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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아무도 모른다
김혜리 2009-06-19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1844

귀향해서 잠시 행복을 누렸던 전(前) 대통령의 때아닌 죽음이, 가슴속 줄 없는 거문고를 슬피 울리는 동안 완당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가 새삼 시야를 파고들었다. 거기 서린 절대 고독과 혹독한 한기가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옛 기록은 김정희를 일컬어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그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나 이욕(利慾)이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명문 출신 석학 김정희는 학문적 성취와 서화의 빼어남을 널리 인정받았으나, 현학적이고 오만하다고 하여 미움도 받았다. 55살이 넘어서는 두 차례 유배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1840년부터 8년에 걸쳐 김정희가 치른 제주도 귀양은 개중에서도 가혹한 위리안치였으니,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로 둘러친 집 안에 연금되었다. 김정희는 친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귀양살이 음식이 얼마나 거친지, 지네와 벼룩이 얼마나 성가신지, 외로움과 병고를 상세히 한탄했다. “허공을 뛰어오르려 해도 허공이 오르는 것을 받아주지 않고, 땅에 처박히려 해도 땅이 또한 뱉어내버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지경이니 미치고 거꾸러져서 나갈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김정희는 썼다.

교과서에 소개된 대로 <세한도>는 궁벽한 처지가 된 자신을 저버리지 않고 귀한 책을 구해다준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화답한 그림이다. 추운 겨울이 오고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뜻을 담았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갈필이 부비고 간 자국이 얼어붙은 벌판을 묘사하고, 가장자리만 선으로 그려 하얀 초옥은 그림 전체를 백설에 덮인 풍경으로 보이게 한다. 왼쪽 잣나무 두 그루와 오른편의 젊고 늙은 소나무 두 그루도 묘사가 간략하고 허허롭다. 가장 이상스러운 건 초옥이다. 지붕의 각도와 측벽의 원근법이 제멋대로다. 조선집에서 보기 힘든 둥근 창(문)도 독특하거니와 창의 두께가 보이는 방향도 이치에 어긋난다. 오직 뻥 뚫리고 이지러진 마음의 거처를 표상한 것이 아니고서야. 즉 이 모두는 실경이 아니라 집과 나무라는 관념이며 정신의 살풍경이다(완당은 <세한도>를 한여름에 그렸다). 화면 속 모든 것이 흐릿하고 메말라 보이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화가는 되직하게 갈아낸 초묵을 썼다. 척박한 환경과 쇠한 기운에 붓의 기운은 수척했으나, 글과 그림의 피와 살을 이루는 먹의 농도에서는 물러섬이 없었던 것이다.

<세한도>는 조형미 절묘한 미술품이라기보다 그림을 빌려 쓴 시나 편지다. 옛 선비에게 서(書)와 화(畵)는 구별되지 않았다. 하물며 난초를 초서와 예서를 쓰는 필법으로 쳤던 김정희다. 실제로 화가는 이상적에게 서한을 쓰다 문득 멈추고는 편지지 세장을 이어붙여 <세한도>를 그렸다고 추정된다. 노송의 침엽과 서명이 맞닿은 부분은 글과 그림을 절묘히 맺고, 모눈까지 그어 정갈하게 써내려간 서신은 <세한도>를 마무리하는 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세한도>는 결국 10m가 넘는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훗날 감명받은 조선과 중국의 학자들이 감상문을 횡으로 붙여 늘어뜨려서다. 참으로 기나긴 그림이요 사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