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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아시아감독 [5] - 김기덕

<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

자멸과 파괴의 이중주

여기 더할 나위 없이 악독한 인간이 있다. 먹이를 찾는 매처럼 표독스런 눈을 부라리는 야수, 그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 곁에 남자는 기척없이 다가서고 여자는 벌레보듯 놀라며 사내를 피한다. 기다리던 남자친구를 만나자 야수 같은 남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녀, 순간 사내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빼앗는다. 한낮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은 처음엔 그저 미친 사내의 행패에 불과했다. 여자에게 입을 맞춘 사내는 목격자들 앞에 무릎꿇고 여자는 남자에게 침을 뱉는다. 아무도 짐작 못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그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김기덕 감독의 7번째 영화 <나쁜 남자>는 ‘<악어>의 용패가 <파란 대문>의 진아를 만났을 때’라고 불릴 만한 영화다.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똘똘 뭉친 남자가 행복에 겨워하는 여대생에게 멸시당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악어>의 용패가 시체나 다름없는 여인을 강간했던 걸 떠올리면 <나쁜 남자>의 한기가 복수를 계획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창가에서 일하는 한기는 그녀를 창녀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어떤 뜻인지 모르고 쓴 신체포기각서가 젊고 예쁘고 꿈많던 여대생을 하룻만에 매춘부로 만들어버린다. 절망하고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사내는 몰래 지켜본다. ‘그래, 무너지고 망가지고 쓰레기가 된 자신을 봐라!’ 그렇게 생각하고 저지른 일인데 그녀의 육체가 짓밟힐 때 남자의 가슴도 찢어진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의식 때문에? 한기는 속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을 둘러싼 감옥이 어떤 곳인지는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이번에도 조재현은 김기덕의 나쁜 남자다. 악질적인 인간에게 남은 한 가닥 인간성을 부여잡는 드라마에서 조재현이 보여주는 비열함의 전형은 김기덕의 데뷔작 <악어>에서 고스란히 이어진 것이다. 감독 자신은 <나쁜 남자>를 “김기덕 영화라는 전체에서 7번째 시퀀스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는데 사실 <나쁜 남자>의 모든 이야기들은 낯익다. 특히 포항의 새장여인숙 앞을 찾아가는 장면에선 이번 영화가 <파란 대문>의 프리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여인의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들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주인공 한기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섬>의 여자 희진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유년기 체험이 녹아든 <수취인불명>과 달리 지금까지 자기 영화에 나왔던 다양한 요소를 뒤섞은 작품인 셈이다. 그것은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탐구하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그가 전작들보다 넓고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을 철저히 파괴한 남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여주인공의 심리에 동화되기가 쉽지 않은 것은 김기덕다운, 경탄할 만한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관련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학이 일종의 반작용을 추진력으로 삼는다고 봤을 때 <나쁜 남자>는 여전히 도발적이다. 자기 여자에게 몸파는 일을 시키며 길을 떠도는 나쁜 남자의 마지막 모습은 김기덕 영화의 정서적 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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