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장커는 준비하던 단편 영화의 촬영 계획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설날이 되어 고향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마주친 고향 샨시성 펀양의 변해가는 풍경과 조짐을 보고 나서 계획을 바꿔 장편 <소무>를 찍었다. 샨시성에서의 촬영 경험은 지아장커의 의식을 과거로 돌렸고, 79년에서 90년까지 문공단의 유랑을 그려낸 <플랫폼>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는 두보의 싯구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것과 달리, 디지털 삼인삼색 <공공장소>를 찍기 위해 잠시 들어갔던 따퉁의 사람들과 풍경들을 잊지 못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신문에서 읽은 소년들의 절망적인 영웅극을 머리에 새기며 <임소요>를 찍었다.
지아장커는 착실하게 준비해온 축적물의 완성을 고집하기보다 자신을 가격하는 즉각적인 충동과 시급한 질문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영화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편이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그의 사촌동생(<플랫폼>에서 탄광촌 노동자로 등장하기도 했던 실제 탄광 노동자)이 지아장커에게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베이징은 어떤 곳인가요? 그래서 지아장커도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래,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금 이곳 베이징은 어떤 곳인가? <세계>는 그렇게 해서 시작된 영화이며, 네 번째 장편영화에서 처음으로 지아장커는 산시성을 떠나 지금의 거주지 베이징에 대해 물었다.
<플랫폼>에서는 유랑극단의 일원으로, <임소요>에서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여배우 자오타오에게 베이징에 위치한 세계공원 이야기를 듣게 된 지아장커는 선전의 세계공원에서도 일한 적이 있던 그녀를 주인공으로 다시 발탁했고(자오타오는 <스틸 라이프>에서도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녀의 상대역으로는 베이징전영학원 연기과를 졸업하고도 아무도 써주지 않는 통에 “해적판 DVD나 팔며 살아야겠다”고 푸념하던 젊은이 첸타이셍을 남자주인공으로 등용했다. 그들은 실제로도 힘들었고, 영화 속에서도 힘겨운 젊은이들이다.
세계의 명승지 모형으로 가득 찬 베이징의 세계공원. 그곳에서 무희와 경비로 일하는 연인 따오(자오타오)와 따이셩(첸타이셍). <세계>에서는 이 둘이 중심이 되어 그들과 관련을 맺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따오에게 희망이라면 애인 따이셩밖에 없지만 따이셩은 우연한 기회에 만난 여자 췬에게 눈을 돌린다. 그때쯤, 술자리에서 갑부에게 달콤한 유혹을 받는 따오. 그의 제안을 뿌리치고 나온 직후 그녀가 만나는 이는 함께 무희로 일하다 어느 날 떠나버린 뒤 지금은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여인 안나다. 둘은 서로의 처지를 슬퍼하며 부둥켜 운다. 한편, 베이징을 찾아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따이셩의 마을 후배는 사고로 죽고, 같은 경비원으로 일하던 사촌동생 얼샤오는 직원들의 돈을 훔치다 들켜 쫓겨난다. 그리고 프랑스로 떠나는 췬이 따이셩에게 남긴 문자를 본 따오는 따이셩과 결별을 결심한다.
떠나온 사람과 떠나는 사람,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과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 누군가 떠날까봐 걱정하는 사람으로 <세계>는 가득 차 있다. 베이징은 그들에게 거대한 ‘정거장’이다. 정신적 이산민들의 불편한 체류지다. 그런데 왜 이들은 스스로 자기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는 급작스러운 자본의 욕망이 만들어낸 부조화가 외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다. 동시에 <임소요>의 소년들을 낭떠러지로 이끌었던 부호의 세계, 그것들이 이제는 전격적으로 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서 세계공원은 손에 잡히지 않는 공연과 이미지가 펼쳐지는 거대한 가라오케 또는 비디오방에 가깝다. 거대한 플랫폼, 거대한 가라오케, 그것이 베이징이자 그 안에 있는 세계공원이다. 세계공원은 베이징의 역설적인 상징의 장소다. 안에 있는 바깥, 베이징 안에 있는 세계, 역설의 그 장소에는 외로움으로 사는 사람들만 있다. 한 장소에 살지만 떠도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배경으로 이 장소는 더할 수 없이 적당했을 것이다. 세계공원은 베이징이 욕망하는 것의 상징인데, 그 모조 속에 살고 있는 실제의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조화로 해결되지 않는 좌절이다. 만약 <플랫폼>의 인물들이 80년대의 시간을 거쳐 중국의 역사적 시간대를 지나온 문공단이었다면 <세계>의 인물들은 2000년대 이후 한 장소에 붙박혀 떠도는 자본화된 현재 중국의 유랑극단이다. 그들은 안에 있는 바깥에 갇혀 떠돈다. 부단히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멈춰 서 있지 않은 혹은 멈춰 서 있어도 불안함을 조장해내는 미장센은 그들의 떠도는 심리 상태에 대한 반영이자 모조된 세계의 불온한 욕망에 대한 반영이다. 근접해진 카메라의 거리와 지속적인 움직임은 여기 살고 있는 그들의 불안한 표면을 통해 그 안의 심리를 포착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허우샤오시엔의 두편의 영화가 생각나는데 자기들의 장소에서 주인으로서의 인식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심란함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혹은 머무는 장소에 발붙이지 못하고 떠돈다는 점에서 <남국재견>이, 그리고 진입과 머무름과 퇴거라는 개념적으로 단단한 연쇄에 의해 묶인 영화라는 점에서 <희몽인생>이 떠오른다. 이 말은 물론 지아장커가 허우샤오시엔의 미학적 적자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동일한 지점을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애니메이션과 시네마스코프는 지아장커의 것이 아니라는 편견을 낳을 텐데, 지아장커는 이것들을 미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베이징인들의 삶의 공기를 담는 그릇으로 가져왔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화려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베이징과 세계공원의 거짓 화려함의 슬픈 표면을 붙들기 위한 것이며, 베이징이 욕망하는 것의 반영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패의 욕망이다. 그저 버려둘 자는 버려두고 화려해지려는 베이징의 욕망. 그건 애니메이션 기법으로도 연결된다. 이 영화 속에서 애니메이션은 휴대폰으로 욕망의 문자가 전달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실패한 자들의 좌절된 욕망의 부호와 상실의 이미지를 지아장커는 애니메이션 삽입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모조화에 의해 버려지는 그들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자신의 영화에 포함시키고 싶었던 미학적 기법이기보다 그 인물들이 빠져 있는 상태를 절실하게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세계>는 여전히 지아장커의 영화다.
지아장커는 <세계>를 만들고 난 뒤 <스틸 라이프>를 만들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혀왔던 탄광촌 사촌동생의 삶에서 영향받았음이 분명한 샨시의 탄광촌에 관한 영화로 돌아갔고,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우리 죽은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세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리는 따오와 따이셩의 음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