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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알모도바르의 나라, 한국영화에 취하다
김현정 2007-03-06

한국영화특별전, 김기덕 감독전, 홍상수 감독전이 열린 아르코 아트페어를 가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길을 건너 자그마한 골목들을 따라가다가 사이좋게 붙어 있는 정육점과 생선가게 동네를 지나면 아담하고 예쁘게 꾸며놓은 갈색 극장이 나온다. 지은 지 100년이나 되었다는 시네 도레는 영상자료원과 비슷한 필모테카 에스파뇰라가 전용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극장. 올해 한국을 주제국으로 택한 아르코 아트페어 행사의 일부로 지난 2월13일부터 25일까지 한국영화특별전이, 2월22일부터 3월11일까지 김기덕 감독전이 열리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미술과 공연, 문학 등을 포괄하는 아르코는 이 밖에도 마드리드 저축은행이 설립한 공공예술센터인 카사 엔센디다와 함께 2월7일부터 3월28일까지 매주 수요일 상영되는 홍상수 감독 회고전도 준비했다. 그 때문에 프라도가(街) 뒤편에 자리잡은, 새하얀 건물이 눈을 부시게 만드는 작은 광장 산타 아나의 돌바닥 위에는, 미술과 음악과 영화를 하는 한국인들로 인해 며칠 동안 낯선 이방의 언어가 울리곤 했다.

한국영화특별전에서 <바람난 가족> 등 10편 선봬

부산국제영화제 홍효숙 와이드앵글 부문 프로그래머가 한국에서 선정해 보낸 한국영화는 <바람난 가족> <달콤한 인생> <마이 제너레이션> <사과> <왕의 남자>를 비롯해 모두 10편이었고, 상영작에 포함된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과 <가족의 탄생>의 배우 문소리와 <다세포 소녀>의 이재용 감독 등이 마드리드를 찾아 관객과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도 많고 관객도 많으니, 제법 떠들썩해도 좋을 영화제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마드리드 대로변을 비껴난 한국영화특별전은 비교적 조용하고 아기자기하게 치러졌다. 길게 점심을 먹고 시에스타(낮잠)를 즐기는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오후 다섯시가 넘어서야 첫 번째 상영이 시작된데다가, 중년을 넘어 노년에까지 이른 관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세포 소녀> <마이 제너레이션>처럼 발랄하든 우울하든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들조차 말이다.

그러나 관객 반응은 적극적인 편이었다. 자막번역용 프린트와 정작 상영된 프린트가 달라 10분 정도 자막없이 상영되는 해프닝을 빚은 <다세포 소녀>는 “어르신들 놀라지 않았을까(웃음)”라는 이재용 감독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박수가 나왔고, 문화를 서로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세대차이를 포착하거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발견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된 다른 영화들, <여자, 정혜> <사과> <가족의 탄생> <마이 제너레이션> 등도 비슷했다. 필모테카 에스파뇰라 프로그래머인 로베르토 쿠에토에 따르면 한국영화특별전을 찾은 관객은 본디 아시아영화의 팬이었다기보다 평소 시네 도레를 찾던 이들이 몇편의 영화를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정팬이 된 경우였다는데도 그러했다. “젊은이들만 보이고 나이든 세대는 부재하다”, “청춘영화이고 우울하며 비관적이라는 점에서 짐 자무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등의 질문을 받은 <마이 제너레이션>의 노동석 감독은 관객의 질문이 예리하여 긴장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홍상수, 이재용 감독과 배우 문소리 관객과의 대화

이번 한국영화특별전에서 상영된 영화들은 지금까지 유럽에 알려진 영화들보다는 다소 낯선, 지금 현재 한국영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스페인 관객에게 이 10편의 영화와 비교할 만한 기준이 되는 한국 감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빈 집>이 현지에서 개봉하고 시체스영화제 등을 통해 친숙해진 김기덕이었을 것이다. 대형서점 체인인 프낙에도 김기덕 감독은 따로 DVD 코너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어떤 관객은 대사가 적다는 점에서 <여자, 정혜>를 김기덕 감독의 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하며 이윤기 감독에게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런 경향을 띠고 있는지 물었고, 또 다른 관객은 이 영화를 다른 아시아영화와 비교한다면 어떤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지를 물었다.

낯설기 때문에 거쳐야 하는, 그러한 관문 혹은 정보수집은 한 감독의 영화가 집중적으로 상영된 홍상수 회고전에서도 비슷했다. 예를 들면 한 관객은 남자들이 고깃집 문 앞에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한국 식당은 금연이냐고 묻기도 했다. 한국영화특별전에 참석한 부산영화제 허문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한국 관객도 비슷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미지의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는 어느 정도 그 국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카사 엔센디다의 조그만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은 진행자의 개입없이 감독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연관된 질문을 직접 던지며 다정한 열기를 뿜어냈다. 홍상수 회고전 스탭인 루시아 카사니는 “홍상수 감독은 스페인에는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감독, 현재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어서 소개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는데, <극장전>의 출발을 묻고 현재 서울의 풍경을 묻는 관객은, 또한 현재의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기도 했을 것이다. 낯선 나라의 관객에게서 한국 시네마테크의 현황을 묻는 질문을 받은 홍상수 감독은, 그 질문이 굳이 자신의 영화와 관계된 것이 아니더라도 그 관심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심포지엄에도 스페인 관객들 반응 뜨거워

그렇더라도 ‘한국영화의 오늘’이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 아르코에 참석한 한국 문화 관계자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현지인들이 찾아온 것은 의외라고 할 만했다. 이재용 감독과 배우 문소리, 영화사 봄 오정완 이사, 허문영 프로그래머가 패널로 참석한 이 심포지엄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인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현재 한국영화의 활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는 한국영화의 흥행에서 배우가 가지는 힘, 한국영화 부흥의 동력, 한국영화가 지니는 다양성의 근원 등이 논의되었고, 필모테카 에스파뇰라는 한국영화에 관한 이해를 높이는 생산적인 자리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딱딱한 문장보다도 “이번에 상영된 한국영화들이 서울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마드리드를 보아야 한다”며 관광 가이드를 자처한 어느 나이든 관객의 제안이 짧았으나 다채로웠던 한국영화특별전을 마감하는 자리에 좀더 어울리는 문장일 것이다.

파란색 천장이 예쁜 시네 도레에서도 그러한 방황이 빚어졌을지 모르겠다. 마드리드와 서울 사이를 헤매며, 애초 목적한 곳은 아니었다 해도 도착하고 보니 마음이 기뻐지는 장소에 머물게 되는, 그런 방황이 말이다.

노동석과 이윤기 감독의 재능에 놀랐다

로베르토 쿠에토 프로그래머 인터뷰

필모테카 에스파뇰라 프로그래머인 로베르토 쿠에토는 <서울 익스프레스: 뉴 코리안 시네마> <Beginning of the End: Trends in New Japanese Cinema> 등을 저술한 아시아영화 전문 평론가다. TV로 일본 고전영화들을 보며 아시아영화에 매혹되기 시작했다는 그는 영화제 내내 감독과 배우를 소개하며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고, 한국영화를 궁금해하는 관객처럼 열성적으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김기덕 감독을 매우 좋아하여 “스페인에 알모도바르가 있듯 한국에는 김기덕이 있다”고 말하는 쿠에토는 현재 마드리드 카를로스 3세 대학에서 영화사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스페인에 몇 되지 않는 아시아영화 전문가라고 들었다. 어떻게 아시아영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열다섯살 때였던가, TV에서 미조구치 겐지와 구로사와 기요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보게 되었고, 그 뒤 다른 일본영화들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미국과 유럽영화에만 익숙해 있었는데 일본영화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매우 행복했다. 그렇게 아시아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중국과 홍콩영화까지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1998년과 99년경에야 시체스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를 통해 보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는 다른 아시아영화들과 또 달랐다. 사회성이 짙으면서도 감독 개개인의 신선한 재능이 돋보여 인상적이었다. 2003년 라스팔마스영화제를 계기로 <서울 익스프레스: 뉴 코리안 시네마>를 발간했는데 이후 스페인에 한국영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올해 4월 스페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의 평론가들이 공동저술한 <노스페라투>라는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씌어질 이 책은 유럽 관객에게 아시아와 한국영화에 대해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한국영화가 다른 아시아영화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었나. =나는 김기덕 감독을 가장 먼저 알게 되었고, 이후 박찬욱과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보았고, 차츰 젊은 감독들을 알기 시작했다. 이건 매우 개인적인 느낌일 텐데, 일본과 홍콩영화는 미학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던 데 비해 한국영화는 사실적이고 현실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홍콩과는 다르게 한국의 액션영화는 피가 나오거나 하는 폭력적인 장면도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다. 그런 경향은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나타나는 듯하다. 또한 그 이면을 보면 한국영화는 굉장히 다양하다. 예를 들면 김기덕 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 상징적인 요소와 잔혹하도록 폭력적인 장면이 많다.

-김기덕은 스페인에서 유독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건 매우 재미있는 일이지만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김기덕 영화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외국 관객이 보아도 낯설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의 영화에는 성적인 묘사가 많고 힘겨운 관계가 등장하며 잔인한 장면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스페인에도 그런 영화가 많아 유독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게도 김기덕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빈 집>, 두편의 영화로 스페인에서 유명해졌는데, 그 영화들은 김기덕 영화 중에서도 가장 덜 폭력적이고 따뜻하다.

-영화제가 이제 중반에 이르렀을 뿐이지만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듣고 싶다. =필모테카 에스파뇰라의 고정 관객층을 감안해보면 아르코 아트페어 한국영화특별전(CINE COREANO@ARCO 2007)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한번 상영관을 찾은 뒤 다시 오는 고정 관객이 생겨났다. 관객과의 대화 참여율도 높은 편이다.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 내게 찾아와 새로운 한국영화를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관객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돋보이는 재능을 가진 <마이 제너레이션>의 노동석과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을 발견하게 되었다.

-CINE COREANO@ARCO 2007을 통해 한국의 젊은 영화들을 스페인에 소개하고 있다. 입장을 바꾸어 스페인의 젊은 영화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한다면 누구를 추천하고 싶은가. =90년대 스페인에는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처럼 훌륭한 감독들이 등장했다. 그 뒤 소개가 잘 되지 않았지만 다큐멘터리 등을 연출하다가 2006년 첫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다니엘 산체스 아레발로는 주목할 만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 <다크 블루 올모스트 블랙>은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스페인 고야상에서도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오스카 최우수 단편영화 부문 후보에 올랐던 나초 비갈론도가 데뷔작 <타임크라임>을 만들고 있고, 오스카 단편부문 후보에 오른 경력이 있는 감독 보르하 코베아가도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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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유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