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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격리를 통해 생을 갈구하는 두 남녀 <김씨표류기>
이영진 2009-05-13

synopsis 쏟아지는 빚 독촉에 남자(정재영)는 자살을 결심한다. 한강에 뛰어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는 졸지에 밤섬에 표류한다. 여기저기 구조 요청을 보내는 그를, 세상은 싱거운 놈 아니면 미친놈 취급한다. 남자의 긴급구조 요청을 알아차린 이는 오직 한 사람. 심한 대인기피로 ‘방콕’하며 종일 ‘싸이질’ 하는 여자(정려원)다. 여자는 망원렌즈로 세상을 훔쳐보다 밤섬에서 홀로 기거하는 ‘변태’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의 ‘HELP’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생명체의 호소라고 여긴 여자는 큰맘먹고 외출을 감행하고, ‘HELLO’라는 메시지를 밤섬에 송신하는 데 성공한다.

남자는 죽어야, 산다. 사채 빚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의 마지막 선택은 유일한 재산인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여자 또한 죽어야, 산다. 따돌림당했던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인터넷에서 ‘신상녀’ 행세를 한다. 남자는 죽음으로 떨어지고, 여자는 공상에 매달린다. 현실의 중력을 이기지 못한 남녀는 생존가능성 제로인 지구라는 감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삶은 죽어야 사는 남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밤섬에서 자살시도를 행하지만 남자는 그때마다 ‘쪽팔리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희망을 품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오리배에 몸을 맡기고 못말리는 단백질 보급투쟁에 나선다. 죽지 못한 남자의 삶은 곧바로 세상과 담쌓고 살던 여자에게 전염된다. “아무도 없으니 외롭지 않을” 달 사진 찍기가 취미인 여자는 목을 매려던 남자가 이튿날 모닥불을 피우고 있음에 환호하고 그를 지켜보게 된다.

<캐스트 어웨이>의 남자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여자가 한강에서 만났다면 혹시 이런 모습? 아니, <접속>(1997)의 2009년 버전은 아닐까. 몸이 갇힌 남자와 마음을 닫은 여자, 그 두 남녀가 영화에서 단 한번 만난다는 설정 때문에 떠올리는 상상들이다. <김씨표류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삶 한가운데 불량 남녀를 던져둔 뒤 기적 같은 도킹이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영화다. 놀랍게도, 두 남녀는 일정한 격리를 통해 생을 갈구한다. 거리를 두고 상대(실은 자신)와 대면한 두 남녀가 무뎌진 소통의 감각을 일깨운다(자조와 포기의 내레이션은 점점 줄어들고, 보고-보여지는 두 남녀의 행위는 점점 적극적으로 변한다). 미운 오리새끼들의 뒤뚱거림에 맘놓고 웃을 수 있는 건 이해준 감독의 애정어린 시선 덕분이다. ‘마돈나’가 되기 위해 ‘천하장사’가 되어야 했던 소년(<천하장사 마돈나>)에게 보냈던 응원과 다르지 않다. <김씨표류기>는 불량 판정을 받은 이들에게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보라고 다독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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