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풍선>이 허우샤오시엔의 단출한 소품일 거라고 얼마간 생각해왔다.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았고 그것이 오해임을 알았다. 지금 그 오해를 수정하려 한다. 참여한 평자의 수가 적어 예정에 없이 급히 끼어든 것이기는 해도 이 영화의 20자평에 별 셋 반밖에 주지 않았으니 나는 잘못을 저지른 것에 해당한다. 오르세 미술관 20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의뢰를 받아 제작하게 됐다는 배경이 암암리에 많은 이에게 이 영화를 일종의 기념품 정도로 보도록 선입견을 심어준 것 같다. 물론 ‘파리와 오르세 미술관의 현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고, 허우샤오시엔은 그것을 지켰으나, 영화에서 오르세 미술관의 내부는 단 한번 등장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 영화는 한 납품업자의 순진한 결과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빨간풍선>은 이를 데 없이 비범한 영화다.
<빨간풍선>을 처음 보았을 때 카메라가 손이 되어 인물들을 쓰다듬고 있다는 막연한 인상을 받았고 촉지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따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아름답다고는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심지어는 앞서 말한 어떤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아름답되 평탄해 보였으며, 세간의 평처럼 일상의 순리를 완숙함이 넘치는 대가의 기품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말할 뻔했다. 그런데 이건 우리의 입버릇이다. 그럼 타자의 겸손한 시선으로 파리의 생활을 그려냈다는 의견은 또 어떠한가. 물론 대만 매체 <스폿 시네마>에 실린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와의 인터뷰에서 허우샤오시엔은 이 프로젝트의 제작을 의뢰받은 뒤 “파리를 알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파리에 관한 책을 읽고 프랑스영화들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애덤 고프닉이라는 미국인이 저술한 <파리에서 달까지>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고 밝히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시몽과 그의 누이 루이즈가 그리는 그림 장난감과 파리의 카페에 흔히 비치되어 있는 핀볼 게임과 회전목마를 탄 아이들이 고리에 막대를 끼워넣는 놀이에 관해 이 책에서 알게 됐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그 책이 유용했던 이유는 파리를 말하는 미국인, 즉 “외부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그는 말한다.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라모리스의 <빨간풍선>도 그런 자료조사 과정에서 알게 되었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전작 <카페 뤼미에르>가 고즈넉한 도쿄의 어느 카페에 밴 커피향과 한적한 고서점의 책장 혹은 목조 건물과 전철에 대한 여행자적 찬미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빨간풍선>은 파리와 오르세를 경외하는 관광객을 위해 잘 포장된 관광엽서가 아니며, 거기에 머무르고 싶은 자의 마음을 유혹하는 풍경의 세밀화가 아니다. 그렇게 보는 건 이 영화의 무언가를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인상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파리의 ‘팩트’를 세심하게 수집했다는 것에 결코 이 영화의 숨은 비범함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범함을 캐묻는 과정은 보기보다 간단치 않다. 복잡해서 좋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통찰을 얻어내는 허우샤오시엔의 연출의 사연은 항상 그렇게 오해를 살 만큼 사려 깊은 어떤 복잡함을 지나서야 우리에게 간명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간명해 보일수록 더 신중히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형식의 그물이다.
허우샤오시엔을 매혹시킨 원작의 냉혹한 리얼리티
허우샤오시엔이 의뢰인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도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질문이 있다. 프랑스인이 아닌 대만인으로서, 모자란 사전지식 때문에(이 영화를 만들기 전 허우샤오시엔이 파리에 가본 건 두세번 정도라고 한다) 무언가 참조물이 필요했을지라도 그것이 꼭 알베르 라모리스의 1956년 단편 <빨간풍선>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은 그런데도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을 바탕으로 자신의 <빨간풍선>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의 도시를 배경으로 그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공기를 타고 하늘을 부유하는 풍선이라는 물체는 기능적으로 용이한 선택이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도쿄인(人) 혹은 오즈인(人)들의 삶의 혈맥으로서 허우샤오시엔이 이해한, 도시를 가로질러 삶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나르던 전철만큼이나 이 풍선은 지금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리라. 전철이 도쿄의 탯줄을 잇는 것처럼 풍선은 파리의 육체를 조감한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그러나 허우샤오시엔은 더 중요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영화를 본 뒤 (나의) 첫 반응은 이 작품이 1956년 파리의 어떤 리얼리티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도시의 공기, 그리고 시대의 사회적 시스템을 보여준다. 아이를 둘러싼 다양한 속박들이 드러나고 있다… 아이는 집에서, 학교에서, 버스에서 무언가 하는 것을 금지당한다. 나는 은유적인 술어(은유어)로 빨간 풍선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가 냉혹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등굣길에 한 꼬마가 건물에 매달린 빨간 풍선을 본다. 그 풍선을 들고 학교에 가려 한다. 하지만 그걸 들고 버스에 타는 것도 교실에 들어가는 것도 어른들은 허락하지 않는다. 집 안에 두기도 힘들어 창문 밖에 놓아둔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풍선은 생명을 얻은 듯 신기하게도 제가 알아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소년을 따라다닌다. 풍선을 금지하던 어른들은 이제 아이를 따라다니는 풍선을 보며 의아해할 지경이다. 그때 동네 악동 녀석들이 소년과 풍선을 쫓아 그 풍선을 빼앗는다. 간신히 아이가 풍선을 되찾지만, 곧 새총에 맞아 터져버린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결국 형형색색 한 무리의 풍선이 하늘을 수놓는다. 이것이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의 내용이다. 여기서 허우샤오시엔은 전후 파리에서 성장하는 소년을 둘러싼 냉혹한 리얼리티를 보았다고 말하는 중인데, 그것이 곧 허우샤오시엔을 매혹시킨 지점일 것이다.
같은 영화를 보고 오래전 프랑스의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다른 리얼리티를 말했다. 바쟁이 <금지된 몽타주>라는 글에서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을 언급하며 소년을 쫓아다니는 빨간 풍선에 관해 “풍선의 동물화”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지만, 내 생각에 이 글의 핵심은 이 표현에 있지 않다. 바쟁의 글에서 핵심은 그가 라모리스의 영화를 “공상적인 기록영화”라고 부른 데 있다. 그 스스로 “공상적인 기록영화라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라모리스의 의도를 가장 잘 규정하고 있는 표현인 것처럼 생각된다”고 쓰고 있다. “몽타주와는 반대로 공간의 단일성에 대한 전적인 사진적 존중 속에서 발전되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를 칭송한 바쟁의 이유다. 풍선이 동물처럼 소년을 따라다니는 트릭을 사용하여 촬영됐으나, 적어도 물리적 보존성을 해치지 않고(그러니까 시공을 짜깁기하는 몽타주가 아닌 방식으로)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상’과 ‘기록’을 결합한 바쟁의 적극적인 정의를 낳았을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영화평론가가 공상적인 기록영화라고 할 때 그것은 ‘재현적 리얼리티’를 감안하고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대의 위대한 감독이 냉혹한 리얼리티라고 할 때 그것은 ‘사회적 리얼리티’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쟁은 라모리스의 영화가 어떻게 연출되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허우샤오시엔은 라모리스의 영화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허우샤오시엔이 라모리스의 영화 위에 자기 영화의 집을 짓자 바쟁의 정의와 일순간 교차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라모리스의 소년을 둘러싼 냉혹한 사회적 리얼리티를 인식한 허우샤오시엔이 이 시대의 소년으로 하여금 냉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려 하니 이제 자신의 재현적 리얼리티가 도리어 방점이 된다. <빨간풍선>의 독창적인 재현적 리얼리티, 기적은 거기에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완성되는가. 그 점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를 말해야겠다.
1.카메라와 풍선의 일치된 시점
송(송팡)은 파리에 영화를 공부하러 온 중국 유학생이고 그녀는 7살 먹은 소년 시몽의 육아 도우미로 수잔의 집에 온다. 그녀를 고용한 시몽의 엄마 수잔(줄리엣 비노쉬)은 인형극 공연에서 목소리로 극을 설명하는 일종의 인형극 변사다(나는 이 직업의 정확한 명칭을 잘 모른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하되 급박한 사건이란 없다. 시몽에게는 등하굣길을 오가며 빨간 풍선을 보거나 쫓거나 하는 것이 전부이고, 송이 하는 일은 시몽을 보호하거나 같이 산책하거나 먹을 것을 해주는 정도다. 몇몇의 방문객이 들락거리고, 아래층에 있던 피아노를 위층으로 옮기고, 그 피아노의 조율을 위해 조율사가 찾아오고, 돈이 있으면서도 방세를 내지 않는 질 나쁜 친구를 쫓아내는 일 정도가 큰 일이다. 그리고 때때로 수잔은 이혼한 남편, 유학 간 딸과 전화한다. 이것이 허우샤오시엔의 <빨간풍선>의 이야기다.
풍선을 잡고 싶어 승강이를 벌이는 시몽의 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신이다(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 시몽과 풍선의 그 첫신이 지나고 다음 신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송의 모습이 보인다. 송은 다름 아니라 파리와 허우샤오시엔을 이어주는 중개인이자 이 가족 안에 들어와 관계를 형성시키는 의인화된 빨간 풍선인데, 그러므로 그녀가 첫 등장에서 길을 찾는 듯 오른쪽과 왼쪽을 잠시 오갈 때 그녀의 움직임은 확실히 전 장면에 등장했던 풍선의 궤적을 모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는 곧 이 생각을 접기로 했다. 왜 그때의 송의 움직임을 풍선의 움직임이라고 느꼈는지 역으로 생각해보았다. 송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라 실은 다른 것에 의해 그런 인상을 받았다는 걸 곧 알게 됐다. 사실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런 효과를 내고 있으며, 송이 아닌 그때 그녀를 잡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풍선의 궤적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 외에도 <빨간풍선>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물들의 주변을 맴도는 빨간 풍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비록 그 점이 인상이긴 해도 영화는 시종일관 그러하다.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유연한 살랑거림, 모서리없는 곡선으로의 이동, 수잔과 시몽과 송과 그 밖의 방문객 사이를 물 흐르듯 이어주려는 패닝 기법의 어떤 노력. 카메라가 풍선이 되어 그렇게 그들 주변 어딘가에 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나면, 그 풍선이 그들을 보고 있음을, 즉 풍선의 시점이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풍선이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시점의 인상이 <빨간풍선>의 재현적 리얼리티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서다.
2.모호하게 겹친 불균질한 시공의 출현
야외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송과 시몽, 그리고 그 신의 뒤를 잇는 회상신의 배열을 보다가 <빨간풍선>이 단지 시점(poit of view)이 아니라 관점(perspective)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에서 시점이 어디서 어떻게 볼 것인가의 자리를 결정짓는 문제라면, 관점은 그 시점을 결정짓는 세계관의 문제다. 이 장면은 <빨간풍선>이 시점의 문제를 넘어 관점의 문제를 숏이나 신의 배열에 의해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컨대 카페에 앉아 시몽이 송에게 이곳에 누이 루이즈와 과거에 자주 왔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때 숏은 바뀌어 이동 교각의 풍경을 한번 보여준 뒤, 그 다음 숏에서는 육교가 보이는 먼 풍경을 보여준다. 그때에도 송과 시몽의 대화는 계속 들린다. 그렇다면 이건 송이나 시몽의 시선에 잡힌 풍경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천천히 카메라쪽으로 한 소년과 소녀가 걸어온다. 처음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거나 대화하는 시몽과 송의 근처로 지금 오고 있는 다른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가까이 오니 소년이 시몽이다. 그러니 함께 있는 소녀가 누이 루이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송과 시몽의 대화는 화면 밖에서 들려온다. 그러므로 한번의 인서트를 거쳐 영화의 진행방향이 과거로 향했음을 알게 되는 건 찰나의 순간이며, 이미 과거의 이미지가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이런 전환은 사실 흔한 것이지만 이 장면의 놀라움은 소년과 소녀가 카메라 앞으로 오기 전까지 우리가 이 전환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지금 과거로 넘어가고 있어요’라는 신호를 보낸 바가 없고, 시몽은 계속 송과 말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두명의 시몽이다. 화면 밖 현재에서 송과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시몽과 과거 그 시간에 루이즈와 이 카페를 향해 들어오던 시몽. 소리/현재의 시몽과 영상/과거의 시몽이 얼마간 찰나적으로 공존하게 된다. 이 장면의 연출에 관해서는, 시몽의 주관적 기억이 화면 밖에서 흐를 때 허우샤오시엔의 객관적 개입이 숏과 신을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의 화법에서뿐이며 허우샤오시엔이 이 방면의 주술사다. 그걸 주관과 객관의 화법을 초월하는 영화의 자유간접화법과 연관해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동시대에 자유간접화법을 ‘시점’의 문제 안에서 교묘히 제기하여 작품마다 쟁점을 일으키며 항상 아슬아슬한 윤리적 경계 위에 있기를 자청하는 건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다. <히든>은 지독하게 흥미롭지만 그만큼이나 무의미한 시점의 놀이로 이루어져 있는 한편의 영화이고, <늑대의 시간>은 마지막 신의 그 시점 때문에 쓰레기에서 성스러운 작품으로 구제받을 만한 영화다.
하네케에게 자유간접화법으로서의 시선과 시점은 유혹의 기술이며 보는 것의 게임의 승패를 결정짓는 방식으로 중요하지만, 허우샤오시엔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건 관점이며,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을 채택하되 그걸 어떻게 배열하여 이 세계를 이해하고 직조하려는 결정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세계관적 화두로서 점점 중요해져온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에서 서기가 자기를 향해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에 관해 “나는 이 영화가 주관적으로만 흐르지 않기 바랐고, 그 호칭 자체가 이 영화의 객관적인 시점을 암시하고 있는 점이 있다. 그건 관점의 문제다”라고 허우샤오시엔은 이미 말했었다.
허우샤오시엔이 특히 <비정성시> 이후의 영화들에서 발전시켜온 위대한 영화적 성찰은 관점을 다성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을 고민해왔다는 점이다. <호남호녀>에서 과거와 현재가 은밀하게 역사적 교신을 나눌 때, <밀레니엄 맘보>의 내가 나를 보면서 내가 나를 말하는 방식으로서의 ‘그녀’라는 삼인칭을 사용할 때, <쓰리 타임즈>의 세 시기의 인물이 두명의 같은 배우의 육체를 통해 세개의 추상명사의 꿈을 꿀 때 허우샤오시엔이 관점의 차원에서 이미 그렇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빨간풍선>의 위의 장면은 그것이 숏과 신의 배열로 드러나 생기는 모호하게 겹친 세계의 출현이다. 그리고 정작 이런 장면이 가리키는 건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언제든 아무런 신호없이도 불균질한 시공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어떤 장면은 균질한 시간의 연속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불균질한 시간 그리고 각자 다른 소우주의 접합, 이질적 계통의 공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 한 장면뿐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건 두 번째 단서다. 이 영화의 구조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세 번째 단서가 있다.
3. 다양한 관점의 공존을 위해 존재하는 두 명의 창작자
“에드워드 양 같은 유학파들이 돌아와 듣도 보도 못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생소한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의 형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에드워드 양이 권한 파졸리니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서 관점의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감독의 관점으로 찍을 수도 있고, 주인공의 관점으로 찍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에드워드 양이 추천해준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고 오래전 허우샤오시엔이 깨달은 바는 그것이었다(영화이론가이기도 했던 파졸리니는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에 관해 특히 주창했다). 감독의 관점과 주인공의 관점이 섞이는 종류의 영화는 종종 있어왔다. 그것 자체로 독창적이고 비범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빨간풍선>처럼 이렇게 동등한 차원으로, 두 세계관의 모호하지만 공정한 존립으로 섞여 있는 예는 진귀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인물 중 한명인 송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그녀의 관점이 무언가 반영되었을 경우 좀더 중요한 사안이 된다.
어느 날 수잔은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 시몽을 데리고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송을 보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빨간 풍선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해요. 오늘은 시몽하고만 찍었어요”라고 송은 답한다. 송은 확실히 지금 시몽을 데리고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빨간 풍선에 관한 영화다. 심지어 허우샤오시엔은 그녀가 노트북 모니터상으로 편집 작업을 하는 걸 보여주고, 그중 세컷을 컴퓨터 모니터 화면상으로 처리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1)전철역에서 풍선을 들고 나오는 시몽. 2)풍선을 들고 가다 어느 건물 앞에 섰다가 그만 풍선을 놓치는 시몽. 3)시몽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풍선. 그런데 허우샤오시엔은 이 장면을 왜 굳이 보여주었을까. 송이 시몽을 데리고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대사로 처리하지 않고 왜 영상으로, 그것도 편집본으로 보여주었을까. 송과 시몽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보자.
송과 시몽이 처음 만났을 때 송이 친해지기 위해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이란 영화 봤니?”라고 물으니 시몽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자 송은 “1956년에 만들어진 옛날영화야. 어떤 꼬마와 커다란 빨간 풍선 이야기야”라고 친절히 말해준다. 그때 우연히 벽에 그려진 빨간 풍선을 발견하게 되고 송은 그걸 자기의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러고 나서 시몽도 촬영한다. 시몽이 송의 카메라에 담기는 첫 순간이다. 시몽을 주인공으로 한 빨간 풍선에 관한 송의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첫 만남은 좀 이상하다. 그들의 대화는 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송이 친절하게 빨간 풍선과 소년에 관해 들려주었을 때 왜 시몽은 ‘저도 빨간 풍선을 본 적이 있어요’라는 말을 한번쯤 하지 않았을까. 시몽과 빨간 풍선과의 승강이는 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이었으므로 송과 시몽의 만남 전에 보여지지 않았던가. 아직 서먹한 사이니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제안에 따른다면 다른 가능성이 더 크다.
순서상으로는 먼저 보여졌지만 시몽과 빨간 풍선과의 승강이는 시몽이 송을 만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을 수 있다. 혹은 그건 현실에서는 아예 없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인가. 영화 속 영화의 한 장면이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허우샤오시엔의 <빨간풍선>의 첫 장면은 허우샤오시엔의 연출이 아니라 송의 연출로 만들어진 송의 <빨간풍선>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게 쓸데없는 추론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은 굳이 모니터로 편집하는 송의 영화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지금 그녀가 시몽을 데리고 영화를 만들고 있음을 각인해준 것이다. 시몽이라는 한 인물을 허우샤오시엔과 송이 동시에 택함으로써 우리는 이쪽과 저쪽,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와 송의 영화를 가르는 확신을 잠시 미루어야 한다. 이제 시몽과 빨간 풍선에 관한 어떤 장면이 <빨간풍선>에 나온다 하더라도 혹은 시몽 혼자 나오는 어떤 장면일지라도 그게 허우샤오시엔의 것인지 송의 것인지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누구의 창작의 세계 안에서 발생한 것인지 매번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중요한 건 어떤 장면이 누구의 것인지 시원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바로 그 모호함의 상태로 공존하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을 위해 두명의 창작자가 나선 것이다. <빨간풍선>은 허우샤오시엔과 송이라는 두명의 공동연출자에 의해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이거나, 두 사람이 각각 완성한 두편의 영화의 장면들이 묶여져 완성된 한편의 영화다.
이질적 존재들을 공존시키는 허우샤오시엔만의 몽상적 리얼리티
세개의 호리병을 열어보니 시점은 인상이 되어 묘연하고, 관점은 불균질한 시공을 언제든 초래할 수 있으며, 두 창작 주체(허우샤오시엔과 송)의 두 세계는 모호하게 섞이고 또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알려진 것처럼 여전히 <빨간풍선>을 명약관화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많은 점이 모호하다. 왜 모호한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게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진짜 리얼리티라고 허우샤오시엔이 믿기 때문이다. 삶이 모호하고, 현실이 중층적이며, 시간은 공존하고, 우주는 다성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층의 세계가 마치 현실의 한 단면인 것처럼 스며들어 겹쳐 있는 것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라는 점은 여러 번 말해져왔다. 하지만 나는 알려진 것보다 그가 훨씬 더 그만의 방식으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현존하는 성격을 반영하고 본뜨려 하는 것에 관해 리얼리즘 형식이라 불러온 것이라면, 허우샤오시엔은 리얼리스트이며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의 방식으로 그러하다. <빨간풍선>의 비범함은 그저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린 것일 거라고 착각하게 할 만큼 복잡한 우주를 간명한 감동으로 바꾸어 전파한 그 리얼리티 재현의 방식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지금까지 말한 복잡한 사연을 누군가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몽상의 상태에 대해서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허우샤오시엔의 재현적 리얼리티란 눈에 보이는 세부들의 거짓없는 총량이 아니라 삶 안까지 묻어 들어온 몽상과 같은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의 독창성이다.
허우샤오시엔이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방식은 꿈결 같다. 꿈꾸어지는 리얼리티, 꿈결 같은 리얼리티, 그러나 잠이 아니라 잠과 깸 사이에 있는 리얼리티, 그는 점점 더 그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세계의 근본은 몽상처럼 모호하다. 그건 꿈의 구조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며, 초현실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몽상(夢想)이란 무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재현 영역 안에 있다. 현재에 스며든 모든 잠재적인 가능성들의 실존하는 기운이며 이질적인 계통들의 공존이다. 그건 모호한 리얼리티, 몽상의 리얼리티다. 바쟁이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을 두고 공상의 기록영화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허우샤오시엔의 <빨간풍선>은 몽상의 기록영화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부제를 ‘풍선몽’(風船夢)이라 이름 붙이고 싶어진다.
실은 허우샤오시엔이 자꾸 무언가를 교집합시키려 하는 것을 앞으로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 같다. 우주적 관계의 형성, 교집합의 우주에 관해 그는 장기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 우주는 어떤 끈들로 연결되어 있다. 이미 이혼했으나 아직까지도 수잔과 시몽의 삶의 자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잔의 남편 혹은 시몽의 아버지와 브뤼셀에 있는 수잔의 딸이자 시몽의 누이인 루이즈와 혹은 송이 만들었다는 또 다른 영화 <기원>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과 8mm 프린트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수잔의 아버지이자 시몽의 할아버지. 그렇게 <빨간풍선>에서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 존재하는 사람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 저기와 여기, 과거와 현재, 부재와 현존의 문제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 어떤 끈으로 묶여 관련성을 갖고 있지만, 그걸 말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몽상의 리얼리티를 이루는 몇 가지 지점들을 생각해보았을 뿐이며 그걸 수정하고 배운 것만으로도 벅차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시몽을 비롯하여 아이들을 인솔하여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온 한 교사는 어떤 그림 앞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던진다. 한 아이가 빨간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림이다. “자 이 그림 속에 뭐가 보이는지 한번 말해볼까”라며 선생은 아이들의 관심을 끌어낸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소녀”라고 아이들이 말하면 “그런데 소년일 수도 있다”고 선생은 답변해준다. “지금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라고 묻고 나서는 “찾으러 가는 것일 수도 잡아당기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림에 있는 어른들이 누구냐고 묻고 아이들이 “엄마 아빠”라고 답하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고, 또 한 아이가 “유령”이라고 말하면 그것도 역시 그럴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림이 슬픈가 기쁜가” 물으면, 이제 아이들은 제 스스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요”라고 말한다. 마침내 아이들은 그림이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해가 비친다”는 것도 발견한다.
이 그림이 나비파에 속하는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작품 <공>이라고 설명하지 않으니 그녀는 허우샤오시엔처럼 좋은 선생님이다. 아니 차라리 허우샤오시엔을 본뜬 영화 속 누군가다. 칸에서 <브로큰 플라워>로 감독상을 타던 짐 자무시가 허우샤오시엔을 향해 “당신은 나의 영화학교입니다”라고 숙연히 말했는데, 내게도 그런 것 같다. <빨간풍선>은 영화 선생님 허우샤오시엔의 또 하나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