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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추억의 국적성, 고통의 계급성

맷돌춤이라도 배워둘걸. “돈 차 위쉬 유어 걸 프렌드 워즈 핫∼ 핫∼”(Don’t cha wish your girl friend was hot∼). 휴대폰 광고에 나오는 그 노래, <돈 차>가 댄스 플로어를 달구고 있었다. 역시 플로어는 좁았고, 댄서들은 넘쳤다. 미모 한류를 일으키지는 못할지언정 자라목이라도 멋지게 돌려서 춤바람 한류를 일으켰어야 하는 건데. 주위 눈치를 보면서 슬쩍 흉내내다 어림도 없어서 혼자 피식 웃는다. 홍콩갔다 방콕하고 있다. 타이의 새해, 쏭크란을 맞아 푸미폰 국왕께 새배하러 왔다.

방콕은 내게 ‘생활의 중심’이다. 방콕 생활의 중심은 클럽 생활. 방콕에 오면 같은 클럽에만 간다. 거기서 자주 ‘플레이’되던 음악은 추억의 노래가 됐다. 대중가요의 다른 이름은 유행가 아니던가. 흘러간 유행가를 들으면 그 시절 그분들이 떠올라서 콧등이 시큰해지게 마련이다. 나의 방콕 유흥가 데뷔 시절의 ‘주제가’는 로열 지골로스(Royal Gigolos)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리믹스. 신시사이저의 쿵쿵대는 리듬에 맞춰 “고 고∼ 댄스!”라는 전주만 나와도 가슴이 쿵쿵 뛰면서 발걸음이 클럽으로 향한다. 서너 번째 방콕에 와서 이 노래가 나오면 어찌나 애절하고 아련한지 눈물이 핑 돌아 스스로 당황했다. 네다섯 번째 방콕에서는 푸시캣 돌스(Pussycat Dolls)가 “I know like∼ me” 하면서 <돈 차>를 시작하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올 초부터는 마돈나의 선창에 맞춰 댄서 일동은 “소리∼ 소리∼” 하기 바쁘다. 텍스트를 알아야 즐거움도 커지는 법. 방콕 클럽 앞의 ‘구루마’는 유흥의 예습, 복습을 권장한다. 구루마의 주인장은 클럽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를 모아서 모음집을 손수 만드셨다. 이렇게 구루마에서 파는 야메 CD를 사서 한국에서도 예습, 복습하면서 다음의 방콕을 예비한다.

“바운스∼ 바운스∼ 바운 위드 미∼.” DJ DOC 오빠들은 나의 세 번째 고향, 타이베이 향수를 자극한다. 타이베이에서도 가는 클럽에만 간다. 내가 가는 한국의 클럽에서는 절대 한국 음악을 들을 수 없지만, 타이베이 클럽에서는 한국 가요가 플로어를 달군다. 중국분들은 어찌나 자긍심이 강하신지, 클럽에서도 한 시간 동안 자기 나라 음악을 트는데, 대여섯곡 중 한곡은 대만 가수가 리메이크한 한국 가요다. DJ DOC의 <런 투 유>는 고정 레퍼토리, 코요테는 단골 뮤지션이다. 그리하여 서울 거리에서 “바운스∼ 바운스∼”가 흘러나오면 타이베이 드리밍에 젖어든다. 음악이 시도때도 없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면, 영화는 드물지만 생생하게 추억을 재현한다. 차이밍량의 <거기 몇시니?>에는 타이베이역 부근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부산역 주변보다 거리 풍경이 살갑게 느껴졌다. 나의 여관과 클럽은 타이베이역 부근에 있다.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시티즌 독>에는 나의 방콕 주무대인 실롬 거리가 자주 나왔는데, 화면에서 훅 끼치는 더위마저 그리워했던 그곳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PC방 옆 이발소의 TV에서는 <대장금>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한류가 식기 전에 나를 팔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아세아를 주유한다. 서울에서 못 팔면 홍콩, 타이베이, 방콕에서 팔면 된다는 신념으로 뜨거웠던 시절도 있었다. 4천만 동포가 외면해도, 12억 중국 인민이 있다는 희망에 들떴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 나의 슬로건은 ‘애정의 대동아 공영권 만세!’ 조금씩 지쳐가지만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음악을 타고 흐르는 추억은 남았으니까.

홍콩의 숙소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가정집에 딸린 방 세개에 투숙객을 받는 민박 비슷한 곳이었다. 집주인 할머니를 도와서 밥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국어 말투가 어쩐지 낯설었다. 혹시 탈북자? “강원도에서 왔냐”고 떠보았다. 중국 동포란다. 25년 은행근무를 하다가 개혁개방이 되면서 정리해고됐단다. 친구들과 광저우, 선천으로 놀러왔다가 홍콩까지 흘러왔단다. 말하지 않아도 아주머니의 다른 이름은 불법체류자였다. “한국에 간절하게 (돈벌러) 가고 싶다”는 아주머니는 그렇게 하루종일 집안에 갇혀 살았다. 아주머니의 사연을 들으면서 서울이 고통스럽다고, 아시아로 팔러다니는 짓도 힘들다고 투덜거리던 내가 한없이 철없어졌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여권이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희망이었다. 대한민국 여권을 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그렇게 고통에도 계급은 있고, 국적은 있다. 그날 아주머니가 나서지 못하는 홍콩 거리에는 홍콩영화제가 한창이었다. 영화제의 슬로건은 ‘Films without boundaries, World without strangers’. 번역하면 ‘경계없는 영화, 이방인 없는 세계’쯤 되겠지. 어디 홍콩뿐이랴. 저기 방콕의 공원에도 라오스 밀입국자와 미얀마 난민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밤이슬을 맞고 있겠지. 그들에게 홍콩은, 방콕은 무엇으로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