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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내 사랑
2001-05-31

KBS2TV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월·화 오후 9시50분∼10시50분

미리 밝히건대 필자의 고향은 사북이다. 단지 태어나기만 한 곳이거나 호적등본상에나 명시돼 있는 그런 형식상의 고향이 아니라, 지금도 사북역에서

내려 버스로 5분을 더 달리면 부모님과 여동생이 사는 식당집이 나온다. 폐광 이후, 나는 사람은 늘고 드는 사람은 줄어 을씨년스럽던 땅에 요즘은

카지노 개장으로 공사인부든 관광객이든 사람냄새가 다시 풍기기 시작했단다.

처음 사북을 무대로 한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가 방송을 타기 시작한 95년 5월은 강릉에서의 고된 유학생활이 서서히 끝나가던 고3

때였다. 주말마다 독서실 친구들과 함께 총무실에서 즐기던 TV 시청은, 아는 곳 비슷한 데만 나와도 엉덩이를 들썩이며 목울대를 세우게 만들었고,

그곳이 실제 아는 곳이든 아니든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한번은 스치고 지나갔을 곳이라 생각하며 까닭없이 뿌듯해하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선 고향을

묻는 이들 앞에서 전용 홍보물인 양 <젊은이의 양지>를 끼워 팔았다. 사북이라는 새카맣고 조그마한 달동네를 단박에 사람들의 뇌리에

박아넣은 방송의 힘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가 없으니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더이상 <젊은이의 양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고, 따라서 사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다시 나왔다고 했을 때 그만 이성을 잃고 성급한 리모컨질을 해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은 아름다워>에 주목한 솔직한 이유이다.

현재까지 방영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사북에서 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호텔업에 투신, 호텔왕으로 불리는 유상철(김무생)은

자신의 후계자로 둘째딸 희정(하지원)을 낙점, 사북의 카지노호텔 홍보실에 일하게 한다. 희정은 자신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첫사랑을 잊지 못한

채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사북 건달 재민(김래원)에게 연정을 품는다. 유 회장의 카지노 특수를 노린 레저타운 건설계획이 구체화되면서 그의

손발 노릇을 하는 오춘구(정보석)과 고향을 지키려는 재민 사이의 갈등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고. 한편 유 회장의 큰딸 수정(윤해영)은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사북으로 내려와 옛 친구인 정우(유준상)와 함께 남은 나날을 보내려 한다.

16부작으로 예정돼 있는 전체 줄거리에서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갈등구조는 이미 모두 제시된 셈이다. 정리하자면 크게 세 갈래의 갈등구조가 이야기

전개의 주된 맥을 이루고 있는데, 카지노를 둘러싼 폐광촌 원주민과 외부인간의 이권다툼, 특히 재민과 춘구의 대립이 밑바탕에 깔린 가운데 희정-재민-미숙(양미라)의

풋풋한 삼각관계와 춘구-수정-정우의 아련한 애정 삼각도가 펼쳐진다. 아직까지는 대체로 세개의 축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지만, 앞으로 칙칙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밝고 풋풋한 쪽으로 나갈 생각이라고.

사실 요즘만큼 드라마가 야박한 대접을 받는 때도 드물다. 수상한 시대물 열기가 안방을 시도 때도 없이 뒤덮는 가운데, 현대를

다룬 드라마들의 고전이 눈물겨울 지경. 이미 뉴스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이상(異常) 사극붐으로, 일주일 가운데 금요일 하루를 빼놓고는 매일

‘상감마마 납시오’를 들어야 할 판이다. 그래도 이건 봐줄 만하다. 시대가 뒤숭숭할수록 과거의 영속에 기대려는 ‘우매한 민중’을 탓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요즘 사극에 볼거리가 풍성함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 사이에 낀 현대물 드라마다. “전장에 전사를 풀어놓는 심정으로”

매회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한 PD의 말마따나, 덩치 큰 사극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틈바구니라도 있으면 후벼파고 싶은 것이 오늘의 드라마 제작국

실정이리라. MBC와의 사극 다툼에서 일찌감치 SBS가 승리하며 월·화요일 프라임 타임대를 선점한 가운데, <비단향꽃무>를 끝내고

곧바로 후발주자로 합류한 KBS <인생은 아름다워> 제작팀의 고민이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임은 자명한 노릇이다. 살아 있어야 부귀영화를

누리든 피흘리는 복마전을 겪든 할 것 아니겠는가. 50%를 훌쩍 넘어선 <여인천하>의 시청률을 넘보기엔, 불과 4회 방영으로 10%의

시청률을 간신히 넘긴 <인생은…>은 위태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나마 젊은 연예인의 수혈로 초반 분위기를 띄우려는 노력을 해보지만,

예쁘기만 한 얼굴로는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가기 힘든 법. <인생은…>이 묘사하는 폐광촌의 모습과 등장인물을 가만히 들여다본

뒤 적은 여러 가지 단상들이다.

드라마 속의 캐릭터 - 얼마나 현실적인가

극중 재민의 역은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 그의 극중 역할이 멋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실제 사북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건달 오빠들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꼭 그랬었다. 중학교 시절 여린 사춘기적 감성을 달래지 못해 툭하면 짝사랑에 빠지던 그때, 패거리들와 함께 하릴없이

장바닥을 쓸고 다니던 ‘오빠’들도 짝사랑의 심심찮은 상대가 되곤 했다. 김래원만큼이나 잘생긴 외모와 한 싸움하던 주먹을 가진 오빠들은 올 풀린

스타킹을 신고 주전부리에 열중하던 여중생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밤이건 낮이건 끊임없이 몰려다니다가 역 앞 광장 등에 모여 날랜 폼의 태권도

시범을 보이다가도 싫증이 나면 말뚝박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간혹 패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각목에 깨진 맥주병이 등장했고,

몇명은 감방을 다녀왔다. 물론 그들이 고향을 지키려는 애향심으로 똘똘 뭉친 의리의 사나이들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사북을 이루는

풍경 중 분명한 하나였다. 그 반면 그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희정과 언니 수정은 만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인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으니, 그들의

사랑이란 어째 백일몽을 닮았다. 희정을 보자. 보디가드의 눈을 피해 수시로 사고를 일으키지만 정작 그녀에게 떨어지는 벌이란 폐광촌에 세워진

거대한 카지노호텔 홍보팀으로 유배되는 일이거나 우스개 같은 납치극에서 멋지게 구원받는 일 정도다. 야망 따위는 있어보이지 않는 딸에게 강단있는

호텔 후계자를 기대하는 아버지나 도저히 이 세상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서 자신의 죽음을 차분히 맞이하는 수정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

카지노 건설이 한창인 폐광촌의 풍경 - 조직폭력배가 난무하는 무법천지?

다분히 극적이기까지 한 조직간의 이권다툼은 그러나 아직까진 공공연한 모습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고한지역에 스몰카지노가

개장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풍경은 셀 수 없이 늘어난 전당포. 하룻밤 새 준비해온 돈을 모조리 잃고 차까지 맡긴 채 차비를 빌려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더이상 낯선 풍경은 아니다. 심지어 ‘처자식이나 노모도 맡겨요’라는 스산한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정도. 전당포가 생겼으니 당연히

빌린 돈을 받아내는 ‘해결사’가 필요한 법, 전당포마다 해결사 노릇을 하는 어깨들이 한둘씩 딸려 있다. 또한 조직에서 직접 전당포를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나 확인된 바는 없으며, 전당포에서 빌려주는 돈의 대부분이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 돈이라는 소문도. 하지만 전당포 사업은 피라미나

손을 댈 뿐, 거물급들이라면 유흥업소 관리에 눈길을 줄 만하다. 아직까지 사북과 고한은 광산촌 당시의 소박한 소비구조가 남아 있는 터라 여느

다른 마을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특별히 유흥업소가 많지도 않다. 영월-제천-태백 간 도로확장공사로 기존 가구의 60%가 보상비를 받고

철거되긴 했으나, 대단위 레저타운이나 유흥단지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철거된 곳은 없다. 내년 11월에 메인 카지노가 개장하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유흥업소 일색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며 조직간의 진출도 활발해질 것이다.

강원도의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야외신 - 그 허와 실

극중에 등장하는 사북분교는 20명 남짓한 전교생을 거느린 아담한 건물이며, 그 주변 역시 맑고 깨끗한 물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곳은 사북이 아닌 같은 정선군 내의 가수리이다. 사북은 행정구역상 정선에 속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태백권이며 따라서 같은

군내라도 환경은 천지차이다. 아우라지와 아리랑이 유명한 정선은 일찍이 관광명소로 주목받았으며 특별한 산업이 발달한 바 없기에 환경 역시 태곳적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차로 40분가량 달려 사북에 가까워질수록 물빛은 탁해지고 집과 돌멩이들은 거무튀튀한 색을 띤다.

석탄산업이 한창이던 80년대는 말 그대로 하늘이고 땅이고 그 위를 흐르던 개울이고 온통 진한 검은 빛이었으나 폐광 이후 차차 맑아지는 추세에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더라도 완전히 맑아지지 않을 이 땅의 색깔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화려했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다. 카지노호텔은 실제 호텔의 협조를 얻지 못해 용평리조트호텔에서 입구를 찍고, 카지노 내부는 태백의 한 대학에 위치한 카지노학과의

실습실을 빌려 촬영했다. 재민이 일하는 카센터는 실제 고한에 있으며, 희정이 머무는 역장집과 박기수의 집, 만수의 이발관은 정선 읍내에 있다.

또 희정과 재민의 방은 수원에 있는 세트장을 이용했다.

치밀함이 부족한 인물설정

<인생은…>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출생의 비밀 등으로 어설픈 장난을 치는 대신 멜로드라마치곤 조금은 복잡하다고 느낄 만큼

다양한 인물군상을 그리려 한 점. 하지만 폐광촌에서 막장 인생을 사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물을 짜는 손맛은 의도만큼 꼼꼼하지

못해서 실망하게 된다. 춘구는 유 회장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이를 갈지만, 막상 그의 손발이 되어 레저타운 건설을 서두른다.

물론 복수를 위해 일부러 그의 수하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 9회분까지 완성된 대본 어느 구석에도 그가 유 회장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수정을 연모해오다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자 본격적인 사랑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춘구의 설정은,실제 드라마상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략되면서 춘구의 수정에 대한 감정을 뜬금없게 만든다. 희정의 첫사랑을 그대로 빼어박은 재민의 등장은 구둘래 기자의 우연지수를

빌리자면 단연 으뜸. 수정이 불치병에 걸린다는 설정은 그동안 등의 공상과학 드라마의 각본을 써온 작가의

멜로적 상상력이란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현|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