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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하고 완만하게, 다소는 허탈하게
2001-10-24

장진의 남다른 코미디, 그 웃음의 코드는?

● <킬러들의 수다> 마지막 장면에는 장진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썰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존재’를 이미 알지 못한다면, 반응은 지극히 썰렁하다. 저건 뭐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자연스런 웃음이 흘러나온다. 은근하고 완만하게, 다소는 허탈하게. <킬러들의 수다>의 웃음은 늘 그런 식이다. 하연이 ‘위대한 사랑’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할 때, 관객이 웃는 시점은 한참 뒤다. 재영과 정우가 낄낄거리지만, 하연의 내레이션이 ‘형들이 감동’했다고 말할 때에야 관객의 웃음은 절정에 오른다. 그건 포복절도할 웃음이 아니라 ‘참 내’ 하는 감탄사를 동반하는 아연한 웃음이다. 폐암으로 누구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자 모두들 발을 빼고 정우만 남는다. 상연이 정우에게 일을 맡기자 말싸움이 붙는다. 나는 왜 꼭 이런 일만 시키냐? 폐암으로 죽여달라는 게 말이 되냐, 담배를 피우게 해라, 요즘 폐암으로 죽는 사람이 어딨냐, 우리 아버지도 죽었다. 니가, 너 형한테 니가가 뭐야, 에이 씨발, 너 형한테 씨발이라고, 누가 씨발이라고 했어…. <킬러들의 수다>는 의도적으로 빗나가면서 썰렁하게 사람을 웃기는 영화다. 다소 신랄하고 톡 쏘는 맛도 있지만 동참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장진은 이미 연극계에서는 인정받는 연출가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기막힌 사내들>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대체로 평은 좋았고, <간첩 리철진>은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연극 흥행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장진은, 영화판에서도 나름의 영토를 확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킬러들의 수다>가 세 번째 연출작이니 ‘중견 영화감독’에 막 발끝을 들이민 셈이다. 영화판의 장진은 블랙코미디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브랜드를 충실하게 유지해왔다.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몰아넣고 벌이는 소동을 지켜보는 것. 그러면서 현실을 슬쩍 비치는 것.

장진의 인물들, 순수하고 얼빠진

장진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순수하다. 그들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순수’하기 때문이다. <기막힌 사내들>의 살인범조차도, 목적은 그냥 술집 하나 차릴 만한 돈을 모으는 것이다. <킬러들의 수다>의 정우는 임신부라는 이유로 살인을 주저하고, 결국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전혀 범상치 않다. 그런데 영웅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부적응자다. <간첩 리철진>의 전라도 4인방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유흥가에서 건달들에게 얻어터지며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조롱을 당하는 ‘얼치기’다. 하지만 간첩은 물론 국정원 직원과도 맞붙어 승리를 거둘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늘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다. 그게 장진식 웃음의 코드다. ‘다워야 하지만 답지 않은 것.’ 자신의 본분에 전혀 충실하지 않은 인간들.

<킬러들의 수다>의 부장검사는, 그놈을 잡아야 한다며 한 가지 이유만 댄다. 그놈을 내 손으로 목매달고 싶으니까. 뭔가 거창한 사회적 책임이나 개인적인 도덕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냥 복수심이고 개인적인 스트레스 해소 같은 거다. <기막힌 사내들>의 연쇄살인범은 어쩌다보니 국회의원들만 살해한 것이고, 경찰들은 단서도 없이 아무나 잡아들인다. 심지어 택시 운전사도 서울 지리를 하나도 모른다. <간첩 리철진>의 리철진은 남한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택시강도를 당하고, 고정간첩의 목적은 남한의 적화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다. <킬러들의 수다>의 킬러들은 단지 짝사랑하는 아나운서의 의뢰라는 이유로 무모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검사는 총을 들고 찾아온 킬러를 그냥 가라고 권유한다.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전문직업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려 애쓸 때, 균열이 발생하고 그 균열에서 웃음이 새어나온다.

웃음의 이스트, 아이러니와 타이밍

장진의 코미디는 주요하게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롯된다. 아이러니와 타이밍.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인간들이 벌이는 장진 영화의 소동은, 요술 거울에 비친 현실처럼 일그러진 즐거움을 준다. 답지 않은 인간들이 사방에 등장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선보인다. <기막힌 사내들>은 연극과 영화의 장르가 다소 어색하게 얽혀 있다. 단지 ‘범죄형’이라는 이유로 잡혀온 용의자들의 항변이 갑자기 뮤지컬로 변하는 장면은 신선하다기보다는 억지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기막힌 사내들>은 그렇게 태연하게 눙치는 스타일이다. 전라도 말씨로 비속어를 마구 섞어가며 범인들이 대화를 나누면 엄숙한 문어체의 자막이 해설을 해준다. 단순한 슬랩스틱으로 웃기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그 ‘차이’를 감지했을 때 웃음이 터져나온다. 장진이 보여주는 영상은, 한걸음 물러서서 찬찬히 바라보았을 때 더욱 의미가 증폭된다. 가볍기는 하지만, 그 웃음은 말초적이지 않다. 그건 웃음의 경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선사할 수 있는, 곱씹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기막힌 사내들>에는 그런 웃음이 정교하게 장치되어 있지만, 관객에게는 약간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연쇄살인’이라는 큰 사건에 우연히 얽혀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일관되게 흐르는 중심이 없다. <기막힌 사내들>의 인물들은 모두 주변인이다. 모두가 주인공인 동시에, 그 누구도 이야기를 끌어가지는 않는다. <기막힌 사내들>은 하나의 상황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극적인 어법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거칠게 말하자면 연극은 공간, 영화는 시간이 우세종이다. <간첩 리철진>이 <기막힌 사내들>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점도 ‘시간’이다. 택시강도를 당해 무장해제된 간첩 리철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죽인다. 웃음은 그가 시간을 죽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가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동안, 바깥 상황은 아주 급박하게 파란만장하게 흘러간다. 주인공이 숨죽인 상황에서 가장 활발하게 극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리철진이 나서자 긴장감이 정점에 달한다. 리철진이 박사를 납치하고 슈퍼 돼지의 유전자를 구하러 간다. 리철진이 박사와 함께 연구소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고, 역시 연구소 어딘가를 순찰하고 있는 경비원의 모습이 교차된다. 거기에 전시회에서 화이가 손바닥 조형물의 손금을 늘이는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세 장면이 교차되면서 관객의 숨도 가빠진다. 리철진은 과연 경비원과 맞닥뜨리고 자신의 운명을 끝낼 것인가. 그 물음에 답하는 장진의 방식은, 낭만적이다. 짧은 운명선을 늘여주는 순간, 리철진과 경비원은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간다. 철진과 화이의 사랑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이 철진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 이 장면에는, 또 하나의 감정이 중첩된다. 그렇게 늘여준 철진의 운명도, 결국은 역사 혹은 사회라는 거대한 틀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 <간첩 리철진>은 비극성을 담지한 블랙코미디다. 그 지점에서 바로 현실과 만나고,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영화, 아니 코미디는 끝이 난다.

화이가 철진의 운명선을 늘여주는 순간은, 장진이 영화어법에 익숙해졌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공간의 상황을 하나의 시간 속에 압축을 시키고 다시 늘임으로써 정지시키는 것. 이 장면은 <간첩 리철진>이 도달한 내용적, 형식적 정점이다. <기막힌 사내들>에서는 정점이 없다. 그보다는 각각의 상황에 무게를 싣는다. 4명의 ‘기막힌 사내들’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에서 교차편집되는 광경은 모의연습을 하기 위해 술병과 박스로 만들어놓았던 모형 거리다. 골목길을 달리는 장면과 카메라가 빠르게 모형 골목길을 달리는 장면이 교차되면 서스펜스가 아니라 아이러니가 늘어난다. 그들은 죽어라고 도망쳐 가지만, 결국은 ‘모형’ 안에 갇혀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장진의 영화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경찰들은 연쇄살인범의 목적이 ‘혼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돈’이었다. 간첩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개인의 파멸이다. 세상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논리와 담론으로 만들어지고 움직여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묘한 것은, <킬러들의 수다>에서 조 검사가 상연을 쫓는 장면에서는 아무런 아이러니가 튀어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서스펜스가 가중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빨리 달려라’라는 단순한 요구에 맞춘 것뿐이다. 연극과 영화의 어법을 마구 뒤섞은 <기막힌 사내들>이나 영화적으로 블랙코미디를 말끔하게 뽑아낸 <간첩 리철진>과 달리 <킬러들의 수다>는 아주 심플하게 할말만 한다. 현실을 인용하되, 현실이 아닌 일종의 ‘판타지’다. 장진 특유의 낭만성, 혹은 유치함도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전혀 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판타지에 녹아든다.

줄어든 수다, 지체된 웃음

<킬러들의 수다>는 제목과 다르게, 현저하게 수다가 줄었다. <간첩 리철진>에서 포복절도하는 때는 주로 전라도 4인방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얼토당토않은 개폼을 잡아가며, 온몸으로 슬랩스틱을 구가할 때 <간첩 리철진>은 웃음의 대로를 달려간다. 그러나 <킬러들의 수다>는 하연의 내레이션처럼 완만하고 어눌하다. 게다가 분위기 파악도 (의도적으로) 못한다. 가장 깔끔하고 신속정확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킬러들이 어리숙한 ‘수다’를 풀어놓는 덕에, <킬러들의 수다>의 웃음은 고의적으로 지체된다. 웃음은 주로 재현되는 상황의 말미에, 혹은 이미 사라진 뒤에 터져나온다.

그래서 <킬러들의 수다>는, <조폭 마누라>나 <신라의 달밤>처럼 정면으로 치받는 폭소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의뭉스러운 고양이처럼, ‘내가 뭘’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슬쩍 꼬리를 치는 것이다. 그건 장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대가도 있다. 비장함이 사라지는 것이다. <킬러들의 수다>의 정점이 되어야 할 오페라극장의 살인은, 웃음도 액션도 스릴도 아닌 맥빠진 장면이 되어 영화 전체의 흐름을 지체시킨다. 재영은 상연에게 따진다. 경찰들이 총동원된 상황에서는 임무를 완수해도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포기하자는 재연의 말에, 상연은 짧게 답한다. 오영란. 한 박자 느리게 답하는 재영의 대사는 엉뚱하다. 정말 오영란을 만났단 말이야? 이야기도 했어? 그리고 모두 임무에 착수한다. 하지만 상황은 어이없게도,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못한 채 마무리가 된다. 킬러들은 무사히 빠져나온다. 아니 그것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위험하다던 상황이, 놀라운 ‘비현실성’으로 휘발되며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연극으로 상연되는 <햄릿> 역시 <킬러들의 수다>의 은유가 아니라, 그냥 오페라극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하나의 ‘배경’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연극과 영화를 하나로 묶으려는 장진의 야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진은 연극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 오로지 왼손에만 폭탄을 쥐어줘야 하는 톨게이트장면, 정우의 변명에 따라 바뀌는 익살스런 회상장면, 조 검사가 킬러들의 집을 뒤질 때의 화면분할 등은 장진이 ‘영화’를 다루는 방법을 잘 보여준다. 연극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가장 밀도 깊게 영상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장진은 적절하게 사용한다. <킬러들의 수다>는 전통적인 영화어법을 사용한 <간첩 리철진>에서 장진식으로 몇번 비틀기를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 덕에 웃음이 전달되는 대역은 다소 좁아졌지만, <킬러들의 수다>는 장진만의 독창적인 웃음을 보여준다. ‘장난은 시나리오에서, 배우는 진실을’ 보여준다는 장진의 말처럼 <킬러들의 수다>는 재기넘치는 장난 속에서, 진실을 보여준다. 물론 그건 현실이 아니다. <킬러들의 수다>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현실과 거리를 둔, 거의 완전한 모조 공간을 연출한 영화다. 장진의 영화는 이제 막, 무대 위에 올라 자신만의 리듬으로 만담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봉석 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