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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2001-09-06

외국어 공부, 절대로 해야 한다고 외치는 외국어학원 광고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책 제목이 있었고 그런 광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바보가 있겠는가? ‘이 책에서 지시하는 방법이 아니라면…’, ‘시시하게 공부할 바에야 차라리…’등의 전제를 숨기고 있는 엉큼한 반어법이라는 것쯤은 책갈피를 들추지 않더라도 눈치챌 일이다. 문제의 책은 히트를 했다. 숱한 외국어 학습 상품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광고들을 흩뿌렸지만 유독 그 책광고가 빛을 낸 이유는 뭐였을까?

그 책의 호기로움이 제목에만 그쳤다면 요란한 찬사들은 말잔치로 끝났을 것이다. 광고만 그럴 듯했다면 속아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이 책 절대 사지 마라”는 입소문 내기에 열을 올렸을 테다. 누군가는 ‘일본은 없다’류의 도발적인 제목이 영어교육에 한이 맺힌 한국인들에게 ‘필이 꽂혔다’는 점을 성공요인으로 꼽고 있다. 믿음을 잃은 지 오래된 학교교육에 정면으로 도전한 과감한 어학 학습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저자의 주장은 영어를 모국어 배우듯 몸에 붙여야지 한국어로 일일이 옮겨가며 ‘공부’하려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외국어 번역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는 공감이 간다. 치가 떨리는 혹세무민은 극장에서 자주 일어난다. 기껏 기대하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저질 자막이나 더빙멘트가 저지르는 배신감이란? 도무지 관객을 뭘로 생각하고 그딴 번역을 해대는 건지?

온 가족이 큰맘 먹고 <슈렉>을 보러 가서도 심사가 편치 않았다. 아이들의 정서에 도무지 맞지 않는 비속어를 서슴지 않는 후안무치한 더빙. 방귀소리, 트림소리,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우스개로 아이들의 귀를 간지르는 유치뽕짝. 정작 폭소가 터져야 할 대목에선 썰렁하다가 ‘턱도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깔깔거려댔다. 번역은 반역이라더니, 대부분의 선량한 아이들은 알 권리에 대한 중대한 반역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외국어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해야 한다니까!

<인생은 아름다워>는 반역의 극치였다. 별 수 없이 화면 오른쪽을 아래 위로 훑으면서 억울해서라도 이탈리어어를 배우고 말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의 한 장면에서 실로 아름다운 반역을 목격하고 말았다. 수용소 생활수칙을 설명하는 독일군 장교의 연설을 아들에게 옮기는 아버지 귀도의 거짓 번역은 그야말로 상식에 대한 눈물겨운 반역이었다. 수용소 생활은 뽑힌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고 또 각종 규칙에 따라 1천점을 따면 탱크를 상으로 받는 게임이라고 둘러대는 놀라운 위트, 착한 상상력…. 우리 삶의 한 대목에서 이토록 멋진 통역사를 만날 수 있다면, 그 거짓 번역으로 하여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외치고 싶다. “외국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러나 광고는 딴판으로 외쳐대고 있다. 외국어 공부, 절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몇해 전 칸광고제에서 참관기자단은 이런 CF를 최우수작품상(Journalists Award)으로 뽑았다. 온 가족이 자가용을 타고 떠나는 즐거운 가족나들이.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I Wanna Fucking’이라는 저질스런 노래가사가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점잖게 생긴 어른이나 얌전하게 보이는 아이 할 것 없이 그 가사의 내용을 짐작도 못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운전대를 두드려대는 아버지,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는 어머니와 아이들. 떠들썩한 소동이 지난 다음 슬그머니 자막이 뜬다. “지금 바로 영어를 배우세요.” 이래도 외국어를 안 배우겠느냐는 꼬드김이 일품이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광고를 올해에도 감상하는 행운이 생겼다. 2001 클리오광고제에서 입상한 ‘아비스타 외국어학원’(Avista Language School)의 CF이다.

어항에서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와 느릿느릿한 음악이 도입부를 장식한다. 갑자기 음악이 빨라지더니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금붕어를 째려보고 입맛을 쫙쫙 다신다. 물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한입에 삼키기 직전,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위기에 몰린 금붕어가 느닷없이 ‘으흥’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게 아닌가? 난데없는 맹수 소리에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는 고양이. 다시 잔잔한 배경음악으로 바뀌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붕어는 유유히 떠다닌다. 자막이 능청을 떤다. “외국어를 배웁시다. 아비스타 외국어학원.”

외국어 하나 딴딴하게 배워두면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정글이나 마찬가지다. ‘젖떼면 바로 헤드폰을 쓰라’, ‘세살 적 영어, 무덤까지 간다’, ‘영어 하나 잘하면 평생 밥그릇은 찬다’ 같은 얘기라도 그걸 말로 하면 전혀 씨알이 안 먹힌다. 하지만 그런 소재를 감칠맛 나는 영상으로 엮어놓으니 설득력 있는 유머가 됐다. 요란스럽고 속보이는 직접적 상품광고를 피해 은근하게 비유하는 간접적 홍보메시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인다.

이현우/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칼럼니스트 2nu@che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