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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의 3:7 가르마가 아름답다
심영섭(평론가) 2004-07-21

"현실 30 : 환상 70"의 절묘한 배합으로 시적 리얼리즘을 구현하다

<파이란> <내 마음의 풍금> <집으로…>까지 2000년대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여성과 전근대성이란 시간이 성차문제와 맞물려질 때 빚어내는 무성적이고, 순수하며, 자연과 동일시되는 여성에 관한 판타지는 늘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일명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에 대항하여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라고 부를 만한 이들 영화에서, 여성들은 흰 빨래나 바닷가 혹은 문맹 같은 몇 가지 비슷한 기호 속에서 등장해서 늘 순수하고 소박하고 사랑스럽고 동정심이 가며 순결한, 무성적이고 비주장적인 존재로 관객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만약 <내 마음의 풍금>의 홍연처럼 백마 탄 왕자를 만나, 그러한 순수한 마음이 전근대성의 시간에 봉인될 수 있다면, 그녀는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의 궤도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란>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덜 근대화돼 보이는 (그것이 비록 착각일지라도) 중국이란 시간과 공간에서 날아온 그녀는 초근대적 시간이 팽배한 대한민국의 차가운 땅 위에서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처럼 대한민국의 대기 속으로 기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파이란>의 파이란은 강재를 만날 수 없다. 그건 마치 <백 투 더 퓨처>에서 과거로 간 아이들이 미래의 부모를 만날 때 같은 시간의 패러독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 아직도 전근대적 여성이 남아 있다면, 그건 <집으로…> 같은 영화에서 보이듯이 꼬부랑 할머니여야만 한다. 그녀는 <죽어도 좋아>의 할머니처럼 틀니를 빼고도 오럴을 할 수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대신 늘 투정하고 주는 것 없는 손자 뒤치다꺼리나 하며 늙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 자체"가 향수의 대상인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들

흥미로운 점은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이소룡을 꿈꾸는 남성 주인공들은 롤러스케이트, 곰보빵, 서금옥 같은 시대의 기호들 그 자체에 둘러싸여, 그것이 더욱더 강조된 상태에서 행위의 주체가 되지만, (그래서 이를 감독한 많은 감독들은 시대를 정확히 재현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것이 선전의 한 포인트가 된다) 이들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향수를 일으키는 그리움의 대상은 ‘시대’나 그 시대를 환유하는 기호, 즉 디테일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연 그 자체이며, 멈춰버린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 비록 현대가 되어도, ‘향수’ 그 자체의 코드만으로 강한 정서적 자장을 일으키는 기이한 국면을 맞게 된다. 즉 여성과 그 여성의 육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거이자 어머니이며, 좋았던 시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대의 디테일이고, 탈역사화된 주체가 된다. 그녀들은 모두 ‘누군가를 기다린다’(심지어 중국영화지만 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장쯔이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말썽꾸러기 손자든 대처로 가버린 선생이든 우체부든 이들은 모두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들이다.

어찌보면 영화 안에서 그녀들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다가올 미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그 기다림이라는 절절한 정서적 여운에 몸을 담근 채 그녀가 재현하는 가버린 과거를 스크린 밖으로 소환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다림이란, 그가 행이 될지 불행이 될지, 돌아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와의 연애를 유보하는 ‘사랑의 비 기획성’에 그 핵심을 두고 있고, 이러한 사랑의 비 기획성이야말로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가 체득하지 못한, 홍상수의 여자들은 알 수 없는, 전근대가 늘 사람들의 마음에 어필하는 핵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좋았노라고, 어머니는 좋았노라고, 자그마한 유리구슬 같은 유토피아를 애써 손짓하는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도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만큼 퇴행적인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인어공주>의 성취: 과거의 기억으로 현실을 성찰하다

<인어공주>는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틈바구니에서도 작지만 중요한 성취를 해낸다. 물론 그 저변에는 판타지에 현실을 두르는 액자 구성과 고두심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연기가 주효했지만. 그러나 일단 그 점은 추후에 논의를 하기로 하고 이러한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기억과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에 대해 먼저 밝히고 싶다.

필자는 지난 <씨네21> 440호에 남성 노스탤지어의 강박과 불안이란 제하의 글을 썼었고, 442호에서 그에 대한 진지한 메타 비평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품행제로> 같은 일단의 영화를 대상으로 한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강박과 불안’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필자인 심영섭과 유운성은 남성 노스탤지어의 시대적 기호들이 관객의 기억과 가장 쉽고 빠른 방식으로 교환되는 일종의 기억의 사기술(심영섭) 혹은 ‘유사기억’으로 정의하면서(유운성)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문제점을 짚은 바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평론가 정승훈은 남성 노스탤지어의 시대적 디테일들은 대중 기억을 탈영토화하는 ‘대항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다른 시각의 논의를 펼쳤다.

나는 지금 남성 혹은 여성 노스탤지어 영화들 속의 과거 기억들이 과연 ‘유사 기억’이냐 ‘대항 기억’이냐를 재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이러한 일단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상업영화에서 그것이 유사 기억이든 대항 기억이든 간에 기억과 현실과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준거점이 되는 것은 정승훈이 주장한 대로 영화가 재현하는 과거의 속성이나 특징이 아니라(즉 과거가 얼마나 디테일하냐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디테일이 관객과 어떻게 ‘봉합’되는가 하는 맥락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그러한 점에서 <인어공주>가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백 투 더 퓨처>처럼 어떻게 시간 여행이 가능한지 관객을 설득하는 핍진성의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생존해 나아가는 어머니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어떤 거리를 확보하게 만든다. <인어공주>의 현실은 향수어린 과거에, 판타지에 매몰되지 않게 하는 일종의 노출된 솔기이자, 액자이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현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인생이란 대궁위에 활짝 핀 장미가 시들고 나면 가시만 남는 것이라는 점을, 무엇이 내 어머니 속에 있었던 인어공주의 축축함을 현실 속에서 다 기화시켰을까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아줌마라는 대중의 무의식적 비하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악스런 중년 여인과 짧게라도 ‘함께 살아본’ 뒤, 가족 이기주의와 물신주의의 화신같이 보였던 어머니가 달리 보이는 지점으로, 그녀를 화해나 용서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충만한 정서적인 자장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듯 과거의 기억을 성찰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치는 꼭 현실을 끌어들이는 액자 구성만을 통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품행제로>에서처럼 주인공의 모험담을 구술하는 방식으로 판타지를 더욱더 과장할 수도 있고, <해적, 디스코왕 되다>처럼 똥을 펐던 아버지의 아들도 디스코를 추는, 가장 하부의 계급도 대중문화를 전유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상상력으로 시대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 <내 마음의 풍금> 같은 상업영화들이 그러한 거리를 확보했다고 믿지 않는다. 과연 이런 영화들이 진정 대중의 기억을 탈영토화했는가? 이러한 점은 자신이 통과해온 세대를 집어던진(정성일) 60년대를 막힘없이 주파해나갔으며(정승훈) 임권택 영화의 새로운 경지(남동철)라 평가받았던 <하류인생>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하류인생>은 자신들이 통과해온 60년대 혹은 70년대가 비장했다고, 잔혹했다고, 하류들이 득시글거리는 진흙창이였다고 술회하지만, 종국에 가서 영화들은 자신이 아는 기억의 회로를 통째로 관객에게 이식하려든다. ‘60년대는 이러했었어’라며 세트를 세우고, 그 시절을 더욱더 비슷하게 재현했다고 선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들은 자신들이 해석을 내린 70년대의 유산들, ‘의리, 순결, 남성 소영웅주의, 전근대적 여성’ 같은 가치들을 관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든다. 그것은 똑같은 들뢰즈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중 기억을 탈영토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재영토화’인 것이다. 시대의 공기는 박제되고, 그 시대를 행동으로 변혁시키지 못했던 자들에게는 면죄부가 떨어진다.

사실 <인어공주>의 연순(고두심)에게는 <하류인생>의 태웅(조승우)에게서 느껴지는 ‘인생이 맑아지려는 조짐’이 끝까지 보이질 않는다. 그녀는 <질투는 나의 힘>에서부터 <결혼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전문직 여성, 섹스하는 여성, 결혼 제도 바깥을 뛰쳐나간 여성이 아닌, 전문성도 섹스도 시들해져버린, 결혼 제도 바깥을 뛰쳐나가지 못한 ‘노동하는 여성’으로 탈근대의 시대를 살아나간다. <인어공주>는 이 가운데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쳐준다. 우리의 어머니. 주름살이 늘어나고, 쭈글쭈글해지고, 아버지를 구박하는 기세등등해진 저 어머니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존 조건은, ‘노동하는 여성’이라는 조건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빨간색 옷을 좋아해서, 진국에게 갈 때만큼은 늘 빨간색 꽃무늬 옷을 입던 연순이 목욕탕에서도 ‘Be the Reds’ 티셔츠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인어공주>의 어머니는 이 사실에 이제 너무 많이 지쳐버렸다. 넓디넓은 바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침뱉기가 육지에서는 그녀의 인간성을 담보하는 증거가 된다. 할 수 없이 그녀는 20대 때는 하지 않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나간다. 그것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현실을 ‘부정’(denial)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딸의 말에도 연순은 ‘부정’이라는 방패로 현실이라는 창의 습격을 막아내려 든다. “의사들이 돈만 알지 뭘 알겄어”라며. “니들이 시방 뭘 알것냐?”라며. 그런 어머니 앞에서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무기력하다. 그는 나쁜 아버지가 아니지만, 가족들에게 뒷모습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이삿짐 뒤켠에 세간살이와 함께 실려가는데, 말 그대로 그 자신이 이 가족에게는 ‘짐’인 셈이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이에 대해 ‘왜?’냐고 분개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어공주>의 건강함의 근원이자 박흥식이 멜로 장르 안에서 상업영화감독으로 흡수되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똑같이 노동하는 어머니를 가지고 있던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를 생각해보자. 그는 <인어공주>의 나영과 달리 어머니를 지켜볼 심리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가 지켜내려는 것이 지구인지, 지구로 치환된 어머니인지 알 수 없으나 병구는 나영처럼 현실로 귀환하는 대신, 실재계의 그림자가 현실로 역전되어버리는 판타지 세계에 머물기를 고집한다. 왜냐하면 병구는 지구를 ‘지켜야’ 하지, 지구가 그저 태양 주위를 공전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장준환은 판타지 안에 매몰되어 자폐적인 비극을 짊어지는 방식으로라도 현실의 모순을 감싸안으려 든다. 아마 똑같은 상황에서 박광수라면 다르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는 박흥식처럼 ‘그 섬’에 가서도, 이데올로기의 비극과 6·25를 목격하는 ‘민중’이라는 풀뿌리들을 놓지 못할 것이다. 물론 반드시 주인공으로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딸 대신, 연순이라는 민중을 지켜보는 검은 테 안경의 지식인이나 대학생, 하다못해 까마귀라도 나올 것이다. 아마 박찬욱이라면 또 다르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의 각본에 의하면 사실 진국은 섬에 놀러온 아름다운 ‘나영’이 자신의 딸인지 모르고, 그녀와 근친상간적인 연애 감정을 가지기 시작한다. 물론 과거의 죄로 인해 현실은 뒤죽박죽되어 있고 결국 진국과 결혼하지 못한 한많은 고두심은 진국과 나영에게 50대 여성의 복수극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영화사의 맥락에서 박흥식이 이창동과 함께 박광수의 조감독이었고, 이창동의 <오아시스>에서 현실을 위무하는 반짝이는 판타지들이 ‘30’인 데 비해 칙칙한 현실이 ‘70’이라는 사실, 그리고 반대로 박흥식의 <인어공주>에서 판타지가 ‘70’쯤인데 현실이 ‘30’쯤 섞여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 30 : 판타지 70", 박흥식의 시적 리얼리즘

이 ‘현실 30, 판타지 70 비율’의 정의야말로 한국영화의 지형학적 계보에서 박흥식의 위치를 절묘하게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박흥식이란 사람은 한국 영화사에서 리얼리즘의 계보와 초현실주의적 계보의 지형도 안의 중간 지점에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현실을 위무하는 판타지에 더 마음이 가 있는 감독이다. 어찌보면 <인어공주>는 남성감독이 만든 드문 여성 성장영화로 읽히기까지 한다. 나영은 어머니와의 짧은 동거를 통해 처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어머니-되기에 성공한다. 이를 통해 박흥식은 ‘사는 건 비슷해’라는 순환하는 비관적 세계관에 매몰되기보다 또 다른 대궁위에서 피어날 장미를 기다리는 쪽을 기꺼이 택한다. 전작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늘 비가 내리는 칙칙한 이 도시에도 미래의 아내를 위해 마법을 준비하는 설경구 같은 남자가 있었던 것처럼. 박흥식의 영화세상은 박찬욱의 ‘지옥’(<복수는 나의 것>)도 아니고 장준환의 ‘우주’(<지구를 지켜라!>)도 아니고, 김기덕의 ‘정글’(<야생동물 보호구역>)도 아니고 박기용의 ‘사막’(<모텔 선인장> <낙타들>)도 아니고 임권택의 ‘하류’(<하류인생> <오염된 자식들>)도 아니다. 박흥식의 주인공들은 늘 ‘이 남자다, 이 사람이다. 이 남자다. 이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거나 혹은 ‘학교는 나중에 나중에 가도 된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서정적인 식물성이 절묘하게도 감독의 진심과 맞아떨어질 때, ‘어머니에게’라는 타이틀이 떠오르고, 한평 남짓한 땟물에 어머니가 넓디넓은 바다를 앞마당 삼아 황홀하게 수중발레를 하는 공주로 바뀌어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진심은 정말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구석이 있다. 그건 ‘시장통에 나가 허리 한번 못 펴고 장사하는 어머니의 가슴에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픈’ 소년의 진심을 마주 대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그러니 허진호처럼 늘 사랑과 기억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만 늘 지평선보다 좀더 낮은 세상에 얼굴이 가 있는 감독. 도발은 없지만 위안이, 가슴이 있는 감독. 한국 영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박흥식의 ‘시적 리얼리즘’의 세상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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