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특히 명실상부한 흥행 프랜차이즈 속편의 제작진이라면 누구라도 ‘이전과 다른 것’을 원할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자존심과 스튜디오의 돈이 걸린 문제다. <007 카지노 로얄>은 해외 영화리뷰모음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95%를 얻었다. 영미권 평단이 <007 카지노 로얄>에 일제히 손가락을 치켜세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속편이 하나 더해질 때마다 강도를 높여온 비현실적인 설정의 거품을 뺐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렇게 현실화된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가 색다르다는 것. <롤링 스톤스> <LA타임스> <빌리지 보이스> 등은 <007 카지노 로얄>이 “007 시리즈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높였다”고 결론지었다. 아버지 앨버트 브로콜리의 사망으로 1996년부터 제작자 자리를 물려받은 바버라 브로콜리는 이번에 본드의 교체와 함께 영화의 성격을 바꾸고 싶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007 골든 아이>(1995), <007 네버 다이>(1997), <007 언리미티드>(1999), <007 어나더데이>(2002)로 굳어져온 시리즈의 색깔을 바꾸는 것이었다. 브로콜리는 “원작에 충실하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슬로건으로 정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각색으로 오스카 각본상 노미네이트, <크래쉬> 각본·연출로 오스카 작품상 수상을 이룬 폴 해기스가 각색을 맡았다.
<007 카지노 로얄>은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쓴 15권의 소설 중 첫 번째 책으로 만들어졌다. 두번의 암살 임무를 수행하고 살인면허 더블오(00)를 얻은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는 국제 테러자금 운용자인 르쉬프(매즈 미켈슨)에게 접근해 자금줄의 배후를 알아내는 임무를 받는다. 자금 운용 실책으로 다른 방식의 원금 회수가 불가피해진 르쉬프는 몬테네그로에서 거액의 카지노 게임을 벌인다. 카드 게임에 소질이 있는 본드는 르쉬프가 이기는 걸 막기 위해 게임에 참여하고, 작업 도우미로 미모의 회계사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가 동행한다.
핵무기, 인공위성, 빙하 따위의 과장된 스펙터클을 자제한 <007 카지노 로얄>에서 제작진이 말하는 ‘현실감’은 매우 육체적인 느낌을 준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제임스 본드가 무식하고 거칠게 타깃을 암살하는 순간을 입자 거친 흑백 클로즈업 화면에 담아 보여준다. 이어 시리즈의 식순대로 감각적인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흐르고, 다음에 무려 5분에 달하는 추격 시퀀스가 덜컥 붙는다. 본드는 두터운 몸집으로 종이벽을 뚫는 반면 상대방은 좁고 얇은 테이블 사이를 사뿐히 넘어다닌다. 대조의 의도가 확연한 이 추격신은 정글에서 벌어지는 사자와 초식동물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기발한 무기와 장치의 도움이 없는 <007 카지노 로얄>은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과제를 해결하는 집요한 성격의 본드를 보여준다. 이성을 가진 ‘인간’ 본드가 아니라, 이성적이기만 하지 못해서 ‘인간적인’ 본드다.
인간적인 본드에 대한 의도는 본드걸 베스퍼 린드와의 관계에서 좀더 명확해진다. 이전까지의 본드, 특히 피어스 브로스넌이 집권한 이래 본드 시리즈에서는 본드-본드걸 커플의 사랑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007 카지노 로얄>의 본드는 본드걸의 목에 늘 걸려 있는 목걸이를 유심히 보다가 나중에서야 조심스럽게 “남자가 준 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 남자는 운이 좋군” 하는 질투심도 숨기지 않는다. 본드걸과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전직마저 고려하는 본드의 순정은 이 영화를 ‘변화’라고 받아들이기에 아주 좋은 근거를 마련한다. 여기에는 대니얼 크레이그의 섬세하고 믿음직한 연기가 주효했다. “키 작고 금발이고 촌스럽다.” www.craignotbond.com 사이트까지 만들면서 크레이그를 반대하고 나섰던 본드 팬들의 돈을 포함해 <007 카지노 로얄>은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3억달러 이상의 흥행수입을 거뒀다.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꼭 흔들어서만 먹던 까다로움도, 본드걸을 인조이로만 여기던 감정의 가벼움도, 첩보원 자질에 흠이 없는 불사신의 이미지도, 모두 버린 본드의 변화는 분명 시리즈의 변화를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점들을 종합할 때 <007 카지노 로얄>은 변화와 성공을 모두 이루어낸 속편이다.
그러나 “이 차의 기능은…” 하고 말해주는 Q박사를 만날 일조차 없다 해도, 적수와 마주앉아 한가롭게 포커를 치며 심리전을 벌이는 게 임무라고 해도, <007 카지노 로얄>은 어떻게든 아드레날린 지수를 높이고야 만다. 그 방법은 영화적 클라이맥스와 결말을 드라마 안에서 해결보지 않고 시청각적 스펙터클에 책임지우는 것이다. 하필이면 본드가 자신의 순정을 비키니 차림의 베스퍼와 물에서 놀다 나와 털어놓는다든지, 원작에서 훨씬 외롭게 묘사되었던 베스퍼의 비운이 영화 안에서 엄청난 규모로 부푼다든지. 읽을 분량이 얼마 안 남은 책을 성미 급하게 넘겨버리듯 <007 카지노 로얄>의 후반부는 시리즈 공식 액세서리를 하나씩 채워나간다. 그 같은 스펙터클들이 ‘어쨌거나 우리 본드는 무적 파워’라는 명제를 지지연설해준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냉전 종식 이후 죽 비어온 공공의 적의 자리를 무언가로 계속 채워넣으면서 설명없이 그 대상에 대해 증오심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다. 그게 바뀌지 않는 한 제임스 본드가 신사냐 옆집 운동선수냐는 영화에 큰 의미를 보태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돈·사랑·권력 따위에 눈이 멀어 M을 배신하고 MI6를 퇴직해서 CIA에 경력직으로 입사할 때에야 007 시리즈에도 진정한 변화 내지 혁명이 일어날까. 대니얼 크레이그의 연기는 생생하고 멋들어지기만 한데, 영국 MI6의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세상을 회의할 줄 모르는 굳어진 이성의 소유자로 44년째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