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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의 정신적 진공상태에 방점을 찍다, <썸머 오브 샘>

연쇄살인마에 관한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왜 죽였는가, 원인은 무엇인가? 세인들은 흔히 정서적, 환경적 요인으로 모든 범죄행각을 설명하기도 한다. 혹자는 뇌과학의 입장에서 ‘양심의 박동음’을 들을 수 없는 이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것이 막연한 분노 탓인지 아니면 신체상의 결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프리츠 랑 감독의 <M> 이후 연쇄살인마에 관한 스릴러물은 긴 계보를 형성한다.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와 <말콤X> 등의 수작들로 사회적 발언과 작품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흑인 감독. 그가 처음으로 만든 범죄 스릴러물 <썸머 오브 샘>(이 영화는 <선 어브 샘>(Son Of Sam)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은 디스크와 펑크, 성해방의 물결이 드셌던 197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관객을 향수어린 시공간으로 몰아넣는다.

<썸머 오브 샘>은 실화가 바탕이다. 44구경의 매그넘 권총으로 젊은 데이트족을 사냥했던 한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것. 살인자는 태평스럽게 언론에 편지를 써보내기도 한다. “내 아버지 샘은 피를 마시고 싶어해. 그는 내게 명하지. 가서 죽여라!” 영화는 과대망상증 환자의 살인극을 축으로, 뉴욕 변두리를 사는 삼류인생의 희비극을 고스란히 풀어놓는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썸머 오브 샘>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흑인 배우를 한명도 기용하지 않았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백치미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미라 소비노, <로미오와 줄리엣>과 <스폰>의 악역배우 존 레기자모 등을 캐스팅한 것. 부부로 분한 이들 커플은 당시 미국사회의 흥청망청하는 분위기를 몸소 체현한다. 디스코 패션과 난교파티, 그리고 마약으로 물든 일상을 사실적으로 재연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아바에서 마빈 게이에 이르는 음악은 영화의 흥을 돋운다. 특히 실재했던 ‘플라톤의 안식처’라는 클럽의 섹스파티는 197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노골적으로 반영한다. 이상이 빈곤하고 쾌락이 만연한 풍속도다.

당연하게도, 세밀한 디테일에 가려 영화의 긴장감은 배어나지 않는다. 감독의 근작 <브루클린의 아이들> <버스를 타라>에 비하면 이야기의 아기자기함이나 독창성 면에서도 힘이 달린다. 연쇄살인마가 나온다고 해서 <쎄븐> 같은 영화와 비교하려 든다면 오산. ‘샘의 아들’을 자처하는 한 범죄자의 발자취와 브롱크스 주민들의 집단행동은 그리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한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스릴러의 오싹함을 강조하는 대신, 당시 미국인들의 정신적 진공상태에 방점을 찍는다. 이발사 비니는 펑크와 성해방의 물결에 몸을 맡긴 건달 리치를 범인로 지목한다. 물론 리치는 무고하다. 마약에 찌든 비니 일행이 리치에게 혐의를 씌우고 단죄하는 장면은 빠른 리듬의 위압적인 편집으로 구성돼 이 영화의 정점을 이룬다. 또한 <썸머 오브 샘>의 주제를 간명하게 요약한다. 분노와 공포를 잠시 접기 위해, 세인들은 ‘희생양’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다고. 여기서 <썸머 오브 샘>은 스파이크 리의 출세작이었던 <똑바로 살아라>와 절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전작에선 인종간의 문제였지만, 이번엔 (펑크와 양성애 등의) 문화적이고 이단적인 요소로 축이 슬쩍 이동했을 뿐이다.

해외 평단에서 <썸머 오브 샘>은 “스파이크 리는 자신의 영화세계를 한치 넓혔다. 그의 영화 중 가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택시 드라이버>를 의식한 평과 “영화의 교훈은 단 한 가지, 펑크족도 사람이라는 거다”라는 힐난을 동시에 들었다. <썸머 오브 샘>은 스릴러의 문법을 구축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비주류’ 흑인 감독의 입장에서 베트남전 직후 어수선함과 광폭함에 휩싸인 당시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살려낸 점은 칭찬할 만하다. 원래 상영시간이 136분에 육박하는 대작이지만, 국내에선 많은 장면이 압축되거나 삭제된 채 상영되는 불운한 영화이기도 하다.

실화 vs 영화

1976 뉴욕, 죽은 자와 죽이는 자

‘샘의 아들’은 1970년대 미국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건이다. 카섹스를 벌이는 젊은 연인들, 그 중에서 갈색 머리의 백인 미녀만을 권총으로 살해했던 것. ‘샘의 아들’(미국에서 ‘샘’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일컫는 애칭이다)을 자처하는 범죄자는 경찰과 언론사에 살인 예고편지를 보내는 뻔뻔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1976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2명의 여성이 피습당한 것을 시작으로, 이 사건은 1년여의 시간을 끌며 당시 뉴욕 시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샘의 아들’은 심지어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지 딱 1년이 되는 날 다시 살인을 저지르겠노라고 공언해 경찰을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는데 우습게도 이날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1977년 8월에 검거된 데이비드 버코비츠는 자신이 ‘샘의 아들’임을 자백했으며 현재 코렉셔널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다.

당시 뉴욕시에 거주했던 스파이크 리 감독은 ‘샘의 아들’ 사건을 꼭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발을 산다. 유족들이 영화화 계획을 접한 뒤 강하게 반대한 것. 영화를 기획하면서 스파이크 리는 유족들의 강한 항의를 받아야 했으며 살인마 버코비츠의 첫 희생자였던 도나라는 여성의 부친은 감독에게 이 영화를 포기해달라며 캐스팅을 저지하기도 했다. <썸머 오브 샘>의 제작 소식을 들은 살인자 데이비드 버코비츠는 “단지 돈을 벌고 싶어하는 영화인들의 술수”라는 반응을 보였고 스파이크 리는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죽은 자녀들이 돌아오겠는가?”라며 영화제작을 강행했다. <썸머 오브 샘>의 제작 스탭들은 70년대에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배우 미라 소비노는 뉴욕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현지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를 직접 배우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스파이크 리 감독이 데이비드 버코비츠의 검거 현장을 생중계하는 TV 리포터로 깜짝 출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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