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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영화’에 관한 메타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 영화는 남자, 혹은 여자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여성관에 대한 김경욱의 글은 좀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이 영화는 ‘홍상수 영화에 관한 영화’, 즉 ‘메타’영화이다(‘메타’란 이를테면 “내 개그는∼ 송아지야, 말이 안 되지!”라며 자기 개그에 대한 규정 자체를 개그로 삼는 식이다). 즉 이 영화는 비평이 대상으로 삼는 ‘홍상수 영화’들을 의식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여하한 논란까지도 자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자기복제니 동어반복이니 하는 말은 하나마나한 소리가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홍상수 영화에서는 ‘구조’가 중요하다. 영화가 두개의 단락으로 쪼개지고, ‘반복’되는 듯이 보이는 두 단락이 인물/시점/역할의 ‘변주’를 통해 오묘하게 맞물려들어가,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 띠처럼 보였던 <강원도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 역시 세명이 나오는 ‘앞 2/3’와, 유지태만 남은 ‘뒤 1/3’로 나뉜다. 그러나 전작들과는 달리 앞/뒤의 단락이 대구(對句)를 이루지도 않고 맞물리지도 않는다. 혹자는 여학생이 선화의 전철을 밟게 될 거라며 반복과 변주를 찾아보려 하지만, 그렇게 보면 전작들에 비해 구조의 완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단지 불평할 뿐) 설명하지 못한다.

겹겹의 N차 구조(미장-아빔)

특이하게도 이 영화의 구조는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연상시킨다. 앞에서 드라마를 보여주고, 뒤에서 주인공과 패널들이 토론하는 (바깥)드라마가 있는 액자구조 말이다. 영화의 ‘앞 2/3’는 그간의 홍상수 영화의 주제와 형식을 더 노골적으로, 더 압축적으로, 더 위악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며(일종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쇼다), ‘뒤 1/3’은 유지태를 연결고리 삼아 화자, 즉 감독 자신을 되비추는 구조이다. 단, 이 영화의 구조가 단순 액자구조인 <사랑과 전쟁>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은 첫째, 액자의 이음새가 없고, 둘째, 토론하는 (바깥)드라마에 단지 2차 극중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스크린 바깥의 감독과 관객과 평자가 딸려들어간다는 데 있다. 이런 놀라운 구조의 비밀은 ‘중국집 장면’이 이미 암시하고 있다. 첫째, 이음새가 없는 것은, 장면을 컷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에 있는 인물의 동선과 시선을 따라 카메라를 회전(패닝)하여 연결시키는 기법이 암시하고 있다. 둘째, 스크린 바깥을 포괄하는 프랙털 구조는, 인물 너머에 창밖이 있고 그들이 때때로 화면처럼 창밖을 응시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스크린 바깥에 놓인 관객’이라는 겹겹의 N차 구조(부분의 전체 반영, ‘미장-아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앞 2/3’에서 감독은 “지금까지 나는 영화에서 이런 것들을 얘기해왔지. 봐, 정말 환멸스럽지 않아?” 하며 ‘홍상수 영화’의 압축판을 보여준다(‘7년’이라는 세월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나온 96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찍던 2003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리고 나서 ‘뒤 1/3’에서 “그런데 더욱 환멸스러운 것은 그게 모두 진짜 내 얘기라는 거야. 마치 진실게임처럼” 하고 말하며, 우리를 둘러보는 것이다(그리고 속으로 ‘니들도 다 똑같애’ 하며 웃는 것이다). 즉 ‘앞 2/3’는 ‘환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뒤 1/3’은 ‘환멸하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환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환멸하는 자기 자신을 환멸하는, 오직 환멸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병적 강박에 휩싸인 근대인의 모습은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 악무한의 재귀성을 피학적으로 현시(顯示), 효수(梟首)하며 위악을 떤다는 데 있다. 일종의 히스테리이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 정리

그간의 홍상수 영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남자는 저열하다, 2. 여자는 모르겠다, 3. 만나면 섹스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은 반복, 회귀, 변주이다. 영화의 ‘앞 2/3’는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작정하고 보여준다. 첫째, 남자. 이번 영화의 남자들은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 중 저열함의 백미이다. 지금껏 그의 영화의 남자들에겐 ‘어쩌면 우리 모습일지도…’ 하며 공감하는 관객도 있었지만, 이번엔 감히 동일시된다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하고 치졸하고 속이 빤히 뵈는 속물들이다. 오죽하면 “개새끼들이다”(보란 듯이 흰개와 검둥개도 나온다). 이들 관계 역시 이전 영화들에서처럼(<강원도의 힘>의 여행하던 강사와 먼저 교수가 된 후배, <오! 수정>의 문성근과 정보석, <생활의 발견>의 김상경과 춘천의 선배 등)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서(특히 후배는 도통 선배를 존경하지 않는다) 은근히 서로 잘난 척하고, 시기하는 선후배간이다. 헌준은 문호의 부(富)를 부러워하고, 문호는 헌준이 교수자리가 많은 영화학으로 유학 갔다온 것을 시기하고, 아내를 만나게 하는 것을 꺼린다. 둘째, 여자. 홍상수 영화에서 여자는 대체로 무규정적이며, 유일하게 규정이 된다면 ‘영악하다’이다. 이번 영화의 선화는 방정식의 미지항이다. 문자 그대로 남자의 미래, 즉 남자 입장에서 알 수 없는 자이다. 헌준의 기억에서 그녀는 강간당했다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며 깨끗하게 해달라고 안겨온다. 문호의 기억에서 그녀는 선배에게 채인 청순가련한 여자였지만, 하루 만에 머리를 볶고 나타나 사뭇 섹스를 밝힌다. 그녀는 순진하지도 않지만 영악하지도 않다. 상대의 기분이나 기대 따위에 맞춰 내숭떨지 않는다. 7년 만에 만난 그녀는 과거로부터 담담하며, 오는 남자 막지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을 만큼 변해 있다. 결코 만만치 않다. 그녀의 불가해함과 포착불가능성은 중국 말을 하는 여자와 창밖에 서 있다 사라지는 여자로 다시 표상된다. 셋째, 섹스. 막무가내 남자와의 섹스는 접어두더라도 7년 전 두 남자는 선화와 모두 쉽게 섹스했고, 회상도 거의 섹스에 관한 것들이며, 7년 만에 만나서도 불과 몇 시간 만에 골고루 섹스한다. 넷째, 반복. 중국집 장면에서 그들이 정말 똑같은 짓을 하는 걸 감독은 작위적으로 보여준다. 다섯째, 회귀. 마치 눈밭의 장난처럼, 7년 만에 그들은 슬쩍 왔다가고, 중국집에서 유리창 안팎으로 넘나드는 그들의 회상선처럼, 아파트에서 선화의 동선은 마루를 거점으로 두개의 방을 넘나들며 회귀한다. 여섯째, 변주. 두 사람의 기억으로 선화의 이미지는 변주되고, 그들의 연애는 하룻밤 사이의 일로 다시금 변주된다. 이렇듯 ‘앞 2/3’는 홍상수 영화의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극대화한 ‘홍상수 영화 압축판’이다.

‘뒤 1/3’을 이음새 없는 액자라고 유추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첫째, 유지태가 학생들을 만나 “저 사람들 과거를 만나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되자, 주인공이었던 자가 제 얘기를 남 얘기인 양 말한다. 이는 ‘영화’라는 말하기의 구조를 유비한다. 감독은 유지태의 입을 빌려 지금까지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인 양 말하고 있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주인공이 곧 ‘나’라는 것을 실토하는 셈이다. 둘째, 유지태의 꿈. 그의 꿈은 앞서 회상과는 달리 전체 서사와 관련도 없고, 그의 주관적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누구의 시점인지가 중요한 홍상수 영화에서,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꿈’이라는 주관적 장면의 삽입은, 마치 “여기서부터 1인칭 시점입니다”는 표지판으로 읽힌다. 셋째, 그는 학생들과 진실게임을 한다. 진실게임이란, 내용은 진실인데 ‘게임(허구)’의 형식을 빌려 말하는 것이다. 마치 취중진담처럼. ‘진실을 허구처럼 말하기’, 이는 홍상수 감독이 영화라는 허구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진실을 말해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넷째,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여학생에게 마지막 섹스의 기억을 묻자, “저질”로 비난받는다. “어떻게 부정만 하고 사느냐?”며 공격받는다. 그는 나름대로 ‘부정의 철학’을 설파해댄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앞 2/3’에서 우리의 문호는 학생 때부터 교수 집에 들락거리고, 좋은 집에 아내, 딸과 함께 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 학교에서 교수가 되는 게 꿈”이라며 소년처럼 정색을 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체제 순응적인 그가 그토록 되고 싶은 교수직을 앞두고, 비록 술기운일망정, ‘부정의 철학자’로서 “뭘 아느냐? 그거 전부 찌꺼기다, 아전인수다”는 독한 회의론을 학생들 앞에서 공공연히 펼칠 수 있을까? 그것도 객기가 아니라 익숙한 품새로 말이다. 이것은 꿈속에서도 간절히 존경받는 교수가 되고 싶은 문호의 모습이 아니다. 바로 환멸의 서사를 통해 부정의 철학을 엮어내는 홍상수 감독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영화에 쏟아질 비난과 그에 대한 변명을 영화 안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그를 “솔직한 사람”이라며 치켜세우고, 나서서 빨아주는 이쁜이가 있어서(그도 역시 그녀가 잘 이해되진 않지만, 어쨌든) 위로받는다. 감독의 자기모멸에 가득 찬 영화를 보고 “우리의 치부를 솔직히 보여주어서 좋다”고 말하는 관객과 평자들이 있어 고마운 것처럼.

진실게임 혹은 취중진담의 비밀

그러나 여학생과의 에피소드가 주는 교훈은 그게 다가 아니다. ‘더러운 방’에서의 섹스를 술회하던 그녀가 다시 ‘더러운 방’에 들어가듯, 진실게임의 고백은 반성을 통해 과거와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암시처럼 과거와 미래를 연속시킬 뿐이다. 또한 이러한 호평에 위로받는 것은 빨아주길 원하는 유아적 욕망일 뿐이며, 그나마도 누군가에게 들키기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다. 아울러 감독은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하는 자 역시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그저 “선생님에게 까불던 애”에 불과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이가 아니라 “의심이 많고, 귀찮게 따라다니는 애”일 뿐이다. 더욱이 방문을 차고 도망치는 그의 행동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첫째, 자기환멸의 극한에 빠진 채 “남자는 개새끼다, 나를 비롯해서”라 말하는 자는 오만하다. 그의 모멸은 결코 반성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개새끼이고 싶다”는 말이자, “이런 나를 비판할 수 있는 자 역시 오직 나일 뿐”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둘째, “부정없이 행복해질 수 있냐?”는 그럴듯한 말은 ‘회의주의’를 ‘방법론적 회의’와 혼동시키고자 하는 수작(酬酌)에 불과하다. 지양(止揚)되지 않는 부정, 긍정을 지향하지 않는 부정은 부정을 거듭해도 여전히 부정일 뿐, 결코 긍정에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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