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방금 들린 그 발자국 소리는
2001-06-07

정윤수의 이창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벌써 10년 가까운 일이지만 2천여장의 LP를 처분하던 일은 지금도 참담하다. 왜 그랬을까. 순간의 방심을 막고 지금껏 여일하였더라면, 더러 가욋돈을 만들기도 쉬운 나이가 되었으니 아마도 5천장은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속물적 아쉬움은 동료들의 라이브러리, 그 바위 같은 인내와 집요한 탐닉의 성채를 볼 때마다 치욕에 가까운 절망감이 된다. ‘공장폐업 대방출’의 마음으로 LP를 내보낸 뒤 다시 CD를 하나씩 사면서(결코 ‘수집’이라고 할 수 없는) 더러 즐거움이 없지는 않았다. 재생 원리의 편리뿐만 아니라 모노 시절의 ‘필청 명반’까지 복각되는 형편이니 당시 돈으로도 1십만원이 넘는 LP 타이틀을 단돈 6천원짜리 CD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정녕 디지털시대의 행운이 아닌가, 하고 터무니없는 자족을 했단 얘기다.

푸르트뱅글러의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베토벤 9번 교향곡을 꺼낼 때면 더욱 망연해진다. 이 곡의 혁혁한 해석으로는 3천여 가지 명반이 있겠으나 오로지 이것만을 따로 기억하는 것은 1악장이 시작되기 전, 푸르트뱅글러가 저벅저벅 둔탁한 걸음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소리 때문이다. 지옥을 순례하고 돌아온 유령처럼 그는 마룻바닥을 거칠게 끌면서 들어서는데, EMI의 노련한 엔지니어들이 왜 그것마저 노이즈로 보고 CD에서는 말끔히 제거해버렸는지 의문이다. 음악평론가 이순열 선생이 푸르트뱅글러를 일컬어 ‘문화 스노브들이 득실되는 이 시대의 고양하는 넋’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젠 구하기 힘든 저 LP에 기록된, 오만 가지 잡음과 더불어 들려오던 귀신들린 발자국 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독일음악의 위대한 사제들, 아벤트로트, 니키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주장하던 오케스트라를 모조리 이어받은 적손이자 그중 오직 베를린 필을 거점으로 독일음악의 견고한 성채를 우뚝 세운 푸르트뱅글러.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음악사에 등재될 인물이겠으나 여기에 나치즘이 가세함으로써 그는 역사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베토벤식 영웅의 탄생과 바그너식 독일인에게 고함을 제 나름대로 내면화했던 히틀러가 독일음악의 현현인 푸르트뱅글러를 오남용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의 인생에 역사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우선 베를린 필의 유대인 연주자를 보호해야 했고 힌데미트의 급진적 오페라를 성사시켜야 했으며 이 모든 것이 좌절되자 공직을 사임하는 초강수까지 둬야 했다. 라이벌이자 동료인 토스카니니가 그를 비난하고 토마스 만 같은 망명객들이 그에게 비판적 분발을 촉구했던 일은 그의 대가적 삶에 기이한 영향을 끼친다. 그는 히틀러 생일 연주회에서 베토벤 9번을 연주했고(이것이 그 유명한 1942년 복각 CD다) 나치의 휘장이 드리워진 바이로이트 축제를 주관하였으며 물론 베를린 필의 무대도 계속 맡았다.

그런 푸르트뱅글러에게 전범자의 혐의가 씌워지는 것은 역사의 당연한 판단. 물론 유대인 연주자 보호에 노력했던 일 등을 고려하여 1947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그의 넋은 상처와 곤란의 무참한 경지를 오간 뒤였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51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역사적인 귀환의 무대를 가진 것이다. 저벅저벅, 곧 폐렴과 항생제 남용으로 사멸해갈 위대한 지휘자의 수척한 발걸음, 저벅저벅.

그 발걸음이 말갛게 소거된 CD를 들으면서 서정주를 생각한다. 친일부역과 독재미화 경력, 그리고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그의 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는 떠들썩한 논란에 비해 답은 명쾌하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치적이지 않고 지극히 문학적이다. 서정주를 추존하는 문인들이 꾸준히 분리하자고 주장하지만 그에게 시와 정치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친일 행적과 독재 미화는 수십년 동안 문단의 막강 파워를 구사했던 힘에 대한 그의 동경에 비추건대 차라리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와 정치 분리 운운은 역설적으로 대단히 정치적인 파이팅으로 들릴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치 부역자에 대한 명예 회복에 애썼던 독일인의 이중 심리와도 닿아 있다. 잔혹스런 언어로 파멸적 에로티시즘에 몰입하고 난해한 상징으로 남국을 동경했던 고트프리트 벤이 느닷없이 <신국가와 지식인>을 쓰며 나치에 부역했다가 곧 후회하고 ‘망명의 귀족적 형식’이란 이름으로 군의관으로 입대한 일이 있는데 그 와중에 남몰래 쓴 이른바 ‘서랍 속의 시’에 대하여 독일인들은 1948년 뷔히너상을 수여함으로써 명예 회복을 꾀한 바 있다. 그것은 벤을 복원함으로써 히틀러를 용인했던 수많은 독일인, 곧 자기 자신을 복원하고자 하는 집단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푸르트뱅글러의 명예 회복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회하면서 동시에 복원을 꾀했다. 아니 적어도 그러한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기는 했다. ‘시의 정부’ 서정주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행위는 그 정부 안에서 양지의 삶을 살아온 문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집단 무의식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 양상에는 참회나 회환, 성찰과 은거의 제스처조차 찾을 수 없다. 아주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항변만 들려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