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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개성없는 거리는 슬프다
권리(소설가) 2006-06-02

홍익대 주변을 배회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홍대 앞은 언젠가부터 쿨함을 강요한다고. 약간 어슷하게 쓴 모자나 스카프, 치렁치렁한 목걸이와 스타일리시한 구두 혹은 어깨가 드러나는 끈없는 티셔츠. 이중 하나라도 착용하지 않으면 왠지 ‘젊은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느낌이 든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벼룩시장에 가서 기웃거리기는 민망하기보다 괴롭다. 누군가가 뒤에서 내게 용감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비호감 패션을 한 채 감히 홍대 앞을 돌아다니는가요?

나처럼 길거리 패션에 뽑힌 적도 없고, ‘옷 너무 예쁘다’란 말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홍대 앞이란 괴롭기 짝이 없는 길이다. 일본의 패션거리 다이칸야마나 하라주쿠, 가깝게는 로데오 거리나 뜨고 있는 청담동 앞을 걷는 것만큼이나 괴롭다. 이들 화려한 거리를 걷는 자들이란, 일주일에 한번은 부티크에 들러 드레스를 고르고 네일아트숍이나 미용실에서 언니처럼 지내는 ‘선생님’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편견 탓이었다. 홍대는 그런 의미에서 이중성을 지닌 동네다.

젊은이의 해방구, 자유와 인디 음악과 클럽의 거리… 란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실상 그 젊은이들에 가난뱅이는 포함되지 않는다. 나처럼 머리도 잘 빗지 않고 ‘겨우 맥주 한병과 입장료에 1만원은 너무 비싸’라고 투덜대는 인간에게 자유의 거리 홍대는 절대 부자유 지대로 느껴진다. 그나마 한달을 기다려 클럽 데이에 홍대를 찾으면 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낸 화려한 패션 여왕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여왕개미 틈 사이에 낀 일개미가 갈 곳이라곤 고작 뒷골목의 이모집이나 허름한 오뎅바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쿨한 홍대 앞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홍대 앞을 사랑한다(원래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된다고 하지 않는가?). 서점 하나 없이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에 밀린 이화여대 앞처럼 불쌍해 보이지도 않고(이대 앞은 이대 주변에 상가가 있다기보단, 상권에 대학이 어렵사리 끼어 있단 느낌마저 든다), 주택가 같은 서강대 앞처럼 개성이 없지도 않고, 연·고대나 건대, 성균관대 앞처럼 유흥가와 대학간 경계 모호 지대도 아니니까 말이다. 적어도 홍대 앞에는 오래된 CD를 파는 가게와 신인 록밴드가 정기 연주를 할 수 있는 클럽, 마음껏 낙서해도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담벼락이 있다. ‘홍익 미술학원’이란 별명은 사실 홍대 앞 개성에 대한 조롱 섞인 부러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노는 개성이 없는 거리는 왠지 슬퍼 보인다. 가끔 대학가를 걷는 학생들을 보며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저 학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국 명문대 앞을 활보하는 꿈을 꾸며 토플 점수 올리는 법을 고민하고 있을까, 아니면 취업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한번이라도 자신들이 학교 앞의 거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까. 학교를 나선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기껏해야 만화방, 비디오방, 노래방, 당구장 등 극히 폐쇄되고 억압된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학가에 유행하는 학교 담장 허물기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우선 대학과 지역간의 높은 친밀도가 그 대학의 새로운 매력이자 개성이 될 수 있다. 대학이 관철해오던 오만함이 희석되고 다양한 교육의 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거창하게 ‘문호개방’이라고도 할 만하다. 대학의 개방이 대학가의 개방으로 이어져, 대학축제가 ‘지역의 축제’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는 이대 앞 여성의 거리든, 서울대 앞 헌책방 거리든, 서울예대 앞 연극의 거리든, 개성 빵빵한 대학의 거리들이 ‘발견’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비호감 패션으로도 얼마든지 내 맘대로 걸었으면 좋겠다. 걷고 싶은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거리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쏜살같이 거리로 나선다. 나는 제2의 홍대 앞을 열망하는 거리의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