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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려는 김기덕 감독의 다짐, <활>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김기덕의 열두 번째 영화 <>을 보았다.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은 마지막 자막에 있다. 물론 김기덕이 마지막에 자막을 처음 쓴 것은 아니다. 이미 <해안선>부터 그는 무언가 영화가 끝난 다음 거기에 서명을 넣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 말은 “팽팽함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죽을 때까지 팽팽한 활처럼 살고 싶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빈 집>의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가 읽었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혹은 <해안선>의 마지막에 쓰여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합니다”와 같은 호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성어나 경구 혹은 테마나 주제, 아무리 양보해도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김기덕이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읽힌)다.

우리를 증인으로 내세운 고통스런 자작극

그는 여기서 무언가 자기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재귀(再歸)의 영화 혹은 재귀대명사로서의 김기덕.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서 시작한 다음, 거기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내내 거기 머물다가, 결국 배를 떠나면서, 심지어 그런 다음 그 배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면서, 김기덕은 무언가 다짐을 한다. 활은 하늘로 쏘아올려진 다음 다시 돌아온다. 그건 바다에 던져져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병을 던지려는 시도가 아니다. 차리리 <>은 정확하게 그 정반대의 시도이다. 여기에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이면계약서 대신 차라리 부메랑처럼 메시지를 보내고 스스로 보충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인데도 불구하고 증인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김기덕은 이 말을 자신의 일기에 쓰는 대신 영화의 마지막에 우리를 향해서 보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은 우리를 증인으로 내세워 그 자신을 위해서 상연하는 고통스러운 자작극이다. <>은 기본적으로 비극적이지만, 근본적으로 화해의 제스처이다. 같은 말이지만 이 이야기가 결국에는 욕망의 좌절로 끝나지만, 이 이야기의 욕망은, 혹은 이 이야기가 그러니까 결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 좌절의 이야기를 우리가 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의 시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긍정해달라는 요구이다. 그 안에서 김기덕이 비극을 화해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증인으로 내세워진 이들이 자신의 친구들인 것은 중요하다. 김기덕은 자신의 다짐을 맹세하는 자리에 적을 초대할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 <>을 위해서 시사회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 능동성이다. 그는 이 수줍은 맹세를 몇명의 친구들 앞에서, 우정의 뜻으로, 자기 자신을 새로운 힘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자본주의의 최대의 실천!) 정해진 단 하나의 영화관에 자기의 영화를 찾아온 그 우정의 의지 앞에서만, 기쁘게 다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을 보는 내내 이 열두 번째 영화가 열한편의 김기덕 영화들의 컴필레이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영화들을 여기저기서 발췌하듯이 반복하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반복이다. <>의 첫 시작은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이다. 활로 켜는 자장가가 우리를 바다 위에 뜬 배로 인도한다. 자장가는 잠을 청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이다. 그 자장가는 영화를 보는 우리를 위해서 연주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기덕이라는 꿈을 꾸어야 한다. 그 꿈에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물 위에 떠 있는 배에서 노인과 소녀는 단 한번도 뭍으로 나가지 않고(<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하 <봄…그리고 봄>의 호수 위에 떠 있는 절) 살아간다(혹은 <파란 대문> <나쁜 남자>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바다).

그 배에는 탱화가 그려져 있고(<봄…그리고 봄>), 절반쯤 찢어진 태극기가 걸려 있다(<야생동물 보호구역>). 그들은 이 배에 와서 낚시하는 사람들에게 낚시터로 배를 제공하면서 먹고산다(<섬>에서의 낚시터). 매번 이 배에 탄 낚시꾼 사내들 중의 누군가는 소녀를 건드리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노인은 활을 꺼내든다(<수취인불명>의 지흠). 그러나 그 활은 동시에 노인이 켜는 악기이기도 하다. 그 활을 소녀도 악기로 켜거나 자신과 노인을 지키기 위해 쏜다(영화를 함께 본 허문영씨는 제목이 ‘활’인데 활의 내력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는데,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이 영화는 끝내 그 활의 내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활은 소녀가 배에 매달린 그네를 타면 노인이 그 뒤에 걸려 있는 탱화를 쏘면서 점괘의 예언을 말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노인과 소녀는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점괘를 전할 때에만 귓속말로 이야기하지만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우리를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빈 집>의 여자와 소년). 노인은 낚시꾼들의 말에 의하면 소녀를 7살에 데리고 와서 10년 동안 키웠으며, 이제 그녀가 17살이 되는 5월12일에 결혼할 것이라고 한다. 그건 정말이다. 달력에는 5월12일에 ‘結婚’이라고 쓰여 있으며, 그날을 위해 노인은 한껏 준비한다.

노인의 결혼식을 5월12일로 정한 까닭은?

영화는 2005년 2월16일에 시작해서 (그런 다음 노인 마음대로 달력을 찢어버리고 나서 그가 정한 날짜인) 5월12일에 끝난다. 5월12일은 세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개봉일이고, 다른 하나는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보여진 날이고(그러므로 사후적인 우연의 결정인 그 둘은 별 의미가 없지만), 세 번째는 이 영화가 김기덕의 열두 번째 영화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한 가지 더. 올해는 김기덕이 영화를 만든 지 10년째 되는 해이다. 그런데 이 배를 우연히 찾아온 소년이 다시 뭍으로 가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섬>와 <봄…그리고 봄>의 변주) 노인은 소녀를 유괴한 다음 배에 감금하여(<나쁜 남자>의 한기와 선화) 키운 것이다. 소녀는 낚싯바늘을 엮어 만든 실을 입에 문 다음(<섬>,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냥) 실을 퉁겨서 악기처럼 소리를 낸다. 혹은 소녀는 소년이 준 엠피3 카세트로 음악을 함께 들은 다음 소년이 떠나가자 그걸 혼자 듣는다(<사마리아>, 그런데 여기서는 살아남은 여진 대신 자살한 재영이 나온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더 들 수 있다. 반복은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그 반복을 통해서 <>은 일관성을 부여받는다. 그 일관성 안에서 활은 화살을 날리는 무기가 되고, 혹은 연주하는 악기가 되고, 때로는 활 점을 치는 예언의 언어가 된다.

여기서 활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한 맥거핀(이거나 또는 발췌한 대목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고정점)이다. 활이 보는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유혹하지만 그 활이 그 무언가를 상징하지는 않는다(어쩌면 그것이 활에 대한 내력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맥거핀을 놓고 늘어놓을 수 있는 가장 지루한 해석은 활을 남근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남자들에게서 소녀를 보호하는 (수컷의) 무기가 되고, 자기가 외롭게 활을 악기로 켜는 것이 자위행위로 읽히는 것은, 소녀가 활을 집어드는 순간 난처해진다. 그러나 더 난처해지는 것은 김기덕이 활의 연주와 이 영화의 음악 싱크를 전혀 맞추지 않고 매번 활로 연주하는 순간 마치 장면의 행위와 분리된 배경처럼 음악을 흘려보낼 때이다. 그렇게 읽으려 들 때 이 남근은 그 아쿠마스틱한 의미가 매번 사정의 순간을 서둘러 찾은 조루이거나, 혹은 결국 사정에 실패한 지루처럼 들린다. 혹은 매번 소녀를 맞추지 못함으로써 예언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노인의 활 점은 또 무엇인가? 그 활을 남근으로 이해하려고 들 때 <>은 사실상 김기덕의 의도와 거의 반대 방향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활을 남근으로 읽으려 할 때 정작 김기덕이 죽이려고 하는 대상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노인(-아버지의 이름-nom de Pere)이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대상(-아버지의 부정-non de Pere)이 되는 이야기이다. 존재로부터 대상에로의 이행,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아버지. 이것이 이 이야기의 ‘욕망의 비극성’이자 이 ‘이야기의 욕망’이다(방점은 괄호에 있다). 여기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다시 살려내려는 것은 해석의 외설성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소녀의 남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하게 보인다. 김기덕은 롤리타에 이끌린 적이 없다. 노인이 소녀와 결혼하려는 이 엉뚱한 노력을 시작하자마자 알려주는 그 친절한 노력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노인과 소녀가 등장하면 낚시꾼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그의 동료에게 노인의 소망을 설명해준다). 김기덕은 (아버지의 아버지와 같은) 노인이 (딸의 딸과 같은) 소녀에게 성적 욕망을 품을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보는 우리와 게임을 벌일 생각이 없다. 두 사람은 늙은 신랑과 어린 신부로 시작한다. 결국 모든 비극이 그런 것처럼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패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우리는 그 실패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보기만 하면 된다. 이건 처음부터 비극을 향해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는 이야기이다. 다만 활의 목표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오직 그것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긴장이다. 김기덕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이 이 영화의 “팽팽함”이다.

오직 바다만이 유일한 실재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차라리 활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이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그저 거기에 있는 장소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바다는 커다란 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그 배에 살고 있는 노인과 소녀라는 거의 비정상적이거나 비일상적인, 혹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 설정에서 오직 바다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대상이 되어 죽었을 때, 소멸되었을 때, 부정되었을 때, 이 환상에 침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커다란 물이 거기서 어떤 심연처럼 배를 집어삼킨다. 마치 허기진 것처럼 그 배를 먹어치운다. 그런 다음 다시 고요해진다. 구름도 없는 하늘과 파도가 없는 바다(오직 단 한번의 비바람에 의한 출렁거림이 있지만 그 장면이 밤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그 평면적 공간은 모든 이미지의 제로이다. 제로의 실재. 김기덕이 점점 더 침묵에 빠져들면서(<나쁜 남자>에서 <봄…그리고 봄>을 거쳐서 <사마리아>와 <빈 집>에 이르는 화면의 벙어리 효과) 이미지에 매달린 것을 생각할 때 이 평면의 제로 공간 위에 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미학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이 내게 신기하게 보인 가장 큰 이유는 김기덕이 모든 이미지를 버리고 좁은 배 안에서 (이제까지의 그 자신의 영화에서의) 행위(의 반복)에 집중하기 위해서 바다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종종 김기덕이 만들어낸 명상하는 듯한 이미지가 없다. 다만 행위(의 반복)만이 있다. 그 행위에 대해서 바다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바다는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상황의 절대성이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실재의 공허. 혹은 이 영화에서 공허 위에 세워진 설정을 채우기 위해서 왜 발췌라는 반복이 중요해졌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기덕은 여기서 이제까지 자기가 보여준 것을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반복을 다한 끝에 노인은 그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다. 그런데 (김기덕의 다른 영화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다른 반복과 달리 노인의 죽음은 (<> 안에서) 자살의 몸짓을 한번 연출한 다음 정말 자살한다. 물론 반복과 죽음이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반복이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선택 중에서 반복을 택할 때 그것은 근본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첫 번째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은 그것의 긍정이지만, 같은 것을 두 번째 선택할 때 그것은 같은 것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과정을 꼼꼼하게 다시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은 처음에는 그 균형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소년과 함께 떠나려고 할 때, 이미 점괘는 소년과 함께 떠나야 한다는 예언을 한 다음, 노인은 떠나가는 배에 매달린 줄을 자기 목에 걸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생각으로 떠나가는 배를 본다. 그런 다음 배가 떠나가고, 자기 목에 걸린 그 줄이 “팽팽하게” 노인의 목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노인은 허둥지둥 더듬거리면서 칼을 찾아 그 줄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그 장면은 물론 <악어>의 용패가 보여준 그 마지막 장면의 반복이다.

나는 사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그 자신의 첫 번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반복. 이 발췌의 반복에 어울리는 결말. 그런데 좀 놀랍게도 그걸 알고 소녀는 배를 돌려 노인이 남겨진 배로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갑자기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난 다음 김기덕은 길고 느리게 노인과 소녀의 혼례장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은 이 장면의 앞과 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지만 노인이 소녀의 떠나가는 배에 목을 매다는 순간 반복은 끝나고 사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지루하지만 동시에 <>에서 정말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늦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반복의 중단과 새로운 기회의 프로젝트.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인과 소녀 사이의 중재자로 등장한 소년이 문제가 된다.

김기덕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등장인물, 소년

이 소년은 (내가 알기로) 김기덕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이상한 등장인물이다. 소녀에게는 소년을 위한 자리가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이 배를 찾아온 세 번째 손님들 중에 이 소년이 배에 올라타는 순간 이미 소년은 소녀의 구원자이다. 소녀에게 등록된 소년, 혹은 그 역. 그러나 소녀에게서 노인의 자리가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그 자리가 처음부터 단지 하나의 자리였다면, 그래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대상이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는 무엇인가? <>은 김기덕의 영화 중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영화이다. 소년은 말하지 않는 (혹은 그들끼리만 귓속말을 하는) 노인과 소녀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 쉴 사이 없이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너무나 계몽적이어서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 말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생각하고 있는 외설스러운 상황에 대한 외재화이다. 혹은 그렇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소년은 이 영화의 유일한 화자이지만 소년과 노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애를 쓰다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외설스러운 상상에 지나치게 다가간다. 그래서 소년이 우리의 윤리를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소년은 우리의 상상에 적대적이 되어간다. 그 말은 이 소년이야말로 <>에서 유일한 얼룩이라는 뜻이다. 소년이 반사하는 것은 노인과 소녀의 관계가 아니라 정확하게 영화를 보는 우리이다. 그러므로 소년이라는 거울은 자기의 대상을 영화 안에서 찾지 못하는 텅 빈 거울이다. 소년의 행위가 진지해질수록 점점 더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서려는 노력의 무기력함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상황은 헤드폰에서 음악을 들을 때 벌어진다. 소녀는 소년이 주고 간 헤드폰만으로도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헤드폰으로 소녀가 듣는 것은 뭍의 음악이 아니라 노인이 연주했던 그 선율이다. 기계적인 해석. 소녀가 이제까지 들었던 음악은 노인의 연주였으므로 MP3 없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선율이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반론. 그렇다면 소녀가 소년과 MP3를 함께 들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 이상한 상황은 왜 소년의 헤드폰으로 소녀는 노인의 선율을 떠올리겠는가, 라는 데 있다. 여기서 음악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선율의 주인에 대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동일시가 아니다. 그런 다음 소년의 자리와 노인의 자리 사이의 내기가 벌어진다. 소년은 계속 말하고 노인은 그 말을 계속 듣는다. 소년은 쉴 사이 없이 질문하고, 비밀을 밝히고, 그런 다음 요구한다. 사실 소년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그것은 윤리적 의무이다. 그러므로 소년의 질문에 대해서, 폭로에 대해서, 요구에 대해서 노인은 단 한번의 대답, 단 한번의 부정, 단 한번의 거절도 하지 못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소년은 소녀를 태우고 이 배를 떠난다, 라고 말해야 한다. 노인은 거기서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내기는 노인의 패배와 소년의 승리로 끝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대신한 소년의 질문이, 폭로가, 요구가 무슨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설혹 정념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라는 따분한 결론일지라도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끝나야 하는 대목에서 이야기는 지연되고, 다시 시작한다. 떠나가는 배를 붙들려는 노인의 자살적 몸짓이 불가능으로 끝나야 할 혼례의 실패를 성공의 지연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러니까 배를 멈춰 세운 다음, 그래서 소녀가 다시 배로 돌아온 다음, 갑자기 혼례가 시작될 때, 소년이 더이상 이 행위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그것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말이지만 배로 돌아오고 난 다음 소년은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 숏의 벙어리 효과, 혹은 귓속말의 동맹. 소녀를 놓고 노인과 (우리를 대신 한) 소년 사이에 벌어진 내기는 갑자기 중단된다. 더 간단하게 배에서 떠나가려는 대목까지와 그런 다음 돌아와서 혼례를 시작하는 대목부터는 서로 다른 두편의 영화이다. 혹은 두명의 소년이 있다. 영화 안에 있던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이제 부정하고, 질문하고, 요구하는 소년은 더이상 우리를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자가 아니다. 그 반대로 소년은 긍정하고,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이중의 긍정) 증인의 자격으로 남는다. 소년은 더이상 우리를 대신해서 노인에게 말하지 않는다. 김기덕은 정념에서 윤리에로의 이행을 거꾸로 세운다.

노인이 소녀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노인과 소녀의 혼례에 초대받은 유일한 손님인 두 마리의 닭 중에서 암탉의 머리를 소년이 때리는 장면으로 반복될 때,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분열되었던 소리의 주인으로부터 그 자리의 전이이다. 거기에는 소녀를 매개로 한 노인과 소년 사이의 긍정, 혹은 화해의 제스처가 있다. 노인은 혼례를 마치고 소녀를 향해 쏘려던 활시위를 멈춘 다음 하늘 높이 활을 쏘아올리고, 그런 다음 바다에 뛰어든다. 소녀가 탄 작은 배는 마치 홀린 듯이 소년의 배로 끌려온다.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소년의 눈앞에서 하늘 높이 날아간 활은 작은 배에 탄 소녀의 다리 사이에 꽂힌다. 섹스와 처녀막, 혹은 오르가슴과 순결한 피.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하늘로 쏘아올려진 그 활이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혹은 하나의 원을 그리지 못하고, 그래서 소녀의 그 자리에서 멈출 때, 그 활의 운동이 완료되는 것을 방해할 때, 그 활이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멈출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자리, 증인의 자리에 소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노인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소녀가 섹스라기보다는 차라리 출산에 가까운 몸짓으로 이 완성되지 않은 활의 운동을 완료시키려 들 때, 소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여기에는 죽음에 대한 슬픔 대신 노인으로부터 소년에로의 전이, 차라리 부활이라고 부르고 싶은 긍정이 있다. 이 긍정은 정념으로부터 윤리에로, 바다로부터 뭍으로, 추상적인 저 텅 빈 평면의 제로 공간으로부터 온갖 삼라만상의 세상에로 나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말 그대로의 다시 한번이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몸짓을 여기 다시 한번 텅 빈 바다 위의 무대 위에 올리고 거기서 두번의 자살을 반복한다.

김기덕의 끈질기게 반복된 주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이 간절한 열망. 그 과정을 통해서 죽기를 원하고,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려는 부정과 긍정의 놀이. 그에게 무겁고 추레하게 여겨진 그 육신의 겉옷이 여기서 늙고 지쳤을 때 그 앞에 나타난 소년에게 기꺼이 그 자리를 내주는 깨달음의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김기덕은 다시 한번 부활의 테마를 반복한다. 그는 허물을 벗고, 또 다시 벗는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대신 차라리 육신을 맞바꾸는 쪽을 택한다. 노인은 소년이고, 소년은 노인이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이 약속이 노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그는 기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고, 저 하늘 위의 정오를 가리키는 활은 다시 되돌아와 소녀의 그 자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비없이, 마치 마리아에게 주어진 기회처럼, 노인은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소년은 노인이 아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노인은 소년이 아니다. 이 말은 역설이 아니다. 더 나은 인간으로, 더 훌륭한 인간으로, 더 긍정적인 인간으로, 더 윤리적인 인간으로, 더 죄없는 인간으로, 더 많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을 긍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출산을 약속하는 처녀의 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 그러므로 소년은 증인이자, 동시에 다시 태어난, 새로운 인간이다. 혹은 김기덕의 다짐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인간은 더 많은 부채 위에서 더 많은 약속,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맹세를 해야 한다.

이제 소년, 소녀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비로소 (혹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여기서 발췌의 반복이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 더도 덜도 없이 노인은 나이 든 용패(<악어>), 혹은 현식(<섬>), 늙어버린 지흠(<수취인불명>), 지쳐버린 한기(<나쁜 남자>)의 그 누군가이다(여기에 더 많은 이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김기덕의 몫이다). 혹은 그 모두이다. 그 노인에게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청하게 할 때,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그래서 결국 유령연습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유령과 싸우는 <해안선>, 하지만 무엇보다도 <빈 집> ‘이후’), 그 자리에 구원의 약속으로 소년을 불러낸 다음, 그에게 기꺼이 그 다음을 맡긴다. 그것은 부채를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소망, 혹은 다시 시작하려는 다짐이 있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에서 읽은 다짐에서 그 소망을 본다. 김기덕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우리에게 다짐한다. 좀더 유머를 가질 수 있다면 <>은 <사마리아>의 소년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 소년, 소녀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운전을 가르쳐주었고(<사마리아>), 소년은 노인으로부터 소녀를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이제부터 이 소년, 소녀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아야 한다. 소년, 소녀들의 신세기. 혹은 세상 안으로의 악순환의 반복. 소년, 소녀들은 다시 한번 지옥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그 안에서 소녀는 아버지 없이 세상 안으로 운전해야 한다. 혹은 소년은 노인의 도움없이 소녀를 돌보아야 한다. 이제 소년이 노인에게 질문했던, 폭로했던, 요구했던 그 모든 말은 고스란히 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디니. 혹은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두번의 간절한 거듭된 부름. 그리고 질문. 여기에 대한 침묵. 예루살렘의 저 오래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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