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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2001-06-20

<수취인불명> 김기덕 감독 정신분석

● 보이지 않는 부메랑의 궤적처럼 상처는 허공을 그어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불구로

남아 한쪽으로만 되새김질해야 하는 다리, 지울 수 없는 피부 색깔, 외눈박이 처녀의 내상 그리고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를 부여안고 바느질로 세상을

기워나아가는 가족들의 빈한함. 부친 편지는 끝내 되돌아오지 않고 가슴에 남은 사랑의 박음질은 문신이란 수치로 다시 한번 인간들의 고름을 째어놓는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편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받을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친 편지란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을 주소로 부쳤던 그림자의 한

조각이었을지도. 세상을 떠돌던 상처는 그렇게 자신의 몸뚱아리를 소인 삼아 돌아와서는 구겨진 지전같은 우표 한장을 내밀 뿐이다.

김기덕의 여섯 번째 영화 <수취인불명>은 김기덕 필모그래피 중에서 몇 가지의 예외와 또한 변하지 않은 김기덕만의 어떤 색깔을 지켜낸다는

점에서 아주 이채롭다. 일단 이 영화의 예외는 어떤 면에는 상당한 진전이라고도 혹자에 따라서는 김기덕 영화의 색깔을 흐리게 하는 흐리멍덩한

타협이라고도 평가받을 수 있는 여지를 함께 남겨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취인불명>은 김기덕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다층적인

사회적 맥락을 심어놓으며 김기덕 감독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몇 가지 실마리를 흘린다. 그가 왜 그토록 많은 양의 증오를 소진하면서

세상에 대해 자학적인 제스처를 취하는지를 해독 가능케 하는, <수취인불명>은 김기덕 감독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도려낼 수 없는 환부

<수취인불명>에서 김기덕 감독은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이 땅의 정체성을 통찰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수취인불명>의 토대가 되는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어느 마을은 그 경제적 심리적 토대를 모두 미군이라는 군 기지에

둔 기형적인 마을이다. 성조기의 하강장면을 시작으로 영화의 빈 하늘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미군 헬기가 날아다닌다. 그 땅의 한귀퉁이에 흑인 혼혈인

창국 모자는 허름한 빨간 버스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마치 도려낼 수 없는 이 땅에 돌아다니는 부은 환부 같은 빨간 버스는 미국의 헬기와

대비되는, 기능이 정지된 운반수단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해바라기가 심해질수록 이 땅은

토악질나는 임시거처이자 간이역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 있다는 흑인 아버지에게서는 편지 한장 없고, 창국 모자에게 미국의 존재는

숙명적으로 뿌리깊은 애증과 양가감정을 동반하면서 모자간의 날선 긴장관계를 유발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다보면 <수취인불명>에서의 미군부대는 창국 모자를 넘어서, 그외의 사람들에게도 이웃과 차별화된 선민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파워인 동시에 근원적인 폭력의 발원지 같은 거대한 양가성의 장소로 확대된다. 아이들은 영어를 모른다고 학교를 중퇴한 기흠을 구박하고,

반대로 창국 모는 꼬부라진 영어를 한다고 슈퍼마켓 주인에게 멸시를 당하지만, 바로 그 영어 때문에 창국은 동네 부랑아를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은옥의 반편의 눈을 고쳐줄 수 있는 쪽도 그리고 그 눈을 다시 반편의 불구로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는 쪽도 물론 미군이다.

그러나 미국이란 절대적인 파워는 마을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상처를 주면서 시간은 흘러간다. 6·25를 통한 미군과의 교접은 이윽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불구와 혼혈이라는 불완전하고 혼돈된 반쪽 정체성을 안겨주며 역사적 상처는 대를 이어 반복된다. 은옥은 창국의 어머니처럼 미군에게 몸을 바치고,

흑인 병사와 내통했다는 이웃들의 멸시는 그 아들에게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하게 만든다. 물과 여성의 성기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대신 김기덕

감독은 역사적 상처와 개인적인 상처를 비교적 안정된 이야기구조 안에서 봉합하는 연출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창국 모자의 상처나 은옥의 상처는

가슴에 새겨진 문신만큼이나 길고도 오랜 소금기의 따가움을 남긴다. 창국은 흑인 아버지와의 다정했던 한때를 담은 사진을 보며 오열하는데, 이때

식탁에는 선인장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창국의 눈물은 끝내 선인장 화분 속으로 스며들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늑대였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김기덕의 세상에 관한 시선은 일관되게 늑대의 밤을 지키는 악어의 그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은

커다란 정글이라는 그의 명제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명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은 그 자체로 늑대다.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시체를

미끼로 유가족에게 돈을 뜯어내는 용패는 살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악어였고, <섬>의 희진과 <파란대문>에서의 진아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의 이미지로 위태롭게 시각화된다. <수취인불명>에서도 주변부를 맨몸으로 포복하는 인간들과 개는 등치적인 관계로

설정된다. 특히 창국은 자신의 혼혈과 같은 빛의 검은 개를 두드려 패고, 은옥은 백구와 황구의 교접(그것이 색깔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

자명한 일일 것이다)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단선적인 인간시장의 비유를 넘어서 <수취인불명>의 개는 좀더 특별한 기호로 영화에서 자리잡는다.

미군부대와 마찬가지로 이 마을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는 또 하나의 수단은 바로 개이다. <수취인불명>에서 개는 사람을 은유할 뿐 아니라

일종의 착취의 대상이자 자본이기도 하다. 고기 즉 자본으로써 동네 양아치 아이들은 푼돈을 위해 어린 새끼강아지를 훔쳐다 팔려 하고, 이상하게도

마을사람들 모두는 개 혹은 개고기와 연관되어 있다. 개를 조리하는 사람, 개를 파는 사람들, 개를 사는 사람, 개를 잡는 사람, 개장수의 조수,

개장수의 애인…. 심지어 개를 애완견 취급하는 은옥조차 개를 수음하는 데 이용할 정도로 개는 이들에게 주요한 생활수단이다.

그리고 이 마을사람들은 개눈이라 불리는 개장수를 은근히 멸시하지만 결국 이들도 몇푼의 돈을 얻기 위해서는 개장수와 거래하지 않을 수 없다.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지닌 지흠의 아버지는 “너 같은 백정은 활을 못 잡는다. 예전의 활이란 천석꾼만 잡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고기

몇근 값을 더 받기 위해 개장수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공장이나 번듯한 상점이 없는 이 마을은 근대화의 유산으로 황폐화된 부박한 속물주의와 탐욕스러움 그리고 아직도 우리 사회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천민과 양반이라는 계급의식이 상존하는 혼란된 장소로 그려진다. 여기에는 전작 <섬>에서 보여주었던 성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호한 저수지의

원형보다는 현대사의 한편을 자리한 채 역사의 포화를 맞은 구체적인 우리 동네의 어떤 은유가 들어 있기도 하다. 결국 이 마을의 자본주의적 취약함과

도덕의 상실, 계급의 혼돈은 혼혈과 불구라는 이 마을의 반쪽 정체성과도 일맥상통하는 현대사의 큰 맥락을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여전히 <수취인불명>의 미군들의 캐릭터는 아마추어적인 연기 때문에 더욱더 일관성과 균질성이 부족하고, 여전히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를 낙태하고 살의가 번득이는 주인공은 철사를 집어삼킨다. 롱숏으로 원경을 잡다 툭툭 근거리의 폭력장면을 삽입하는 김기덕식의 연출은 시각적

강렬함을 넘어서 거친 에너지를 화면에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한 표현과잉과 이야기과잉, 디테일의 부족 그리고 단선적인 캐릭터들은

김기덕 세계의 고름을 농 익어 제때에 터지는 게 하기보다 죽죽 짜버리는 형국으로 만드는 것 같다.

김기덕에게, 악이란 무엇인가

<수취인불명>은 이러한 김기덕 감독의 삐걱대는 영화세계를 해독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를 보여준다. 이러한 단초는 김기덕의 영화를 보며

들었던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문득 시작하게 되었다. ‘김기덕에게 과연 악이란 무엇일까??br>

<수취인불명>에서 은옥에게 환각제 LSD를 권한 뒤 이를 거절하자 뺨을 때리는 미군이나 뒷방에 누워 돈만 뜯어내려는 은옥의 오빠,

그리고 조재현이 분한 개장수 같은 악인들은 별다른 동기가 부여되지 않은 평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김기덕 영화의 악인들을 보는 것은 재미가

없다. 실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작품세계에서 우리가 흔히 도덕과 비도덕으로 가르는 악, 즉 강간이나 살인,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 일처리 등의 범죄적 요소가 악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오히려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비도덕을 상처와 자폐적인 세계로 향하는 통과의제로 치러낸다.

실제로 김기덕의 영화에서 진정한 악인들이 제시하는 악은 세상의 통념으로 존재하는 비도덕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일례로 은옥의 오빠는 은옥이

애지중지하는 애완견에게 끌끌 혀를 차며 다가오라 하고는 막상 개가 오자 한방에 개를 차버린다. 이러한 태도는 은옥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미군의

돈을 훔치면서도 은옥에게는 미국이 그토록 좋으냐 창녀 같은 년이라고 욕을 해댄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개장수가 창국에게 “개눈처럼 눈을

떠보라”고 강요한 뒤, 막상 창국이 증오의 시선을 보내자 “그만해라 눈알 터지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정점을 이룬다. 즉 김기덕의 악인들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주인공들을 얽어매어 이도저도 못하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진정한 악인들은 주인공을 ‘이중구속’한다.

그리고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이 이중구속에 갇혀 불행으로 허덕거리다 서서히 자멸한다.

어쩌면 김기덕 감독세계의 폭력의 본질은 행동의 나침반을 잃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이중구속된 주인공들이 눈먼 심정으로 세상의 모든 곳에

들이미는 주먹질은 아닐까? 김기덕의 영화에서 성과 폭력, 언어와 폭력, 생계와 폭력, 가족과 폭력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김기덕의 타자들은

주인공들의 분리 개별화를 향한 어떤 노력에도 거의 전멸당하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로 가혹하게 주인공들에게 악의에 찬 통제를 하려든다. 이러한

질식할 듯한 느낌에 대해, 이중구속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극단의 무기력과 그 대상에 대한 증오를 자신에게 돌리는 자해 외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김기덕의 분신들은 철저하게 분열되는 듯 보인다. 특히 영화 속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묘사되는 김기덕의 분신들, 즉

<악어>의 현정이나 <파란대문>의 진아는 이러한 악랄한 타자의 잔혹한 폭력에 대해 어떤 방도나 탈출을 꿈꾸지 못할 정도로

무력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 이들은 견디다 못해 <섬>의 현식이나 <수취인불명>의 지흠처럼 잔인한 살의와 자해의 화신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웬일인지 김기덕 감독은 이러한 진정한 악인들, 타자들의 성격화나 주인공들의 분열상태가 어떻게 변모하는지 그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데

특히 서툰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은옥이 미군 덕으로 눈 수술을 하는 날, 은옥은 지흠을 찾지만 지흠은 그녀를 안아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기력을 보이던 지흠은 미군에게 활을 쏘고 결국에는 은옥을 강간했던 불량배를 철사로 목조르기에 이른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캐릭터 변신은

매우 거친 방식으로 설명되어 종국적으로 관객에게 김기덕이 서둔다는 느낌을 배제하기 힘들게 한다. 또한 이상하게도 화가 출신이라지만 김기덕 감독은

시각적 이미지를 심어놓는 데는 강렬하지만 전체적인 미장센을 짜는 데는 무심한 면모를 보여준다. 때론 화면짜기나 카메라의 움직임을 조금만 더

배려한다면 종국에는 김기덕식 엽기적 표현의 틈새에 어떤 정적인 정서를 불어넣을 여지가 있을 텐데 말이다(예를 들면 창국이 추수가 끝난 빈 들판에서

개눈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조금만 더 롱숏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이 장면만큼은 폭력에 대한 관조와 잔인함이 공존하는 기이한 힘을 발휘했을 것으로

믿는다). 본인은 촉박한 시간과 저예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러한 점은 김기덕 자신이 풀어내어야 할 김기덕 내면의 마지막 단추는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여성에 대한 가학적 태도 또한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진정한 악인은 이상하게도 전부

남자들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혹은 어머니들은 이러한 악인들로부터 무기력 상태에 놓인 주인공을 보호해주지 못하거나 아예 부재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푸른대문>에서 진아의 대리모 역할을 하는 안주인은 진아를 착취하고 또한 방기한다. <수취인불명>에서

지흠의 어머니는 부재하고, 은옥의 불행에 대해 생계를 떠맡은 은옥의 어머니는 오빠의 포악함에서 은옥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수취인불명>은

처음으로 비로소 가족의 진한 내음이 나는 모자관계를 선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 어머니는 미군기지의 창녀이고 아들의 군홧발에 짓이겨지거나 머리채를

잡히는 불행한 어미이기도 하다. 창국은 자신을 미국이나 한국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게 이중구속한 흑인 아버지의 낙인인 문신에 집착한다. 이를

악착같이 어머니의 몸에서 떼어내고서야,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들이밀고서야 비로소 창국은 어머니를 용서한다.

철사와 낚싯바늘과 총을 넘어

결국 김기덕은 <수취인불명>에서 ‘폭력은 전염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역사의 뒤안길, 동네 진창에 숨겨진 총은 이제는 돌아와

안전장치를 풀고 개의 몸에 인간의 몸에 와서 박힌다. 동네 불량배들 (이들 역시 김기덕 감독이 묘사하는 진정한 악인들의 하나이다)을 향했던

화약총은 오히려 자폭하여 지흠에게 상처를 입힌다. 결국 폭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구원은 없고 상처는 공유되지 못한 채 같은 색깔로 맴돌 뿐이다.

나란히 눈에 붕대를 맨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논둑을 말없이 걷는다. 아직도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대상에 대한 물리적 가시적 소유를 통해

사랑을 확증하려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한 측면에서 <수취인불명>을 비닐로 비추어보는 도살장의 송가라고 불러도 좋을까? 예전부터 나는 왠지 김기덕의 영화들을 떠올리면

비닐이라는 심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봐도봐도 참 비닐스럽다. 은옥은 비닐하우스에 한쪽 눈을 비춘 채 “너도 나처럼 되고

싶어?”라고 소리지른다. <파란대문>에서 진아를 상징하는 여린 금붕어를 비추던 것도 비닐이었다. 그리고 혼혈과 불구, 무식함과 매춘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폭력은 결국 그들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은 동시에 증오와 패배 그리고 무기력으로

얼룩진 한쪽 눈에 비친 일그러진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비닐은 유리처럼 투명하지는 않지만 또 찢기기도 쉽지만 잘 구겨져서 세상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 비닐은 잘 썩지 않는다.

참 마지막으로 <씨네21>을 열심히 읽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을 것 같다. 왜 지독한 반 김기덕 정서를 내보이던 내가

<수취인불명>엔 별 셋 반이나 주었나 하는 질문. 어쩌면 별 하나 반과 별 셋 반은 똑같은 의미가 아닐까? 결핍은 과잉이고 과잉은

결핍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리고 그건 아마 어떤 감독도 감독의 이름이나 감독의 이름을 빌린 권력에 승차하지 않겠다는 나의 애초의 결심. 그리하여

어떤 감독과도 사적인 호오를 떠나 영화 하나하나만으로 승부하겠다는 나의 의지의 표명이기도 할 것이다.

‘너도 나처럼 되고 싶어?’ ‘너처럼 되려면 어떡해야 하니?’

언젠가는 김기덕의 작품에 아주 흉칙한 흉터와 화상이 있는 여자가 또 나올 것만 같다. 그때는 그녀의 젖가슴을 쓸어안고 그 상처를 도려내지 않더라도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려본다. 철사와 낚싯바늘과 총을 넘어, ‘너도 나처럼 되고 싶어?’는 ‘사랑 받고 싶어’의

첫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심영섭/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