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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트먼식 앙상블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
김혜리 2006-10-17

알트먼식 앙상블영화, 이번에는 아예 실황 공연 무대로 나서다.

(로마네스크 말고) ‘알트마네스크(Altmanesque) 벽화’라는 것이 있다. 로버트 알트먼(81) 감독의 영화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알트먼의 재기작으로 통하는 <플레이어>(1992)와 <숏컷>(1993)에 이르러 정립된 이 스타일은 가히 ‘배우 하렘’이라 할 만한 대형 앙상블 연기, 에피소드적 서사, 상대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고 겹치는 대사, 변두리를 맴돌다 치명적 행위를 저지르는 주변 인물이 특징이다. 알트먼 감독에게 필요한 재료는 적당한 공간과 배우가 전부다. 인물들은 잉글랜드 저택 파티의 손님이 되기도 하고(<고스포드 파크>),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여인들일 때도 있으며(<닥터 T>), 발레단(<더 컴패니>)이나 콘서트(<내슈빌>), 프레타 포르테 쇼의 참가자들(<패션쇼>)일 때도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한 장소에 인간 군상을 몰아넣고 가만히 기다리면 시추에이션은 저절로 ‘돋아난다’고 믿는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무대는 30년 넘게 전파를 탄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시의 라이브 라디오 쇼 현장이다. 시나리오의 공저자이자, 쇼의 진행자 G. K.로 직접 출연한 게리슨 케일러는 1974년 출발해 32년간 장수하며 400만 청취자를 거느린 실존 버라이어티 라이브 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기획자이자 진행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흥뚱항뚱 무대 위와 분장실을 돌아다니며 신세타령과 방귀 소리를 엿듣는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를 기리는 피츠제럴드 극장에서 매주 실황 생방송되는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컨트리, 포크, 가스펠, 라이브 CM송과 조크가 뒤섞여 구성지게 흘러가는 프로그램이다. 진화가 비껴간 듯한 이 고풍스런 쇼도 종막을 맞는다. 극장을 사들인 재벌이 건물을 허물고 주차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영화의 내레이터는 쇼의 안전요원 가이 누아르(케빈 클라인)다. 입성과 말투가 필름누아르의 진열장에서 갓 빠져나온 듯한 이 전직 사립탐정은, 천진하게 시대착오적인 쇼에 어울리는 문지기다. 장려한 낙일(落日)을 맞았건만 쇼의 진행자 G.K.는 동요가 없다. 고별사를 남기라는 동료에게 그는 추도사 같은 짓을 시작했다간 여생을 추도사만 하다가 보낼 나이라며 일축한다. 자매중창단 론다(릴리 톰린)와 욜란다(메릴 스트립) 자매는 추억에 눈을 붉히고 카우보이 듀엣 더스티(우디 해럴슨)와 레프티(존 C. 라일리)는 지저분한 농담을 기타 반주에 얹는다. 그럼에도 죽음과 소멸은 여지없이 마지막 쇼를 장악한다. 늙은 가수 척(L. Q. 존스)은 공연을 마치고 연인을 기다리다 숨지고, 욜란다의 염세적인 딸 롤라(린제이 로한)는 자살을 주제로 한 시에 사로잡힌다. 급기야 흰 트렌치코트를 입은 죽음의 천사(버지니아 매드슨)까지 공연장을 방문한다. 그녀는 <프레리 홈 컴패니언>를 듣고 웃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애청자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죽음과 소멸을 따뜻이 환대한다. 이는 알트먼 감독과 작가 케일러의 고향인 미국 중서부의 정서이기도 하다. 극중 표현에 따르면 중서부는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아는 고장이며 이곳 사람들은 “삶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끝’은 위협이 아니라 위안이다.

메릴 스트립의 얼굴에 슬금슬금 다가서는 줌인은 감독의 편애를 감추지 않는다. 분장실에서 크고 작은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조촐한 꽃밭 같다. 노래를 부르며 이완된 덕택인지 스트립은 근래 드물게 편안해 보인다. 메릴 스트립뿐 아니라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모든 배우는 즐기는 티가 역력하다. 풍자의 날이 선 알트먼의 전작 앙상블영화들과 달리 여기서는 모욕당하거나 내쳐지는 캐릭터가 아무도 없다. 근작들을 비디오로 찍어온 알트먼 감독은 이번에도 세대의 HD카메라를 아침에 켜고 밤에 끄는 시스템으로 배우들을 풀어놓았다. 반면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나쁜 의미에서도 느슨한 영화다. 낱낱의 일화들은 축적되지 않고 에필로그는 작위적이다. 영화 전체에 죽음의 테마가 드리워져 있음에도 그것을 의인화한 천사와 재벌의 하수인까지 등장시킨 것은 과잉이며 중첩이다. 현실에서는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멸종 위기의 짐승처럼 가엾게 그린 게리슨 케일러의 자기연민도 의아하다.

노장 로버트 알트먼은 심장이식 수술 이후 5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의 무릎은 티타늄이고 신장도 손을 봤다. 언젠가 알트먼은 자신의 ‘원본’은 아주 조금만 남아 있다고 선선히 말했다. 그리고 부언했다. “나는 (영화는) 그만둘 수 없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니까.” <프레리 홈 컴패니언>의 흥미로운 대목은 어디까지가 쇼고 어디부터가 삶인지 애매하다는 점이다. 그 금을 긋기 위해 안달하는 것은 극중 무대감독 한 사람뿐이다. 가수들은 큐 사인에 개의치 않고 마이크 잡기 1초 전까지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문득 노래의 첫 소절을 시작한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은 태초에 “쇼가 있으라!” 하는 신의 말씀에 따라 만들어진 양 무구한 흥취를 낸다. 그가 주최한 최고의 파티는 아니지만 여전히 알트먼은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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