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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사라진 세대를 위한 반성문
권리(소설가) 2006-11-24

일요일에 명동에 나갔다가 흥미로운 행렬을 보았다. ‘청소년 자유선언’ 페스티벌에 나온 중고생들의 퍼레이드였다. 피부도 뽀송뽀송하고 골격도 채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스크림>에 나오는 살인귀의 탈, 일제식 교복, 유관순을 흉내낸 듯한 치마저고리 등을 걸친 채, ‘조삼모사’를 패러디한 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켓에 적힌 내용은 진부했다. 체벌금지, 성적에 따른 차별금지, 두발제한 철폐…. 내가 학교를 다니던 10년 전과 아무것도 바뀐 게 없잖아? 하지만 이내 부끄러움이 들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발언할 권리’를 갖고 사회를 향해 말하고 있잖은가? 나는 무엇을 했지? 난,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울한 세대다. 98년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98학번임을 내세운다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우리 세대엔 별다른 특징이 없다. 우린 어떤 혁명이나 사회적 동요를 거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기 2년 전에 연대 사태가 일어났지만, 학업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큰 아노미라고 해봐야 IMF 사태. 그로 인해 반세계화 운동이 학생회의 의제로 들어왔다. 덕분에 4년 내내 ‘등록금 동결’ 따위의 현수막을 보며 등교했고, 토익과 학점을 걱정하는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386세대로부터 바통을 받은 듯한 학생회의 형식적인 구호를 들을 때마다 이질감에 휩싸여 함구로만 일관했다. 저들은 왜 운동을 하고 있을까? 왜 총장실을 점거할까? 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상을 좇고 있을까? 기형도의 <대학시절>이란 시가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았고, <산시로>의 낭만적인 대학 풍경조차 남의 나라, 다른 시대의 이야기로서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4학년이 되자, 극도로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대로 대학 시절이 끝나는 것일까?

얼마 전 한 연극을 보며 20대 초반에 풀지 못한 난제의 해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그 연극은 포스트 386세대의 현재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어떻게 현실이란 굴레에 적응하는가? 비극일까, 희극일까?

극중에는 재하, 광석, 현식- 아마도 유재하, 김광석, 김현식을 염두에 둔 재치있는 작명이리라!- 이 등장한다. 그들은 90년대 초반 학번이며 운동의 끝물을 조금 맛보았지만 졸업 이후 각자의 현실에 적응해 사는 이들이다. 학과 여자 동기이자 운동권으로 수형 생활까지 했던 유정이 모교 앞에 <오늘의 책>이라는 헌책방을 여는 날, 그들은 한자리에 모인다. 운동권 선배의 장례식 이야기를 화두로 자신들의 대학 시절을 돌아보던 그들의 입에서 김지하, 기형도, 김소진이란 이름이 나온다. 하지만 그 인물들을 곱씹으면 씹을수록, 자신들은 ‘포스트모던 운동권’이란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단 것을 알게 돼 묘한 열패감에 빠진다. 국문학 박사를 중퇴한 고학력 백수 현식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들추다 피식피식 웃을 때, 난 그의 웃음이 ‘살아남은 자의 열패감’에서 나오는 한숨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의문에 답이라도 해주듯이, 극 후반에 유정이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읊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난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라고? 나는 내가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우리 세대에는 임수경이나 임종석, 강의석이 없다. 우리는 X세대도, P세대도 아니었다. 68세대처럼 사회를 걱정하기보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데만 열중했다. 미시적인 폭력과 억압을 외면하고, 밥줄을 찾아간 불행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학을 떠났을까? 결혼을 했을까? 고시를 하다 실패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을까? 자신을 평생 책임져주지도 않을 곳에 출퇴근을 반복하며 서서히 기성세대로 전락해가고 있을까? 수많은 우리 세대들의 슬픈 뒤통수를 목격하며 나는 생각한다. 사라짐이야말로 살아지는 대로 살았던 세대가 겪게 될 진정한 비극이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