌아보면 내가 은밀히 가장 많이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대만영화였다.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만이 아니다.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장초지 감독의 <흑암지광>을 보고는 지나치게 흥분해 남아 있는 다른 영화들을 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사실 비평이나 이론을 하게 되면 머리가 분석적으로 그리고 가학적으로 회전하게 된다. 황홀경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지고지순한 쾌락을 뒤로 하고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또 그래야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끔 ‘사무치게’ 좋아하는 차이밍량의 영화에 대해서는 <애정만세>에 대한 짧은 평을 제외하곤 긴 논문을 쓴 적이 없다. 하지만 아뿔싸!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 왔으니 바로 이번 학술회의가 그러했다. 대만영화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을 하는데 참석하겠냐는 대만 영화학자 로버트 첸의 연락을 받고 한편으로는 예의 황홀경을 지켜야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다른 쪽에선 대만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라는 강렬한 바람이 생겨났다. 이럴 때는 욕망이 이기는 법! 더구나 차이밍량이 참석할 것이고, 허우샤오시엔이 경영하는 서점 겸 시네마테크에서 만찬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두말않고 가겠노라고 답장을 했다.

2. 폐허의 미학: 조리개와 스크린으로서의 대만

11월28일부터 11월30일까지 대만국립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는 그야말로 당신이 대만영화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두세 가지 것들을 넘어 거의 전부를 알려주려는 기획의도를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만의 루페이, 린웬치, 펭핀치아 등의 영화학자 등과 더들리 앤드루, 지나 마르체티, 크리스 베리, 데이비드 보드웰 같은 외국 학자들이 참석해 대만의 뉴웨이브와 그 이전의 역사, 하위 장르, 대만 영화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장초지와 대만의 흥행작 <더블비전> 그리고 리안의 <헐크>에 이르는 영화들을 분석하고 토론했다.

첫날 기조 연설은 더들리 앤드루 교수로부터 시작했다. 한국에도 번역된 <영화이론의 주요 개념들>(1984)의 저자인 그는 1981년 폴 앤드루와 공저한 <미조구치 겐지>라는 개론서로 일찌감치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이번 발표문은 ‘조리개로서의 대만, 스크린으로서의 대만’이라는 제목이다. 그는 홍콩의 “실종의 미학”에 대비, 대만을 ‘폐허의 미학’이라 부르면서 허우샤오시엔의 역사를 향한 조리개가 불안을 반영하는 스크린으로 나간다면 에드워드 양의 와이드스크린은 그 표면을 관통해 인터내셔널 근대성을 일별하게 한다고 진단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의 터널장면을 대만과 그 영화에 대한 진입로로 그리고 조리개로 볼 수 있지만, 막상 그 기차는 이미지를 기다리는 스크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조리개가 스크린이 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은 하나의 매개체로서 스크린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착시적 현실,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시 경청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플라톤의 동굴과는 정반대되는 영화를 생성시킨다.

더들리 앤드루의 기조 연설에 이어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 대한 분석들이 이어졌다. 대만 차오퉁대학 림 키엔 켓 교수는 ‘누아르로서의 국가’라는 발표문에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살인사건>(A Brighter Summer Day)을 누아르 장르로 읽으면서, 이 잃어버린 시간의 누아르가 냉전시대, 대만 우파의 독재정권 시기에 설정되어 있음을 환기시킨다. 소년 범죄자들이 자신의 조직원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필름누아르와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마지막엔 국가가 개입해 살인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대만 누아르는 단순히 외로운 거리들, 쓸쓸한 탐정, 팜므파탈의 장르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장르가 된다.

3. 첫째 날 저녁: 차이밍량의 울음

차이밍량의 영화를 다룬 패널(내가 발표한, ‘영화의 (아시아) 집: 시간, 외상 그리고 초/국가’ 그리고 왕잉오의 ‘욕망의 (탈) 지도화’, 그리고 수젠이의 ‘세계화의 도시에서의 유령주체’로 구성)에는 차이밍량이 직접 참석해 발표를 경청하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하류>를 만든 뒤 대만 내의 비판을 견디다 못해 고향인 말레이시아로 가 있던 당시 잡지 <키노> 지면을 위해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어려운 때도 차이밍량은 예의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얼굴과 맨발로 자신의 다음 프로젝트를 이야기했었다. 어떤 이는 차이밍량을 만나면 그 작은 키의 사람으로부터, 태산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생생한 활기로 빛나는 다정다감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는 학술회의장 밖에 이강생의 새 영화 <불견>(The Missing)과 새로 만든 <부산>의 입장권을 준비해놓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어서 대만영화 관객에 대한 그의 불평은 10여분 정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생회관에서 차이밍량과의 대화의 시간이 있었는데 빨간색 옷을 입은 이강생이 동반했다. 차이밍량은 <안녕! 용문객잔>이 비평적으로는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배급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거기에다 이강생의 <불견>, 또 자신의 신작 <부산> 등의 제작으로 두 사람 모두 집을 은행에 담보설정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대만 관객이 완전히 할리우드에 침식되어 자신의 영화를 외면하고 있다면서 중국이나 한국에 가서 영화를 찍을까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정치도 비판했는데 어떻게 공리와 같은 배우가 심사위원을 맡을 수 있는가를 개탄하면서,

공리가 말하길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 수상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앞으로도 불쌍한 공리는 차이밍량 영화에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 <하류>의 강에 떠오르는 시체 역할이면 모를까).

그래서 국제영화제를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 매우 피곤하며, 생활이 곤란하다고, 급기야는 눈물을 흘렸다. 이강생도 짧게 몇 마디를 했는데 자신의 첫 번째 영화 <불견>이 부산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그것이 상당한 위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불견>과 <안녕! 용문객잔>의 장면들을 보았다. 차이밍량은 이제 극장표를 팔 시간이라면서 만원 정도의 가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는 정말 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보지 못하더라도 표를 사달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표를 샀지만 차이밍량이 느끼는 위기감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는 현재 중요한 잡지나 신문에 세계에서 중요한 20명 혹은 40명의 감독 중 한 사람에 꼽히고 있고, 그에게 헌정된 웹사이트들도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저토록 긴급한 호소를 하고 있고, 개별적으로 극장표까지 팔고 있으니 그 안과 밖의 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또 그런 차이밍량의 모습이 대만의 평론가들이나 다른 독립 영화작가들에게 그리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평론가가 차이밍량에게 이제 제발 그만 하라고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럴 것이 아니라 제작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힐난하자, 다른 감독들보다 차이밍량의 상황은 훨씬 좋다고 설명했다.

4. 둘째 날: 여성 복수극과 갱스터영화

이튿날 세명의 여성학자로 이루어진 패널에서는 대만 뉴웨이브가 등장하기 이전의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영화를 다루었는데, 펭 핀치아는 1970년대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타란티노가 이 장르의 여성영웅 팜 그리어를 기용 <재키 브라운>을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 존스> 등과 대만의 여성복수극 영화 사이의 비교연구를 시도하려 했으나 바로 그 복수극 영화들이 대만 필름아카이브에 한편도 보관돼 있지 않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양 유안 링은 ‘대만의 지하세계를 다룬 영화에 대한 분석: <상해의 사회 파일에 관해> <분노> <사랑하면 죽여라>’라는 발표문에서 한때 ‘범죄영화’로 불렸던 영화들이 대만 영화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 이 영화들이 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 대만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세계 지정학의 변화와 관계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즉 1975년에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장제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고 오일 파동이 있었으며 독재에 대항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사회적 불안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여성복수극 영화에 이어 만들어진 범죄영화는 당시의 이러한 공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같은 패널의 랴오 잉 치의 논문 ‘계엄령 이후 시대의 정체성과 새로운 대만 갱스터영화’는 위의 관심에 이어 허우샤오시엔과 장조치의 영화들이 그 이전 대만의 갱스터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즉 1983년 대만의 뉴웨이브가 등장하기 이전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가 대만 영화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면서 117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섹스와 폭력, 갱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남국재견>에도 갱들이 등장한다. 장초지의 <흑암지광>도 대만 원주민들과 본토인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위의 발표문들은 이제까지 대만의 뉴웨이브를 작가적, 예술영화의 관점에서 균질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그 이전의 대중문화와 하위 장르 영화들과 만나게 하는 생산적인 연구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5. 셋째 날: 허우샤오시엔의 서점에 놀러가다!

마지막 날, 데이비드 보드웰의 허우샤오시엔의 텔레포토 미학에 대한 기조 강연에 이어 장초지의 영화를 대만의 뉴웨이브와 다른 ‘또 하나의 영화’로 설정하는 루 페이의 시도, ‘장초지 영화의 홀린 시간’이라는 크리스 베리의 발표가 이어졌다. 지나 마르체티는 리안의 <헐크>가 미국 내 이라크 사막에서 벌어지는 공포를 건드리고 있다고 보고, 비평적, 흥행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옹호되어야 할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어 로버트 첸의 <더블비전>의 스페셜 이펙트 효과와 영화의 디지털화에 대한 주목, 그리고 해적복제를 대만영화의 새로운 대안적 배급 경로로 보자는 카피레프트, 왕슈젠의 용감무쌍한 발표를 끝으로 3일간의 학술회의는 끝이 났다.

전반적으로 대만의 영화연구자들은 한해에 장편영화가 7편밖에 제작되지 않는 상황에 깊은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의 영화정책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독일 뉴저만 시네마의 운명처럼 대만의 뉴웨이브가 한줌의 학자들과 미래를 위한 영감을 남겨놓고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장초지처럼 국제영화제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작가들과 <더블비전>과 같은 흥행작으로 명맥을 잇다가 새로운 도약을 할 것인가는 여전히 미지수다.

드디어, 학술회의가 끝난 저녁 허우샤오시엔이 기획했다는 성품문고로 향했다. 옛 미국대사관 자리에 들어선 이 새로운 타이베이의 명물은 그야말로 영화광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오주의 <만추>가 상영되는 와중에 홍콩, 대만, 일본의 DVD들을 마음껏 고를 수 있었고 영화책들도 상당했다. 우리는 서로 부딪치면서 열심히 희귀 DVD를 찾아냈다. 이층에는 카페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대만국립영화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를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작품으로 판단하건대 대만 학자들의 우려는 기우로 보였다. 다만 할리우드에 경도된 관객을 대만의 포스트 뉴웨이브의 영화로 어떻게 다시 유혹해낼 것인가, 는 여전히 문제로 보인다. 여하간 차이밍량 감독이 울음을 그치고 이런 새로운 젊은 감독들과 더불어 대만영화에 또 한번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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