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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카피 뒤, 누군가 있다
2001-06-07

영화전문 카피라이터 윤수정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파이란>)

“1등 보내고, 2등도 보내고, 3등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천국의 아이들>)

“꽃같은 세상, 날려버린다.”(<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도시를 삼킨 거대한 불, 누군가 있다.”(<리베라 메>)

위의 카피는 모두 한 사람이 쓴 것이다. 멜로에서 예술영화, 인디에서 블록버스터까지, 한국영화계에서 생산되는 카피의 70%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다는 누군가의 ‘제보’에 솔깃했다. 그것이 꽤 부풀려진 수치일지라도. 그 ‘발랄한’ 카피들을 줄줄이 써대는 카피라이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러나 막상 만나본 윤수정씨는 갈래갈래 찢어진 청바지 차림도 아니었고, 힙합 스타일로 머리를 꼬지도 않았다. 귀에는 그 흔한 귀걸이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젊은 여자’였다.

대학 4학년 늦가을, 졸업도 하기 전에 광고회사에 취직이 됐다. 그러나 입사하자마자 ‘아차, 실수다’ 싶었다. 광고회사도 회사마다 특성이 있다고 한다. 그 회사는 패션전문이었는데, 문제는 윤수정씨가 비싼 구두니, 옷이니 화장품 등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것. 화장품 광고 카피를 써야 하는데 카피는커녕 제품에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시간이 몇 개월, 그만두자, 결심은 짧고 강했다. 사표를 던졌다. 이미 영화사 백두대간에 원서를 넣은 상태였다. 96년 12월부터 시작된 영화계 생활. 연봉은 정확히 광고회사의 절반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백두대간에서 약 2년 반 동안 일하면서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쥴 앤 짐>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의 보도자료를 쓰고 예고편 카피, 포스터 작업, 심지어 자막번역까지 했다. 프리랜서 생활은 99년 <내 마음의 풍금>부터 시작했다.

영화 카피라이터란 마케팅쪽에 좀더 가까운 개념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화 보도자료, 예고편, 포스터(포토 아이디어까지 포함), 광고카피 등 전체 홍보전략까지 공유하는, 마케팅의 텍스트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한국영화의 경우 시나리오가 나온 뒤 투입, 즉 스탭 계약단계부터 합류한다. 제작발표회도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리베라 메>를 할 때, 똑같이 불을 소재로 한 <싸이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차이점을 생각했다. <리베라 메>의 불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 방화라는 것, 세트가 아니라 도시를 ‘진짜’ 태운다는 것, 제작비를 많이 들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나온 카피가 “도시를 삼킨 거대한 불, 누군가 있다”, “숨소리마저 태워버린다”, “거대함은 서두르지 않는다”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영화가 좋아서 기꺼이 나선 경우다. 단, 돈을 안 받는 대신 컨셉이나 아이디어는 마음대로 하는 조건이었다. “꽃같은 세상, 날려버린다”라고 썼다. 그런데 제작사에서 난색을 표했다. 관객이 ‘꽃’의 뜻을 모른다, 액션영화로 갈 생각인데, 이런 컨셉은 아닌 것 같다는 등. 하지만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카피는 영화를 위한 맞춤옷”이라는 것이 윤수정씨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만의 맞춤옷 재단법은? 컨셉을 잡기 위해 시나리오를 본다. 그리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분명한 것’을 찾아낸다. <리베라 메>는 도시를 태운다, 소방관 대 방화범, <박하사탕>은 시대 운운하는 것들 다 빼고, 지독하게 아픈 첫사랑, <하루>는 ‘하루’라는 시간, <순애보>는 ‘두개의 도시’ 이런 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한계가 있느냐는 질문에 “범생이였기 때문일까, 어휘의 한계를 많이 느낀다”고 답한다. 비속어에 약하고. 확 깨는 카피를 쓸 수 있을까 걱정된다고. 근성도 달린다고 한다. “1등 못하면 어때, 2등 하면 되지” 하고 태평스럽게 중얼거리는 축이란다. 하지만 그 2등주의가 오히려 1등 카피라이터 윤수정을 길러낸 자양분 아닐까. 여전히 영원한 목표는 글을 잘 쓰는 것인 이 ‘거대한’ 카피라이터는 서두르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복수는 나의 것> 계약서에 막 사인했고 몇몇 작품이 대기중이다. 그리고 그녀의 카피는 계속된다.

글 위정훈 기자 oscarl@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