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산만해서….” 한국의 부모들이 유난히 즐겨 쓰는 이 표현은, 동구 아빠 허진규(정진영)씨 입장에서는 앞뒤가 바뀐 말이다. 열한살 소년 동구(최우혁)는 지능이 평균에 못 미치지만 집중력과 끈기는 대단하다. 동구가 열정을 퍼붓는 상대는 학교와 주전자, 그리고 반에서 따돌림당하는 짝꿍 준태(윤찬)다. 동구는 해돋이를 손꼽아 기다려 학교로 달려가고, 점심시간 주전자에 물을 채워 친구들의 컵에 따를 때면 환희로 빛난다. 예민한 준태는 자존심 없어 보이는 동구가 밉다. 그래도 동구는 체육시간에 운동장 한 바퀴 대신 두 바퀴를 돈다. 한 바퀴는 달리지 못하는 짝의 몫이다. 학습 지진아를 배려할 의욕이 없는 선생님은 특수학교 전학을 강권하지만 아빠는 적응이 더딘 아들이 기왕 좋아하는 학교에서 졸업하길 원한다. 악운은 떼지어 오는 법. 집주인은 이사를 종용하고 동구는 교실에 설치된 정수기한테 물 반장 역할을 빼앗긴다. 주전자가 남아 있는 곳은 선수가 모자란 야구부뿐. 동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콤플렉스를 지닌 아이와 그 가족의 드라마라면 관객도 손금 보듯 훤하다. <날아라 허동구> 역시 정해진 베이스를 차례로 밟아 홈인한다. 다만 진루의 전략이 꼼꼼하다. 박규태 감독은 동구의 ‘적’과 장애물을 덤덤히 다루고, 동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행동과 습관을 힘주어 설명한다. <날아라 허동구>는 변명을 서두르거나 관객보다 먼저 감동하지 않는다. 방과 뒤 준태 집에 놀러간 동구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진규는 미친 사람처럼 빗속을 헤맨다. 과잉 반응 아닌가 싶다가도 동구가 친구 집에 초대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으리라 뒤늦게 짐작하면 애처로움이 더하다. 한사코 이사 갈 수 없다는 진규의 소동은 감상적인 중년 남자의 고집인 듯 보인다. 그러나 잠시 뒤 우리는 그 집이 단지 추억의 장소일 뿐 아니라, 동구의 간단한 일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눈금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규는 남들이 동구를 별스럽게 대하면 화를 내다가, 위기 상황이 오면 “우리 애가 너희 애랑 같냐!”고 일갈한다. 그 참담한 말을 뱉는 정진영의 연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코미디영화에는 종종 엄연한 현실의 조건이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해 장르적 세계의 오붓한 울타리를 지키는 ‘속임수’ 격 캐릭터가 있는데, <날아라 허동구>에서 그것은 야구부 권 코치(권오중)의 몫이다.
동구가 자연의 일부처럼 순수하고 초월적인 아이로 그려지는 점은 이 영화의 불안한 구석이다. 동구는 풀 같은 캐릭터다. 햇살이 뺨을 건드려야 아침이 온 걸 아는 것도 그렇고, 뿌리를 뽑아 옮겨 심으면 생장을 장담 못한다는 점도 그렇다. 동구가 보는 세상도 식물의 그것이다. 소년은 사람들이 마른 화초라도 되는 양 끝없이 물을 준다. 대상에 힘을 가해 그 상태를 바꾸어놓는 공격적 성취욕은 동구에게 없다. 따라서 방망이로 공을 치고 속도를 겨루는 야구도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동구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성장과 생존은 자기 안의 자연을 조금씩 숨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물 당번을 하려면, 그래서 야구부원이 되려면,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려면 동구도 눈을 부릅뜨고 공을 때려야 한다. 영화의 교훈은 실용적이다. 방망이를 못 휘두르면 공에 갖다대면 된다. 문제를 못 풀면 좋아하는 숫자를 예쁘게 쓰면 된다. 운동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 말고 진짜 슬픈 일 따윈 없다. 중요한 건 아웃되지 않고 살아서 집(home)으로 돌아오는 거다. 야구라는 경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돌아보게 깨우치는 것은 <날아라 허동구>의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