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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파괴한 <삼국지> 재해석, <장정일 삼국지>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기는 했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삼국지>는 고우영 판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우영의 <삼국지>를 50번은 넘게 봤다. <삼국지>의 인물이나 사건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동탁의 거대한 배에 꽂힌 심지가, 관우와 제갈량의 라이벌 의식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른 뒤에 <창천항로>를 만났다. <창천항로>를 보며 조조와 여포 등 수많은 ‘악인’들의 다른 모습을 만났다. 고우영판 <삼국지>를 보면서 유비가 싫었고, 조조에게 마음이 끌렸던 이유를 <창천항로>를 보며 합리화시켰다. ‘원래 저자가 없었던 연의(演義) <삼국지>는 언제나 새로운 저자를 구하고 있’었고, 한·중·일 삼국에는 <삼국지>의 수많은 판본이 존재한다. 각자의 구미에 맞는, 혹은 시대정신에 맞는 <삼국지>는 언제나 필요하다.

박종화, 김광주, 김구용, 이문열, 황석영 등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이미 <삼국지>에 뛰어들었다. 거기에 장정일이 가세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하던, ‘아담이 눈뜰 때’를 그렸던 작가가 난데없이 동양의 고전인 <삼국지>에 도전했다는 사실은, 분명 눈이 가게 한다. 그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다지 새로울 것까지는 없지만, 지금까지 여타의 <삼국지>에서 하지 않았던 시도를 가능케 했다. “원어능력이 없었기에 오히려 <삼국지>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게 되었고,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에 더욱 집중”했다는 장정일의 말대로, <장정일 삼국지>는 중화주의로 점철된 <삼국지>를 재해석한다.

한문도 모르고, 남성적 서사도 싫어하는 장정일이 쓴 <삼국지>는 곳곳에 흥미로운 요소를 담고 있다. 정사에는 없었던 도원결의, 초선의 미인계, 적벽의 연환계를 담고 있는 연의 <삼국지>에 충실하면서도, 존왕충군(尊王忠君) 이데올로기와 성리학에 기초한 춘추필법은 거부한다. 장정일은 이문열의 <삼국지>가 ‘역사적 대화’를 시도한 역작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중화주의에 선민적인 역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黃巾起義)라고 부르고, 한족(漢族)의 주변부에 있었던 동이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역사들도 개입시킨다. 원소의 아들이 도움을 청하러 동이족에 가고, 남만의 맹획을 정벌하러간 제갈량의 고사를 재해석하는 장정일의 시도는 흥미롭다. 아니 통쾌하다. ‘전투로 날이 새고 지는’ 시대에서 평범한 민중이 겪는 고통을 그리고,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을 파괴한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용호상박의 싸움을 벌이는 남자들의 전 생애가 위선과 자기기만과 모략에 더하여 굴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삼국지>를 보며 비웃어 주십시오!’라는 장정일의 도발은, 이미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을지라도 장정일이 쓴 <삼국지>를 다시 한번 들춰보게 한다. [장정일 지음/ 김영사 펴냄]

김봉석/ <ME>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