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HIFFS Daily > 2회(20008) > 영화제소식
한국영화사의 사건, 장선우
2008-09-07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장선우에 관한 논쟁의 역사

<경마장 가는 길>

장선우 영화의 대부분은 나올 때마다 영화계의 화제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순어법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 운은 ‘불행한 행운’인 셈이었다. 흥행을 하면 한만큼 세간의 비판을 받았고, 호평을 받으면 받은 만큼 영화외적인 비난에 시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뜨거웠던 호/불호 현상은 산업과 감독 그리고 관객 모두가 함께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장선우라는 인물 자체’가 한국영화사의 사건 중의 하나였고, 영화산업과 평론가를 포함한 관객들 역시 그 사건의 공모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논쟁 역량이 부족했던 1990년대 사회적 상황

표면적으로 보자면, 1990년대는 80년대에 비해 논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논쟁적이지 않았다기보다는 복잡한 여러 현상을 아우르면서 논쟁할만한 역량이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군사 정권과 최고의 경제 호황이 함께 했던 시기, 군사 정권과 결합한 김영삼의 집권이 야기한 판단의 혼란(이 혼란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 시기와 맞물린 터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집권 반대 세력들의 이념적 혼란과 포스트모던한 문화 시대의 전개 등 90년대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온갖 재료들을 함께 끓이다가 갑자기 전원을 꺼버린 용광로 속 같았다. 한국에 켄 로치 같은 감독이 없는 것을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90년대를 본질적 차원에서 ‘대체로나마’ 담아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선우 영화가 일관성이 없어 보이거나 장선우 영화가 동조자들로부터도 비판받았던 사정은 이런 데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시대적 논쟁을 마련한 <경마장 가는 길> <거짓말>

<서울 황제>(1986)는 완성도 여부와 관계없이 지배층과 정부가 보기에는 어딘가 수상쩍고 불온해 보이는 것이었다. <성공시대>(1988)는 전작보다는 좀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돈은 신이었고, 마켓팅만이 복음의 실천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우묵배미의 사랑>(1990)에서 그는 세상에 대한 비판적 입장보다는 건강한 서민적 삶을 낙관적 기조위에서 그린다. 일관적이었다고 보자면 ‘이상-논리-실질’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의 일부는 이 영화들을 비판했는데, 그래도 ‘근본적인 냉담’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민중문화운동권 엘리트의 영화계 진출이라는 항목과 새로운 영화 경향에 대한 언론의 주목이라는 항목이 상호 작용한 결과 만들어진 기대감 위에서 진행된 ‘논쟁의 시작’이었다.

이후 <경마장 가는 길>(1991)은 그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표나게 갈라놓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감독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장선우는 포스트모던한 소설을 원작삼아 모더니즘 영화풍으로 삶 혹은 지식인의 허위성을 드러내는데, 감독, 평론가/관객 모두가 90년대의 혼란 속에서 제각각 자신의 그릇만큼, 입장만큼 받아들인 것 같다. 운동의 과제를 회피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냉소적인 태도와 빈번한 성적 희롱이 비판받기도 했다. 옹호와 비판 혹은 비난은 당시로서야 논리적이었겠지만 그것 역시 90년대 혼란의 자장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경마장 가는 길>을 둘러싼 논쟁은 가장 시대적이었던 셈이다. 이런 경향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거짓말>(1999)에서 계속 더 강하게 드러났고, 논쟁(적 혼란)은 더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경마장 가는 길>의 흥행 요인 중에 ‘성적 코드’를 제외할 수 없었듯이 이 후속 작품들에 대한 반응 또한 ‘성적 묘사’를 중심으로 달아올랐다. 일부 순수한 평론가들의 미학적 옹호 혹은 비판과는 별개로 영화는 저자거리에서 뒹굴다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1994년경은 YS 정부가 정치적 실패의 길을 걷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던 시기였고, 1999년은 국가부도사태의 와중이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영롱한 무지개 거품이 터지려던 무렵에 포스트모던하게 세상을 바라보거나, 모든 진실이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 아닌가? 자신이 살고있는 세상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다중에 의해 이 영화들은 ‘장삿속 논쟁’과 ‘윤리 논쟁’의 저자거리로 끌려다녔다. 이후 장선우 영화가 나올 때마다 ‘입장 표명’을, 누가 꼭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강요받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난처한 정치적 사태가 도래했다. 논쟁의 각축이었다.

지금 다시 장선우에 관해 논쟁해야하는 이유

<일본의 밤과 안개>(1960)에서 결혼식장을 무대로 정치 논쟁을 벌이고, <잊혀진 황군>(1963)과 <교사형>(1968)에서 일본 국민 전체를 상대로 그 정치적 위선을 비난했던 오시마 나기사보다는 <일본 곤충기>(1963)에서 동물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을 버무리거나, 포르노 감독과 동거녀, 막나가는 아들과 딸을 그린 <인류학 입문>(1966)을 만든 이마무라 쇼헤이에 더 가까워 보이는 장선우는 불행하게도 제대로 논쟁 혹은 연구되지는 않았다. 최소한 미적 퇴보나 반동성은 없었는데도 논쟁은 이 수준에서 맴돌았다. 즉 논쟁은 정신적 근저와 미학적 치밀함을 따지는 차원으로 넘어가질 못했다. 그 원인의 일단은 그에게도 있는데, 말하자면 화근은 불교성이었다. <화엄경>(1991)은, 크게는 지친 장선우의 구원처(혹은 대안적 세계관)였으며 작게는 영화제를 겨냥한 것으로 짐작된다(영화제용 영화를 탓하는 것은 샐러리맨의 넥타이와 양복 착용을 탓하는 것 아닐까?). 불자들의 신앙심 고양에 도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너무 직접 설교하는 이 영화는 앞의 영화들과 비교되면서 미적 퇴보 혹은 반동성으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영화외적인 비난이 제일 컸지만, 평가에서도 견해가 엇갈린 영화 내적 문제와 함께 불교적 세계관을 문자로 강조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1999) 역시 그런 의심을 심화시켰다(필자 역시 그랬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불교성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류의 영화는 너무나 이질적인 조합이었기에, 관객들은 장선우의 진심이나 성실성을 의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 근저를 따지거나 미적 불철저함을 따질 문제였지, 퇴보나 반동성의 문제로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논쟁의 혼돈이었다.

광주민중항쟁에 다르게 접근했기에 더 근본적이었던 <꽃잎>(1995), 윤리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히려 끝까지 밀어붙이는 정신력의 부재와 그 근저의 허약함 탓에 아쉬움이 남은 <나쁜 영화>(1996) 등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아름답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내뱉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꽃잎>을 경직된 어떤 기준으로만, <나쁜 영화>를 고식적인 영화관과 허망한 윤리적 기준으로만 말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장선우를 얘기하려면, 한국 영화사와 80년대와 그때 삼십대였던 한국의 어떤 남자를, 90년대와 그때 사십대였던 한국의 어떤 남자를 동시에 떠올리면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장선우는 ‘한국영화사의 사건’이었으니까 말이다.

관련인물

이효인/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