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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1]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칸의 붉은 카펫을 밟는다. 오는 5월12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제57회 칸영화제가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과 <취화선>에 이어 홍 감독의 신작을 한국영화로는 세 번째로 경쟁부문에 초청했다. <씨네21>은 아직 공식 시사회를 갖지 않은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는 ‘반칙성 행운’을 안게 됐다(이성욱 기자가 영화진흥위의 2004년 제1차 자막 번역 및 프린트 제작지원을 위한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이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인터뷰어로 나서준 영화평론가 허문영씨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로서 이 작품을 누구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최근 프랑스 주요 매체들과의 연쇄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온 직후, <씨네21>과의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편집자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사람들은 예외없이 여행자이거나 여행자가 되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전까지 그 여행의 목적이나 의도는 살짝 감춰져 있거나 충동적인 것이어서 사건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하기 곤란하게 만들었다. <여자는…>에서 선배 헌준(김태우)과 후배 문호(유지태)의 여행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다. 대학 시절, 번갈아 사귀었던 선화(성현아)가 일하는 부천의 술집으로 가서 그녀를 만나보겠다는 것. 이로 인해 <여자는…>은 홍상수의 그 어떤 작품보다 예측가능한, 단선적인 구조의 외관으로 다가온다. 7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만큼의 어떤 회상 작용이 일어나고, 과거의 여자를 동시에 만나러가는 두 남자 사이에서 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지며, 세 사람이 조우한 현장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어떤 사건이 준비돼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흐름이 감지된다는 것이 영화의 전모를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약속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디테일과 캐릭터들의 복잡다단한 표면은 보는 이의 뇌리에 순간순간 새겨지는 잔상을 흔쾌히 정리해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래 기억될 아파트신의 미장센

버디무디의 꼴을 만들어준 여행의 목적은 달성됐을까? 두 남자의 진짜 목적인 새로운 출발에의 희망이나 은밀한 욕정은 좌절되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누구도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눈여겨볼 대목은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선화의 좁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동선이다. 거실, 베란다, 두개의 방 사이에서 선화, 헌준, 문호 세 인물이 이어가는 사건들은 예의 롱테이크 고정숏들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역동적이고 격렬하다. 그 변화무쌍함은 하룻밤 사이 무려 세번이나 옷을 갈아입게 되는 선화를 통해 집약된다. 카메라의 위치이동이 대여섯번에 불과한 이 아파트신은 오래도록 손꼽히는 실내 미장센으로 남을 것 같다.

카메라 팬을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쓴 홍상수의 미장센이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건 예고편에도 잠시 등장하는 중국집신이다. 헌준과 문호가 낮술을 마시며 선화에 대한 회상을 떠올리는 곳이다. 각자 옛사랑의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는 이 순간, 그들은 차례로 중국집의 매력적인 여자종업원에게 수작을 건넨다. 헌준은 영화감독의 지위를 이용하고, 문호는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활용한다. 홍상수의 ‘먹물’에 대한 모멸감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이 장면은 7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가는데 중국집 내부와 외부까지 정교하게 계산한 연출이 두드러져 보인다.

홍상수의 선물, 배우 유지태

자못 충격적인 캐릭터는 문호이자 배우 유지태다. 홍상수는 우리가 몰랐던 유지태를 발견해 우리에게 ‘선물’해준다. 문호,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와 <동감>에서처럼 여기서도 선한 눈매를 지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 헌준을 만나는 날, 그는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자기집 마당에 쌓인 첫눈을 밟으라고. “형 첫눈 밟으라고. 눈이 너무 곱지 않아? 개도 일부러 묶어놨어.” “응 개도 있네. 이거 밟어?” “응, 형이 원하면.” 유지태 특유의 온화함이 화면 그득히 담겨 있다. 다른 한편에서 문호, 유지태는 <올드보이>의 이우진도 보여주지 못했던 공격성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미국으로 갔을 때 자기 아내를 포옹했던 헌준을 기억하는 순간 그는 다시는 그런 짓 말라고 선배를 위협하고, 처음에 부천행을 마다하는 자신의 핑계를 헌준이 의심하자 그는 쌍소리를 해가며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 이따금 어이없는 속물이 된다. “헌준이 형! 난 우리 학교를 우리나라에서 정말 가장 위대한 학교라고 생각하거든. 난 그 학교에서 꼭 교수가 될 거야. 그게 나의 진짜 꿈이야.” 마지막으로 문호, 유지태는 동물적이다.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너무나 태연하게 말한다. “나, 빨아줄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선언적 의미를 캐릭터와 관련지어보면, 홍상수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여자들이 안정돼 보인다. 여대생 선화는 어여쁘고 순해서 젊은 남자들의 폭발적인 욕정에 쉽사리 휘둘리고 상처받긴 한다. 불만이 묻어나올 만하지만 <오! 수정>에서 수정의 시점이 하나의 축으로 등장해 그의 실재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여대생 선화는 두 남자의 회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서가 아니고 독자적 존재로 등장하는 7년 뒤의 선화는 흔들리는 감정의 기복없이, 아니 미스터리로 느껴질 만큼의 넓이로 두 남자를 아우른다. 자기 기대감이 무너졌다고 또다시 자신을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남자를 향해 “너무 쉬운 거 아냐”라고 의미심장한 반문을 날릴 수 있는 ‘여유’를 지녔다. <여자는…>에서 숨겨진 제3의 중요 인물이 문호의 여대생 제자 ‘이쁜이’다. 이쁜이는 마지막 두 에피소드를 이끄는 비중있는 캐릭터인데 여대생 선화와 비교하면 판타지로 느껴질 만큼 당돌한 주체성을 지녔다. 선화의 변신에 비하면 헌준은 경험을 통해 사유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하는 편이다. 과거의 어느 한틈에 자신의 일부분을 묶어놓고 7년의 공백을 그냥 지워내려고만 든다. 그렇지만 홍상수가 성차를 갈라놓고 어느 한쪽을 편들 것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궁금해질 따름이다. 여자는 어느 순간 저렇게 남자를 추월해버렸을까.

욕망은 여전히 불구로 남는다

익히 알려졌듯 <여자는…>에서 새롭게 시도된 것이 회상, 꿈, 상상의 삽입이다. 혹자는 홍상수 영화에서 시점숏이 거의 없다는 걸 두고 감독 자신을 절대적 관찰자로 위치매김하는 권력으로 해석한다. 그 권력이라고 해봐야 이런 게 삶의 실재라고 보여주는 모더니스트적 노력이긴 하지만 말이다. 회상은 그렇다치고 인물의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꿈까지 관장하고 지켜보려는 이번 시도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 권력의 확장일까, 아니면 관찰자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다른 길로 접어드는 역설적 태도인가. 이건 인간 내부 이외의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일관성의 연장처럼 보인다. 분명한 건 그 권력의 촉수가 차가운 냉소가 아닌 따뜻한 그 무엇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백일몽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에는 대상에 대한 연민이 명백하게 묻어 있다.

백일몽에 담겨 있는 문호의 소망은 제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교수가 되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면 그 소망은 처참하게 무너진다. “선생님 좀 저질 아녜요?” “제가 선생님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좀 문제가 있으세요.” 보상은 섹스를 통해서 이뤄진다. “선생님, 제가 빨아드릴게요.” 이마저 충족되긴 글렀다. 누군가의 간섭으로 중단되니까. <생활의 발견>과 달리 <여자는…>에서 인물들이 포만감을 느꼈을 섹스는 없어 보인다. 강간당한 여자친구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주술적 행위이거나, 너무 빨리 일방적으로 끝내버리는 황당함일 뿐이다. 욕망은 여전히 불구로 남는다. 로맨스의 성공 여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욕망은 의지보다 강하다

의지보다 욕망을 믿는다는 홍상수의 믿음은 문호를 통해 드러난다. 문호가 공공연히 밝힌 유일한 의지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빼놓으면 그의 48시간 동안의 여정은 죄다 누군가의 권유에 의한 것이다. 몇번이나 사양했음에도 헌준의 강력한 권유로 부천까지 오게 됐고 선화를 만나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의 권유로 눈내리는 밤의 술자리를 갖게 됐으며, 또 다른 제자의 권유로 여관에 들어가게 된다. 문호 자신은 그 권유에 따라 마련된 적절한 순간에 저 밑에 있던 욕망과 그것이 발산될 수 있는 운을 만난다. 술기운과 자해 위협까지 동원해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던 헌준에 비하면 문호는 정말 운이 좋은 사나이다. 물론 문호의 유일무이한 의지 역시 오지 않은 미래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에서도 그의 의지를 읽어내기란 간단하지가 않다. 괴물처럼 예민한 그의 시선들을 편히 즐기는 건 어떨까.

그의 5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개봉은 5월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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