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싸움은 이제 그만 난 철학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2001-11-02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1)

<아들의 방>을 처음 본 날 나는 약간 당황했다. 먼저 ‘삐딱이’ 난니 모레티 감독이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정서를 고전적인 구조 속에 간단하게 풀어낸 솜씨에 놀랐고, 동시에 왜 그가 자기 특유의 스타일과 거리가 먼 미학적 변신을 했을까 하는 의문에 뾰족한 즉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가족의 고통-고통의 정화라는 보기에 따라서는 진부할 수 있는 고전적 이야기 구조와 눈물을 자극하는 배우들의 열연 등 할리우드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매끄러운 영화가 <아들의 방>이다. 물론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모레티는 공식화된 이야기 구조를 부수는 실험정신, 당대의 사회문제를 물어뜯는 리얼리스트적 행보로 자신의 경력을 쌓은 감독이다. 영화형식에 대한 쉼없는 도전과 사회를 비판하는 불 같은 정열은 모레티 코미디의 큰 매력이다. 따라서 <아들의 방>은 모레티 특유의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에겐 실망을 줄 수도 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런 미학적·윤리적 변신이 모레티에게는 전례없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탈리아 국내의 주요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물론이고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써 모레티는 자신의 경력에서 최고점에 이른 듯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아들의 방>, 열광하거나 혹평하거나

지난 3월 <아들의 방>이 처음 개봉됐을 때 이탈리아의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며 극중 가족들의 고통에 슬퍼 울었고, 이탈리아의 주요 언론들도 “드디어 악동 모레티가 어른이 됐다. 이제 모레티도 대가가 됐다”며 이 영화를 앞다투어 찬미했다. 그야말로 칭찬 일색이었다.

그런데 공격은 이탈리아의 외부에서 왔다. 칸에서 첫 상영한 다음날 모레티의 오래된 동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찬물을 끼얹는 혹평을 했다. “모레티가 변했다. 당대의 증언자로 남는 데 피곤했는지 모레티는 철학자가 되려 한다. 자기 스타일의 본질을 잃어버렸고 비판력이 파업에 들어간 모양이다.” 모레티와 <카이에 뒤 시네마> 사이의 과거의 돈독한 밀월관계를 고려하면 이날의 기사는 뼈아픈 것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보도 이후 이탈리아 언론들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이탈리아에 23년 만에 다시 황금종려상을 선물하였다. 이탈리아로서는 76년 타비아니 형제의 <파드레 파드로네>, 그 다음해인 77년 에르마노 올미의 <나막신 나무>(L’albero degli zoccoli)가 2년 연속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게 마지막이었다.

모레티는 자신의 영화적 변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작품은 더욱 ‘개인적인’ 영화이고 또 더욱 ‘선명한’ 영화다. 이때까지 내가 연기해온 ‘극중인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나는 과거에 연기했던 인물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고픈 욕구가 있다.” 그렇다면 개인적이지 않고 ‘사회적인’ 영화, 선명하지 않고 ‘모호한’ 영화가 이때까지의 모레티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영화들을 되돌아보고, 극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할을 살펴보면 <아들의 방>을 통한 모레티의 변신이 그의 영화 경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최고가 아니라 유일한 감독”

모레티표 영화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첫 작품으로 81년 발표한 <좋은 꿈 꿔>(1981)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세 번째 장편이고 약관 28살에 만든 초기의 걸작이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다. 주인공은 현실의 모레티처럼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룻밤 사이에 스타감독이 된 미켈레 아피첼라이다. 모레티는 실제로 두 번째 장편 <에체 봄보>(1978)로 순식간에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모레티가 연기하는 미켈레 감독의 성격은 편집증/분열증을 앓는 인물(그래서 영미권에서는 모레티를 이탈리아의 우디 앨런이라고도 부른다), 영화광, 버릇없는 건방진 젊은이, 독불장군, 좌파 등으로 설명된다.

세 가지 이야기가 엇물린 구조를 갖는 <좋은 꿈 꿔>는 먼저 펠리니의 처럼 미켈레 감독의 영화찍기 과정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룬다. 미켈레는 <프로이트의 어머니>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그는 작업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지 않을 때 현장에서 낮잠을 자는데 ‘좋은 꿈’은 꾸지 못하고 매번 악몽만 꾼다. 이 악몽의 내용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좋은 꿈 꿔>는 영화감독 미켈레의 일상(영화찍기), 악몽 속의 이야기 그리고 영화 속 영화인 <프로이트의 어머니> 등 세 가지 이야기가 혼합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모레티는 “제작자들이 내 이야기는 밋밋하다며 돈을 대지 않아 이야기를 세개나 만들었다”라고 딴전을 부렸는데 사실 이 영화에도 발단-전개-결말 같은 분명한 형식은 없다. 에피소드들이 뒤죽박죽 혹은 단선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곳 비평가들은 모레티의 이런 극적갈등 장치가 없는 이야기 구조를 ‘수평구조’라고 부른다.

지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노인 프로이트 박사가 90살은 되어 보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입맞추려고 아기처럼 재롱을 떠는 모습은 광기의 청년 모레티를 엿보게 하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또 뮤지컬(영화찍기 과정), 호러(악몽 속 이야기), 그리고 코미디(프로이트박사의 어머니) 등 세 장르를 혼합해 자신의 영화사적 교양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로 모레티는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유럽 비평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지만 관객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러나 당시 베니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가 젊은 모레티를 80년대를 이끌 감독이라고 추어올려 모레티의 <좋은 꿈 꿔>는 창의력이 넘쳐 관객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것쯤으로 해석됐다. 80년대 이탈리아 문화계에서 칼비노의 영향력은 지금의 움베르토 에코에 견줄 만하다.

칼비노의 미학적 인준을 받은 뒤부터 나르시시스트 모레티의 신화가 본격 가동된다. 모레티는 못되먹기로는 트뤼포와 비슷하고 혼자 잘났다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하기로는 고다르와 비교된다. 모레티는 <에체 봄보>에서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좋은 꿈 꿔>에서는 이탈리아의 상업영화를 대표하는 선배감독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이쯤 되면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선배감독들을 잔인할 정도로 공격했던 트뤼포의 무례함에 뒤지지 않는다. 실제로 모레티는 무례한 눈길로 사람을 쏘아보며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는데, 이런 모습까지 트뤼포를 닮았다.

80년대 초 이탈리아영화계는 모레티, 델 몬테, 조르다나 그리고 피시첼리 등 4명을 차세대 선두감독으로 꼽았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모레티는 이런 분류 자체를 거부한다. <좋은 꿈 꿔>에서 선배감독은 모레티의 극중 분신인 미켈레 감독에게 “당신은 젊은 감독들 중 최고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미켈레는 정색을 하며 “나는 최고가 아니오. 나는 유일한 감독이요”라고 냉랭하게 쏘아붙인다. 동료들과의 관계를 끊고 스위스에서 자발적으로 은둔생활을 하는 고다르처럼 모레티도 동료 이탈리아 감독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탈리아영화계에서 그의 라이벌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해(베니니는 52년, 모레티는 53년생) 언론에선 은근히 싸움을 부추긴다. 그러나 모레티는 자신처럼 배우와 감독을 겸하는 베니니를 ‘좋은 배우’라고만 말하지 감독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감독과 배우 사이에 무슨 상하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모레티에게서는 폄하의 몸짓이 엿보인다. 자기 말대로 그는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감독이니까 말이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1)

▶ 난니 모레티의 영화일기 (2)

▶ 난니 모레티의 1인제작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