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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극장가]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VS 팀버튼의 <빅 피쉬>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안긴<사마리아> 원조교제 딸·원죄의식 아버지, 김기덕 표에도 ‘화해’가 나오네

성매매에 나선 미성년 아이들, 그 아이들을 ‘소비’하는 성인 남성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딸로 둔 아버지들. 김기덕 감독의 10번째 영화 〈사마리아〉는 이른바 원조교제를 하는 10대 여자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자라는 점에서 ‘원조자’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작들에서 그래왔듯 김기덕은 이 민감한 소재에 법이나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의 죄의식의 세계 안으로 남성 등장인물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라진 점. 〈사마리아〉는 파국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그의 영화에서는 매우 낯선 단어였던 ‘화해’가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3개의 장으로 나뉜 영화의 첫장 ‘바수밀다’에서는 성매매에 나선 여고생 재영(서민정)과 재영의 단짝 여진(곽지민)이 등장한다. 매춘을 통해 남자들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안내했다는 인도의 여인 ‘바수밀다’를 이야기하는 재영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고여있다. 여진은 재영이 몸을 파는 동안 주변을 지키지만 이런 재영을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장 ‘사마리아’에서 여진은 경찰의 단속을 피하려다 추락사한 재영을 대신해 성매매에 나선다. 정확히 말해 그의 일은 매매가 아니라 환불이다. 그는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찾아가 육체와 함께 받았던 돈을 돌려준다. 셋째 장 ‘소나타’는 김기덕의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시점이 전면에 등장한다. 딸이 남자와 여관에 있는 모습을 본 아버지(이얼)는 상대 남자들을 향한 복수에 나선다. 그러나 이들과 다르지 않은 욕망에 길들여진 성인 남성인 그에게 복수는 응징이 아니라 절망의 되풀이다. 오염된 세계 속에서 아버지와 딸이 대화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꿈인 것이다.

〈사마리아〉는 여고생 성매매라는 소재, 섹스를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이야기 등 여전히 논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김 감독의 전작들을 보는 것만큼 불편하지는 않다. 마지막 장에서 딸과 여행을 떠나며 딸에 대한 원망을 접고 딸의 삶이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이 차분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딸을 죽이는 장면이 아버지의 꿈으로 처리된 것은 달라진 김기덕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리고 감독 말마따나 이렇게 순치된 결말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이라는 ‘공증’을 이끌어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제외한다면 〈사마리아〉는 편해진 대신 전작들이 뿜어냈던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기 힘든 영화다. 여기서 아버지는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경계선에 서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분노에 차있고 죄의식에 고통받는다는 점에서 그는 전작들에 등장하는 남성들과 동일선상에 놓여있지만 딸 가진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대변하는 그는 전작들의 남성처럼 영화의 중심으로 수직활강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자수를 하고 떠나며 딸에게 “자, 이제부턴 여기 혼자 가는 거야. 아빤 안 따라가”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대사가 가슴 한 귀퉁이를 울리면서도 어쩐지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아닌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팀 버튼의 <빅 피쉬> 화려한 거짓으로 버틴 ‘아빠의 인생’

에드워드 블룸(젊은 시절 연기는 이완 맥그리거, 늙어선 앨버트 피니)은 세일즈맨으로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았으면서도 젊을 때부터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댄다. 남에게 해를 주거나, 부정한 이익을 챙기려는 건 결코 아니다. 거짓 이야기를 입혀서 자기 삶을 모험과 낭만과 우수로 가득 찬 동화로 꾸민다. 그 상상력이 풍성하면서도 맑다. 그 속엔 스스로 영웅이 되는 나르시스트적 몽상이 전혀 없진 않지만, 자신을 입지전적 인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권선징악이나 고진감래 따위의 교훈과도 거리가 멀다. 블룸의 회고를 좇아 화면으로 재현되는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에드워드는 어릴 때 친구들과 유리눈의 마녀를 찾아간다. 마녀의 유리눈을 통해 자기가 죽는 순간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따라 유리눈을 본다. 거기서 믿음 하나를 얻는다. 유리 눈에 보인 노인이 될 때까지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낯선 곳으로 간다. 마침 마을에 보통사람 키의 네배쯤 되는 거인이 나타나서 음식을 축내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거인에게 말한다. “네가 살기에 이 마을이 좁다고 생각하지 않니” 에드워드는 거인과 함께 좁은 마을을 뒤로 하고 여행에 나선다. 시공간이 외부와 차단된 듯한 숲속 마을에서 예쁘고 순박한 처녀들과, 시는 쓰지 않고 구상만 하며 빈둥대는 시인을 만난다. 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떠나는 에드워드의 여행길에 늑대 인간, 하체는 하나이고 상체만 분리된 샴쌍둥이 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사라진다.

거인 늑대인간 샴쌍둥이…팀 버튼 답지않은 예쁜 판타지

기인은 있지만 악인은 없고, 시간과 길의 흐름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이 여행의 전반부는 다분히 매력적이다. 이전의 팀 버튼 영화들이 펼쳤던 구조가 탄탄한 판타지와 달리, 이리저리 흘러가는 <빅 피쉬>의 판타지는 정처가 없다. 이따금 팀 버튼답지 않은 에피소드가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에드워드가 사랑하는 여자를 생각하며 긴 노동의 시간과 전쟁터(6·25)를 버티는 대목에선 <포레스트 검프> 같다.) 그때 영화는 사실로 빠져 나온다. 에드워드와 그의 아들 윌(빌리 크러덥)의 갈등과 화해가 후반부를 이끌어간다. 윌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거짓말’을 실컷 듣고 자랐다. 처음엔 감동했지만 철들면서 거짓말만 하는 아버지가 싫어졌다. 직업까지 사실을 중시하는 기자를 택한 윌은 아버지와 의절하다시피 하고 살다가, 임종이 임박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곁으로 왔다.

에드워드가 왜 그토록 거짓말을 해왔고, 윌은 어떤 계기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는지 영화의 설명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버지의 거짓말은 삭막할 만큼 단조로운 삶을 버티는 힘이었을 터. 좀 더 나아가 판타지의 본질과, 판타지를 만들어 파는 이야기꾼 팀 버튼의 자의식을 읽을 수도 있다. <빅 피쉬>는 예쁜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판타지에 대해 성찰하지만 그 결과는 뜻밖에도(팀 버튼 같지 않게) 평이해 보인다. 5일 개봉.

휴먼 스테인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보듬다

존경받는 고고학 교수인 콜먼 실크(안소니 홉킨스)는 결석한 학생에게 내뱉은 한마디 말로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린다.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로 그는 학교에서 중징계를 받고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아내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암흑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잡역부인 퍼니아(니콜 키드먼)가 나타나고 콜먼은 퍼니아가 지닌 신비하면서도 어두운 매력에 깊이 빠져든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필립 로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휴먼 스테인>은 지쳐보이는 두 남녀가 탄 차가 뒤집어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어떤 사연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됐는가.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의 어두운 비밀과 상처를 조금씩 벗겨낸다.

영화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남녀의 격정적인 로맨스를 그리는 듯하지만 속내의 관심사는 인종과 계급의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에게 ‘오점’으로 작용하는가다. 콜먼에게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해온 어두운 비밀이, 퍼니아에게는 계부의 성학대, 남편의 폭력, 자식의 죽음 등 영혼을 갈갈이 찢은 상처가 있다. 둘은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서로에게 가까스로 열지만 교수와 잡역부라는 신분 차이는 주변의 냉소를 낳는다.

격렬한 섹스신에서조차 기품이 넘쳐날 정도로 우아한 남녀 주인공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특히 니콜 키드먼의 불안해 보이면서도 유혹적인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에서는 그가 가진 영혼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5일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