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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영화제 서킷, 그 진실의 문 [2]

오해6. 토론토와 선댄스는 북미 시장으로 진입하는 통로이다.

그렇다고 해봤자다. 북미 시장에서 외국어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미미하고, 그마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비율에서나 관객 접근성에서나 유럽이 더 비옥한 시장이다. 선댄스는 본래부터 미국영화를 위한 자아도취성 미국 행사라 국제부문은 홍보도 잘 안 될 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토론토는 기본적으로 “영화제의 영화제”라 유럽영화제(베니스, 로카르노)에서의 소개와 연동해서 북미 진출의 기반으로 유용할 수는 있지만, 단독으로 외국어영화의 세계 프리미어를 하기에는 마땅치 않다. 토론토는 워낙 규모가 커서(정선된 작품이 250편이 넘는다) 북미 언론은 주로 새로 나온 미국영화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토론토영화제가 2002년 한국영화 특별전식으로 매년 개최하는 국가별 소개부문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오해7. 경쟁부문에 오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영화에 따라 다르다. 언론의 관심은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가장 많이 쏠린다. 이는 상이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다수 언론에서는 그 영화제의 다른 부분들까지 다루기에는 시간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부문에 포함된 영화들은 (미국영화가 아닌 한) 지나치게 상업적이어도 안 되며, (진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는 한) 지나치게 전문화되어서도 안 된다. 기자들은 200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가 시작한 지 20분 만에 속속 자리를 떠버렸다. 너무 주류영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이드바인 파노라마 부문에 출품되었다면 더 좋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오해8. 감독의 결정이 최선이다.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영화의 영화제 ‘포지셔닝’은 (소속사가 있을 경우) 세일즈사 또는 제작사, 또는 (소속사가 없을 경우) 국가별 진흥기구 등 그 일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할 것이다. 이들은 각종 영화제와 견본시를 돌아다니며- 경력이 쌓일 정도로 계속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필요한 인적 네트워크와 현장 지식을 갖추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러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서양에서 영향력 있는 판매인과 국가진흥위원들은 수십년간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2002년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생활의 발견>을 출품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칸에서 두 작품 <강원도의 힘>과 <오! 수정>을 출품한 경력으로는 경쟁부문으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했다는데), 특히나 뒤이어 베니스에서도 거절한 뒤 이 영화가 잊혀지고 마는 데 본질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비범하지만 매우 전문화된 이 영화에는 칸의 제의가 더 적절했던 것이었다.

오해9. 한국영화는 ‘뜨고’ 있기 때문에 영화제 서킷은 봉이다.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한국영화가 분명 ‘뜨고’는 있지만 동아시아 지역을 벗어나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전문가집단 안에서만 그렇다. 한국영화의 입지를 과대평가하는 일은 때때로 세일즈사나 제작자나 감독이 대규모 영화제끼리 경쟁을 붙이려는 시도로 이어져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복수는 나의 것>이 베를린영화제의 초청을 거절하고 나중에 칸에 출품을 시도했을 때 (칸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어서 베니스도 거절했다) 이 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은 한해 뒤로 밀려나버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영화제 작품 선정위원들은 자기를 얕잡아보거나 흥정대상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반면에 서로를 상대로 승부를 거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다).

오해10. 국내 흥행 성공=영화제 초청

거의 들어맞는 경우가 없다. 아시아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틈새 영화제에서는 국내 흥행작을 초청하겠지만, 서구의 주요 영화제 그리고 불행히도, 점점 껍질만 갖춰진 ‘바나나’형 동아시아영화제에서는 무관심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저조한 국내 흥행(또는 국내 검열문제면 더 낫다)은 서양에서는 거의 명예의 상징이다. 한국에서 완패한 <고양이를 부탁해>는 유럽영화의 사회적 리얼리즘에 가장 근접했기에 각종 유럽영화제에서 인기가 많았다. 서양영화제들은 아시아영화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뒷받침해주는 영화를 선호한다.

국내시장과 지역시장에 집중하라

이 모든 것 뒤의 냉혹한 현실은, 한국 내 언론이 어떤 영화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상을 탔다고 하거나 해외 언론에서 특정지역 전문인 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지는 비평을 받는 등의 일들이 한국영화의 국제적인 위상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배급사 판매실적은 낮고, 관객규모도 작다. 미국에서의 배급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미국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렸다는 영화들도 아직 작품 개발단계의 지옥에 머물고 있다. 리메이크작이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영화의 위상이 그 덕을 보게 되지는 않을 수 있다.

대다수의 일반 평론가와 관객은 임권택 감독 외에(어쩌면 임권택 감독조차도) 한국 감독의 이름을 대라면 난감해할 것이고 장이모, 첸카이거, 왕가위, 양덕창(에드워드 양)이나 허우샤오시엔 같은 중국 감독들 수준의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한국 영화인은 없다. 일본영화는 50년대 초반부터, 홍콩은 1979년 이후, 중국과 대만은 80년대 중반 이후 줄곧 영화제 서킷상에 있어왔다. 서구인들에게 이 나라들은 각각 특정한 장르나 영화제작 스타일에 있어서 알아보고 기억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는데다가 그를 대표하는 한두명의 핵심 작가들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잘 만든 주류영화에서 작가주의적 성향의 작품들에 이르면서 또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한국영화의 엄청난 다양성은 사실 한국영화의 가장 큰 장애이기도 하며, 한국영화의 가장 잘 알려진 이름(임권택)은 한국영화의 현주소에 대한 대표성이 전혀 없다.

본인의 생각에 한국영화의 현주소는 처음으로 활짝 분출하기 시작한 주목할 만한 변혁에 있다. 이러한 변신의 폭은 나 같은 외국 영화광들 사이에서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홍콩, 대만 그리고 중국이 해를 거듭할수록 신인감독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수의 흥미로운 작품들을 내놓았을 때 느꼈던 것 같은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적잖은 이름들은 이미 상당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지만(박찬욱, 이재용, 홍상수, 임상수, 김기덕, 강우석, 김지운, 곽경택, 허진호, 김상진, 이창동 등), 일반적인 세계인들의 뇌리에 박혀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 누구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이다. 아직은 초기이다. 3년 반 전만 해도, 칸 견본시에서 김기덕 감독의 <섬> 상영회에 갔는데 객석에 대여섯명만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장군도(Zhang Junzhao), 오천명(Wu Zininu), 장택명(Zhang Zeming), 증장신(Tseng Chuang-hsiang)이나 만인(Wan Jen)같이 한때 80년대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중국 감독들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이 모든 것에서 얻을 메시지는? 영화인이라면, 국내시장과 지역시장에 집중하고 영화제 서킷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덤으로만 여길 것(대만의 경우를 경계할 것!). 그리고 세일즈사라면, 꼭 가장 ‘저명한’ 초청이 아니더라도 영화에 가장 알맞은 초청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입소문과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된 한국 영화업계에 맡길 것. 그리고 한국 관객이라면, 한국영화가 경제적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어 영화제 프로그래머나 외국 바이어들의 변하기 쉬운 입맛과 자국 사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것.

서양영화는 단 한번도 그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동양으로 눈을 돌린 적이 없으며, 한국영화 역시 서구를 향해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는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풍요롭고, 창의적이고, 흥미진진하다.

*런던에 살고 있는 데릭 앨리(Derek Elley)는 <버라이어티>의 수석 국제평론가이며 지난 30년간 동아시아를 방문하며 이 지역 영화에 대해 쓰고 있다. <씨네21>에는 개인 자격으로 기고하고 있다.

번역 기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