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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가 만난 사람] 문학평론가 신형철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09-07-20

한국 문학의 사려깊은 연인

예술은 인어공주의 숙명을 지녔다. 욕망과 사랑을 대놓고 발설하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태생이 벙어리 냉가슴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통역하고 위무하기 위해 비평가가 존재한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독자가 아직 만나지 못한 작품을 허기진 자가 밥을 찾듯 구하도록 간질이고 들쑤시는 평론이 있다. 최근 읽은 문학비평 에세이 가운데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커튼>과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이 그러했다. 그들의 글이 유혹적인 까닭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식의 극찬을 감각적 비유를 동원해 나열해서가 아니다. 명쾌한 동시에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왜 좋은지와 어떻게 좋은지를 두루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요구에 이들은 화답한다. 신형철이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고 썼을 때 나는 그가 명쾌하다고 생각했고,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가리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연립주택 같다”고 직유했을 때 소설의 온도를 감각할 수 있었다.

신형철은 등단한 지 5년째를 맞은 젊은 평론가다. 그의 글이 난생처음 활자화된 것은, 서울대학교 교지 <관악>이 주최한 문학상에 응모한 시가 가작으로 당선됐을 때였다. 2005년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라는 평론으로 계간지 <문학동네>와 인연을 맺은 신형철은 2007년 여름 같은 책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출간했다. 누워서 읽자면 손목이 시큰하게 두터운 이 책은 지금까지 4쇄를 찍어 평론집으로서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는 “작품 보는 눈이 밝다. 미문이되 단순히 꾸미는 문장이 아니라 핵심에 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면서 저변에는 여전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판단이 깔려 있다. 여러모로 고(故) 김현과 비교할 법하다”고 이 신형철을 평한다. 신형철의 평론을 지배하는 믿음은 명료한 문학이 좋고 불명료한 문학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명료한 것은 명료한 대로 불명료한 것은 불명료한 대로 그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문학이 좋은 문학이라는 신념이다. 시와 소설이 왜 아름다운지 규명하고 작품의 살결을 독자가 상상으로 만져보도록 돕는 데에 주력하는 신형철의 글 가운데에는 비판에 초점을 맞춘 평론이 적다. 비판하지 않는 평론은 비겁하다는 지적들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신형철은 불가피하다고 답한다. 쓸 수 있는 글이 한정돼 있는 현실에서, 쓰고 싶은 글, 잘 쓸 수 있는 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덤덤히 응한다.

다른 장르의 비평이 누리지 못하는 문학평론의 특권은 다루는 대상과 같은 도구를 쓴다는 점이다. 그 특권을 만끽하는 신형철의 평론은 더러 대상의 피부 밑으로 잠입해 문채(文彩)를 훔쳐오기도 한다. 예컨대 그가 문태준의 시집 <그늘의 발달>을 다룬 평문의 도입부를, 나는 인용된 시로 잠시 착각했다. 한 시인은 신형철 평론의 이같은 ‘에로틱함’을 콕 집어 “섹스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형철의 글은 작품을 향해 항해한다. 그는 대상에 푹 젖어들었을 때야 비로소 쓴다. 그의 글을 읽고 시인이 평론을 쓴다면 이런 글이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뉴웨이브의 일원인 김경주의 시인다운 묘사다. 많은 문인들이 책 발간이 늦더라도 신형철의 작품해설을 받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속내를 헤아려주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자식을 맡기고 싶은 부모의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그가 조교로 일하는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건물에서 만난 신형철은 음성과 몸짓이 나직했다. 인터뷰에 응한 것이 실수가 아닐까 근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 수줍은 청년을 어서 안심시켜 평론이 그에게 왜 불가피한지를 듣고 싶었다.

-현재 마감이 닥쳐온 글이 몇편인가요? 한달 평균 얼마나 쓰고 계십니까? =김소연 시인의 시집과 김연수 작가의 단편집 등에 들어갈 해설 세편을 7월 말까지 써야 합니다. 매체에 연재하는 짧은 글을 제외하면 80매에서 100매가량의 본격적인 비평은 한달에 한두편 쓰고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까지 대구에서 사셨다는데, 사투리를 전혀 안 쓰시네요. =대학 오고 나서 의도적으로 많이 벗어버리려 했어요. 경상도 말투는 힘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억양 자체가 격렬하다보니 말을 하고나면… 힘들어요. (좌중 폭소) 친구들 만나고 나면 진이 빠지죠. 그러다 경상도 말투가 토론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말하는 사람부터 힘이 들어가고 조곤조곤하지 않으니까 듣는 사람이 부담을 느껴요. 말의 형식에도 논리적이지 않은 뉘앙스가 있고요. 가끔 <100분 토론>을 보면 한나라당에서 나오신 분들이 경상도 말투로 억지를 부릴 때가 꽤 있잖아요. (웃음) 천천히, 편안하고 설득력있게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말투가 바뀌게 됐어요.

-대학 진학할 당시 확신을 갖고 국문학과를 선택하셨습니까? =책읽기와 글쓰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작가나 시인이 되자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문학에 처음 애정을 갖게 된 통로 자체가 평론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그 작품에 대한 해설이 읽고 싶어서 작품을 빨리 읽어치우기도 했어요.

-평론이 독서만으로 얻을 수 없는 무엇을 주었나요? =저에게는 시나 소설이 가진 불투명한 메시지와 아름다움을 삶으로 빨리 전환시키고 싶은 욕구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으로부터 뭔가를 빼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관해 명제화하고 싶었나봐요. 평론이 그런 부분을 제공해줄 때 짜릿함을 느꼈고요. 예술을 풍성한 명제로 바꾸는 작업에 끌렸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지닌 힘을 훌륭한 평론가들의 글에서 발견했던 것 같아요.

-고교 시절 동경하고 애독했던 선배 평론가는 누구였습니까? =독서량이 변변치 않았으니 너무 뻔해서 대답하기 민망하지만 기형도 시집과 그 뒤에 실린 김현 선생의 해설, 이광수의 <무정>에 실린 서영채 선생의 글 등이 있었죠. 그때야 누가 어떤 평론가인지 몰랐고 다만 정말 똑똑한 사람, 멋진 글이라고 감탄만 했어요.

-평론에 처음부터 뜻이 있었으니, 국문학과에 진학한 다음에 교과과정에 실망하지는 않았겠네요. =창작 수업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들어왔어요. 그런데 학부 때는 공부를 거의 안 했고 학점도 엉망이었어요. 전공에 대한 확신은 있었으나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게 답답했거든요. 입학하자마자 세계문학전집 뒤에 있는 자료 등을 보고 나름 세계 문학사 연표를 만들어서 연도순으로 읽어나갔어요. 고대부터 1960~70년대 작품, 밀란 쿤데라까지 듬성듬성하긴 해도 꽤 많이 읽었는데 그때 독서가 자산이 됐어요.

-문학동아리는 가입하지 않고 노래패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문학은 결국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너무 허랑방탕하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 노래패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문학을 선택한 동기와 연관된 이유도 있어요. 저는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답답하게 느껴져요. 선배에게 왜 집회를 나가냐고 물으면 우리 뜻을 밝히는 거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 뜻이 전달되는 건지, 다음에 나갈 때는 무엇이 달라지는지 납득을 못한 거죠. 제가 게임이나 스포츠에 전혀 무관심한 이유도 한판 승부가 끝나면 남는 게 없어서인 것 같아요. 그런데 노래는 곡이 남잖아요.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고, 테이프도 녹음하고. 그렇게 약간의 허영심을 충족하며 시간을 쏟았던 거죠.

안목은 비평가의 생명이다

-<경향신문> <시사IN>에 글을 연재했고 <한겨레21>에 2007년 가을부터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칼럼을 기고하고 계십니다. 매체에 따라 문체나 내용을 어떻게 조율하십니까? =본격 비평 계간지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죠. 논리의 힘으로 글이 아름다워질 수 있어야 해요. 문장에 멋을 부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반면 좋다고 판단한 작품을 일간지, 주간지에 소개하는 10매짜리 글은 제가 다루는 작품에 대해 독자가 호감을 품게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해요. 10매는 논리를 갖고 작품이 왜 좋은지 설득할 여유는 없는 분량이니까요. ‘호객행위’를 하려면 사람을 끌어야 하죠. (웃음)

-글쓰기의 기술적 측면에서 어떻게 하시는데요? 후크(hook)를 넣나요? (웃음) =그렇죠. 짧은 글을 쓸 때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미리 만들어놓는데 그것이 딱 나오면 다 쓴 듯한 느낌이에요. 사실 처음에는 짧은 글의 경험이 없어서 연재를 주저했어요. <경향신문>에서 10인의 시인에 관한 연재가 끝나고 탈진한 상황에서 <한겨레21>에서 청탁전화가 바로 온 거예요. “원고지 10장 쓰는 것이 긴 글만큼 힘들다”고 했더니 담당편집기자가 “그럼 훈련이 덜 되신 거네요. 훈련 좀 하셔야겠는데요”라고 말씀하셔서 그만 거기 넘어갔어요. (웃음)

-2007년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계간지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되셨습니다. 제안받았을 때 고민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정 문학지에 편집위원이 되면 해당 출판사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어지니까 편파성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그 회사의 기대작에 악평을 쓸 수 있겠는가라는 말인데요. =특정 문예지에 소속된다는 것이 주는 이점과 난점이 있는데, 난점에 대해 크게 신경 안 썼던 이유 중 하나는 계간지 <문학동네>를 만드는 집단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서영채, 황종연, 남진우 편집위원은 정치적 의견과 무관하게 예전부터 제가 좋아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에요. 또 편집위원이 되기 전에 들락날락하며 본 바로, 옹졸하게 자사 책 비판에 발끈하거나 홍보를 부탁하는 그릇의 회사는 아니라고 봤어요. 실제로 편집위원이 되고 나서도 쓰고 싶은 글을 100% 쓸 수 있었고, 코멘트를 부탁받더라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 거절할 수 있는 조건이었어요.

-출판사의 그릇도 문제지만, 소속이 굴레로 작용하지 않으려면 평론가 본인의 단단함도 필요하겠습니다. 굳이 요구받지 않아도 지레 배려할 수 있잖아요. =비평을 하다보면 관점과 취향에 완전히 부합하는 책이어서 신나게 쓰는 글이 있는가 하면 100% 동의할 수 없지만 장점이 있기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경우가 있어요. 후자의 경우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왜 분명히 존재하는 이 책의 단점을 빼놓고 장점만 말하냐, 거짓말로 쓰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죠.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과는 달라요. 저는 한계가 있는 작품일지라도 비평가가 자기 관점에 의해 장점을 발견하는 글을 쓴다면 좋은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본인이 보기에는 심각한 하자가 있는 작품인데 호평일색일 경우에는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습니까? =없진 않아도 크진 않아요. 제가 글쓰는 동력은 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데에 있는데, 단점의 경우는 나만 알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문학 좀 아는 사람 눈에는 뻔한 문제들이라는 거죠.

-단점은 모두의 눈에 보일 경우가 많고 장점은 본인만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인가요? =그러길 바라죠. 신선한 통찰이 없다 해도 최소한 나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라도 나오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네거티브한 일은 어떤 식으로 해도 성취감이 별로 없어요. 물론 거기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분들은 그렇게 쓰시는 게 맞겠죠. 하지만 비판적 지적이 뒤통수를 치는 성찰을 보여주는 예는 별로 못 봤어요. <개밥바라기별>이 황석영의 대표작이 아니라는 다들 아는 이야기를 굳이 글로 쓸 필요는 없다는 거죠.

-좋은 예술작품의 모습은 다양하고 나쁜 예술품은 서로 닮았다는 이야기도 될까요. =굳이 따지자면요. 물론 비평의 역사를 보면 한 시대의 정전을 무너뜨릴 정도의 뛰어난 비판도 있어요. 한데 그런 글들은 쓰기 어렵고 매우 희귀해요. 비평사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미처 발견 못한 작품의 생명력을 만들어낸 글들이 차지해요. 과거 평론가들도 밝혀내야 할 문학의 비밀이 이렇게 많은데 별로인 작품에 대해 별로라고 논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겠죠? 다시 말해 한 시대에 큰 영향력을 지닌 작품을 치밀히 비판하는 경우라면 모르되 당대 환경에 갇혀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는 작은 문제를 갖고 거칠게 비판하는 글은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에요. 영화평론의 경우, 훌륭한 비판적 평론을 많이 봤어요. 예컨대 정성일 선생이 호평받는 영화를 분해해 완전히 다르게 보도록 만드는 글을 보면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죠. 그러나 문학쪽 특히 동년배 평론가에게서는 그런 예를 별로 보지 못했어요. 문제는 어떤 글을 쓰고 안 쓰고를 용기의 유무로 보는 입장이에요. 그것이 글쓰기 동력이 될 경우 글의 논리와 아름다움은 2차적 문제가 되고, 썼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증거가 되어 자족적인 순환이 일어나는 폐해가 생겨요. “나는 백낙청을 비판했다”로 비평가의 색깔이 결정되는 건 사실 불행한 일이잖아요.

-네거티브한 비평의 필요를 주장하는 쪽은, 왜 잘 팔리는 책에 문학성 인증까지 해주냐는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은 몰라도, 과연 부족한 작품에 평론가의 상찬이 쏟아진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저 비평가는 관점이 다르거나 안목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되죠. 신뢰할 만한 비평가가 어처구니없는 작품을 칭찬하면 정말 부조리한 느낌이 들 텐데 그런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호의적 비평을 공격하는 분들의 문제점은, 자기가 보지 못한 미덕을 다른 평론가가 지적하면 거짓말이라고 속단한다는 점이에요. 미학적 관점의 차이를 문단정치의 맥락으로 코드를 바꿔버리거든요. 저는 미학적 관점 차이를 그대로 존중했으면 좋겠어요. 안목은 비평가의 생명인데 다른 이유 때문에 안목을 포기하고 뭔가를 쓴다는 건 옳고 나쁜 차원을 떠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죠.

몰락이 주는 고차원적 전율과 감동

-지난해 12월 펴낸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책의 도입부를 읽어보면 문학을 세계를 충격하고 타격하는 충차나 투석기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요. =문학에 한정할 수는 없는 예술의 기능이죠. 다만 활자가 그것을 가장 심도있게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는 다른 예술이 쓰는 매체보다 능력이 많다고 봐요. 특히 깊이 들어가는 데에 유용해요. 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가 한순간의 느낌을 표정으로 드러낸다고 해도 최고의 문장가가 같은 내용을 반 페이지의 글로 쓴 것을 능가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제목의 ‘에티카’라는 말을 선택하면서‘윤리’라는 말의 정확한 내포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도덕과 혼동되지 않도록 한다든지. =누가 현재의 제게 문학이 뭐냐고 물으면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이 거기 들어 있죠. 예를 들어 누가 봐도 법적으로 범죄자고 경제적으로 금치산자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인 한 사람이 있다고 쳐요. 세상의 어떤 판단 기준으로도 그를 구원할 수 없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맥락이 있을 테지요. 그 불가피함이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 하나를 줄 텐데 그럼 누가 이 진실을 보존하고 구원해낼 수 있을까. 그게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한 인간이 실패를 뻔히 예감하면서 어떤 길을 걸어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윤리적인’인간임을 문학이 설명해줄 수 있다면 위대한 일이 아닌가 싶은 거죠. 오이디푸스도 그런 인물이고 성경도 전 그렇게 읽었어요. 행간에 예수의 고뇌가 슬쩍 드러나는 순간이 있어요. 병사에게 끌려가는 순간에 한 제자가 칼을 꺼내니 예수가 만류하며 “내가 지금 당장 아버지께 얘기하면 열두 군단의 천사들이 나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리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죽어 세상을 구원한다는 예언이 실현되겠냐”라고 하죠. 전율이 오는 대목이에요. 예수라는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메시아가 온다”는 구약의 서사가 있었어요. 한낱 목수의 아들이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서사 안으로 들어가 죽음이라는 결말까지 뚜벅뚜벅 걸어가서 이야기를 종결지은 거예요. 그런 몰락이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전율이고 감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몰락하는 자에 대한 매혹이 평론집의 출발점인데요. 김영하와 박민규의 소설에 대한 평론에서 같은 몰락이라도 차이가 있음을 말하셨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에 나타난 문제 해결책은 쉽게 현실에 투항한 것이고 박민규 작가의 <핑퐁>이 선택한 결말은 초현실로의 쉬운 투항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몰락 가운데 무엇이 투항이고 무엇이 윤리적 몰락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고 보세요?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봐요. 인물이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지점까지 걸어가서 “저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지점에서 몰락을 선택해 사람들을 흔들어놓는 상황이 있죠.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그랬죠. 우리 사고 안에는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좌표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좌표가 흔들리게 되고 그때 윤리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 이 윤리는 정치·사회·문화적인 것을 근저에서 흔드는 근본적인 것이죠.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 남파 고정간첩이 남한의 간첩으로 거듭나는 장면은 매끄러운 결말이고 역시 잘 쓰는구나 싶지만 전율을 주지 않거든요. 작가는 그것이 현실적이라는 입장일 테지만요.

-그동안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를 두고 비평계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신형철 평론가께서는 종언이라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며 김중혁, 김애란의 소설도 잘 쓰여진 근대소설로 볼 수 있다고 쓰셨어요. 근대문학의 개념이 서로 다르지 않았나요? =사실 근대소설의 개념은 규정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에요. 가라타니 고진은 난 이것을 근대소설로 본다고 전제하고 이런 문학이 없으니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논법을 구사한 거잖아요? 근대문학의 개념에 동의해야 종언에도 동의할 수 있는데 저의 근대문학 개념은 처음부터 달랐어요. 거기서 가라타니의 주장의 핵심은 오늘날 문학이 사소해지고 힘이 없어졌다는 건데요. 그건 골방에서 혼자 문필가로 살 게 아니라면- 전 사실 그러고 싶지만(웃음)- 제쳐둘 문제는 아니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할 난제인데, 저는 문학의 정치적 영향력은 확실히 덜해졌을지 몰라도 문학에서만 얻는 근원적 흔들림, 윤리적인 영향은 없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가라타니의 주장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과 신념의 문제 같아요.

-<몰락의 에티카>에 실린 글 가운데 영화에 관한 평이 딱 한편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누아르>라는 제목의 <올드보이> 분석인데요.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텍스트가 분석틀과 정합되어서 쓰게 된 글인가요? 영화에 관한 글이 한편뿐인데 책에 포함시킨 이유도 궁금합니다. =저는 인간의 무의식, 운명, 죽음과의 대결을 모티브로 하는 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본적지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올드보이>를 보고는 그리스 비극의 재연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좋은 예술의 힘을 잘 보여준다고 봤고요. 그런데 마침 <계간 영화언어>로부터 글을 청탁받아서 쓰게 되었죠. 제가 영화평론을 썼다기보다 영화의 서사를 평했다고 생각해요. 영화에 관한 글이지만 저의 문학론과 관련있다고 판단해서 목차에 포함시켰고요.

-<올드보이>처럼 분석틀에 딱 맞아떨어지는 텍스트를 보면 거꾸로 비평적 해석으로부터 출발해 창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창작이란 본래 에너지만 갖고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랭보는 10대 후반에 시를 썼잖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큰 예술가가 되려면 자기 안에 비평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성경과 대결해 <최후의 유혹>을 썼고 박찬욱 감독이 <오이디푸스>를 읽고 <올드보이>를 만든 것처럼 위대한 텍스트들과 싸우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비평적 투쟁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우리 문학계를 보면 역사적으로 축적된 문제들과 맞서보려는 야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김연수 작가가 뛰어난 면이 있죠.

소설의 실력이 판가름나는 대목은 ‘대화’

-평론가께서 개개 작품평을 넘어 적극 옹호하는 비평을 썼던 문학 유파가 있다면 황병승, 김경주, 김민정 시인을 위시한 뉴웨이브 시인들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인상이었습니까? =제가 등단할 무렵 그 시인들이 하나둘씩 시집을 냈어요. 읽으면서 즐거웠고 한국 시의 주류를 이루는 ‘착한’ 시들과 다른 방식으로 쓰는 데에 호감이 들어 이 호감을 논리적 언어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권혁웅 시인/평론가가 그들에 대해 ‘미래파’라는 말을 쓰면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비판하는 쪽에서 “소통이 안되는 시”라는 거친 비판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더 쓰게 됐습니다.

-뉴웨이브 시인들의 작품은 기표/기의의 관계를 파괴하고 때로는 화자도 사라지고 없는 시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로 좋은 시다”라는 것을 말로 설득하자니 어려웠을 듯합니다. =솔직히 제가 쓴 글들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아요. 사람들이 비논리적 방식으로 그들을 비판하니까 나는 이 시인들에게 논리를 부여해주겠다는 욕심이 커서 이론적인 틀 만들기에 치중했어요. 정작 시인의 내면과 소통하는 글을 쓸 기회를 놓쳤죠. 제가 맘에 드는 글들은 그런 글이 아니라 내면끼리 노닥거리는 글이에요.

-언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시의 본령이기 때문에 문법으로부터 시의 자유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거예요. 그러나 독자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독자가 어쨌거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작품을 소화하게 되잖아요? 아름다움이란 파격과 기존의 기대가 충족되는 경험이 적정한 배합을 이룰 때 느껴지게 마련인데, 낯선 요소로 점철된 시를 과연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죠. =그렇죠. 하지만 낯선 것들이 낯익은 것들과 충분히 섞일 여지가 있는데, 그것을 아예 봉쇄해버리는 주장이 나왔기에 반론의 목소리를 크게 냈어요. 말씀대로 전적으로 낯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긴 힘들지만 시라면 약간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요. 인물과 사건이 필요한 소설과 달리 시는 그야말로 정서, 체험을 다 떠나 한 단어, 심지어 조사 하나 때문에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독서가 가능하거든요. 극단적으로는 음악이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이죠. 한국 시 비평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가 시를 자꾸 2차 담론으로 번역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한용운의 문장 스타일은 기억이 안 나고 <님의 침묵>의 ‘님’은 무엇의 은유다라는 기억만 남아 있잖아요. 지금도 시 비평의 대부분은 시인이 하고 있는 말이 뭔지 산문으로 옮겨놓는 거예요. 이 경향이 초래하는 문제는 메시지가 별것 없거나 전달이 잘되지 않는 시는 곧장 ‘소통 의지가 없는 시’로 규정된다는 거예요.

-시인의 반성을 의심하고, 여행이라는 소재는 서정의 알리바이가 아닐까 의심한다고 쓰셨는데요. 그 밖에 비평을 할 때 의구심을 자극하는 상투적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요? =멜로디는 참 아름답게 뽑아내는데 받쳐주는 사운드들이 아주 후진 대중음악가들이 있잖아요? 어떤 뮤지션은 사운드 자체가 너무나 신선하고 아름다운가 하면 어떤 뮤지션은 이 사운드나 저 사운드나 똑같죠. 시 역시 무슨 말을 하느냐를 파악하기 전에 사운드 차원에서 더 읽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는 반면 말이 팽팽하고 생동해서 솔깃한 경우가 있어요. 박상순, 황병승 시인이 그런 예죠. 소설의 경우 실력이 판가름나는 대목은 대화가 아닌가 싶어요. 전형적인 대화를 갖고 서사를 진행시키려고 들면 긴장감이 저하돼요. 왜 TV드라마 보면 전화 통화장면에서 “아, 그래? 걔가 그래서 거기서 그랬단 말이야?” 하고 상대의 말을 반복해 시청자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잖아요? 비평도 상투어가 있죠. 한국어 개념어가 빈약하다보니 한자 조어를 만들어내거나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을 써요. ‘웅숭깊다’가 한 예죠. 생각 자체가 신선하면 말은 평이할수록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데 생각이 평범해서인지 자꾸 어휘 차원에서 신기한 걸 쓰려고 해요. 저도 혐의를 벗어날 순 없겠지만요.

창작과 비평의 차이보다는 동질성 느껴

-비평가 조영일 씨는 평론집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비판은 칭찬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기존 평단의) 생각은 문학의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라고 썼습니다. 또, 평론가들은 호평을 통해 기존 시스템에 끼어들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썼고요. 여기에 직접 대응하는 반론을 쓰신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저는 한 비평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글의 모델을 두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한국 문단이라는 제도적 시스템이 미치는 영향이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다고 봐요. 또 지금은 문예지 사이의 색깔 차이가 크지 않고 모든 잡지와 문학 동인이 찾는 것은‘좋은 작품’이에요. 창비에서 신경숙의 책을 내고 문학동네에서 황석영을 내죠. 거기엔 물론 상업적 판단이 개입돼 있겠죠. 그런데 이것은 출판비평이 관여할 영역인 것 같아요. 전 조영일 형이 문단 제도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을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 형이 제기하는 논점은 “한국 문단에 이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고 저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거죠. 조영일 형이 “소설가의 소원은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 비평가의 소원은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일까?”라는 일본 비평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문장에서 자유로운 한국 비평가가 어디 있겠냐고 물은 글이 있어요. 그 질문이라면 정말 대답할 수 있어요. 제 소원은 좋은 비평을 쓰는 거라고요. 비평가의 권한이 있다면 문예지 편집위원하면서 필자를 선택하고 내 글을 문예지 지면에 쓸 수 있다는 정도인데 그게 권력인지 정리하는 역할인지는 모르겠어요. 비평가가 좋지 않은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둔갑시키고 훌륭한 작가를 소외시킬 힘은 없다고 봐요.

-제가 읽은 신형철 평론가님의 글 가운데 비판적 시선이 두드러졌던 평을 꼽자면 창비시선 300호 기념시집과 고은 시인의 <허공>에 관한 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창비에선 조금 길게 써서 잡지에 실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치적 진보와 미학적 보수성이 결합된 한국 특유의 분위기에 관한 글이 될 텐데, 오래전부터 가졌던 문제의식이라 쓰기로 했어요. 고은 선생의 경우 기본적으로 훌륭한 시인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그 정도 확고한 위치에 계신 분이면 칭찬을 더 얹기보다 비판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쓴 것입니다.

-비평 대상이 되는 글의 문체나 모티브를 아예 평문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영화 기사를 쓰면서 MTV 스타일의 영화에 대해서는 랩 같은 리뷰를, 우아한 시대극은 고풍스러운 문장으로 쓰면서 ‘어울려 놀고’싶은 때가 있긴 해요. =텍스트에 전염되어 쓰는 경우죠. 특히 문장에 매혹돼버리면 자연스럽게 흉내를 내게 돼요. 예를 들어 이병률 시집을 해설한 글은, 시인의 문장이 찰랑찰랑하는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어서 저 역시 물 위에서 노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라는 제도가 아니라 시적인 것 자체라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문학 다음으로는 음악을 사랑하는데, 노랫말은 어떻게 읽으세요? =너무 시처럼 쓰려고 한 가사는 도리어 매력이 없어요. 대중가요는 1차적으로 무슨 단어인지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본 상용어휘로 작사를 해야 하니까 시보다 훨씬 제약이 많죠.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대중가요 문법 안에서 최대한 끄집어낸 노랫말들이에요. 이소라 씨의 가사를 좋아해요. 평이한 말을 엮었는데 그 안에 무엇인가 깊은 것이 고이고 갑자기 그 단어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진정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위적으로 말을 뒤틀어야만 시가 된다는 편견을 깨는 데에는 이런 노랫말들이 참 유용해요.

-비평가란 ‘걸작’이나 ‘쓰레기’같은 표현을 비장하고 있다가 쓸 기회를 노리는 존재라고 쓰셨습니다만, 정작 본인은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평론가처럼 보여요. =긍정적인 극단적 표현은 가끔 써요. 절제를 못해서 핀잔을 듣는 쪽이죠. 좋은 걸 보면 참지 못해 흥분하는 성정이거든요. 등단 전에 제가 비평을 한 장소는 술집이에요. (웃음) 어떤 작품이 너무 좋을 때면 참지 못해서 술 먹자고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는 “이거 죽인다”고 떠들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좋은 걸 좋다고 말하고 싶은, 그것도 다른 사람은 흉내 못 내는 말로 좋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제가 비평을 하는 원동력이에요.

-흔히 비평가는 창작자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비평하는 사람만의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면 뭘까요? =저는 창작과 비평의 차이보다는 동질성을 크게 느껴요. 비평가 역시 문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창작에 대한 콤플렉스도 없고요. 비평가로서 제가 느끼는 행복감은 창작자들도 다들 느낄 만한 것들이에요. 글을 마친 성취감, 독자와 소통하는 즐거움, 드물게는 내가 썼지만 다시 봐도 괜찮다 싶은 글이 있을 때의 기쁨이죠. 어디선가 봤는데, 작가 성석제 선생이 어느 날 심심해 책을 한권 집어들고 재밌게 한참을 읽었는데 표지를 보니 당신이 쓰신 책이었다나요? (웃음) 그런 즐거움은 글쓰는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을 거예요.

-예술사를 서술하는 작업이 비평가의 최종적 목표 중에 있다고 보십니까? =자신의 취향이 한 역사서술의 근거가 될 만큼 탄탄하고 설득력이 생겼을 때 시도할 수 있겠죠. 역사서술이라는 것은 일종의 판결이기 때문에 그전까지 검사, 변호사 노릇을 해야죠. 어떤 작가를 밀어보기도 하고 증거를 찾아보기도 하는 모험을 충실히 하면 나중에 문학사를 쓸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문학 수업을 하고 비평가로 일한 시간 동안 좋은 문장에 대한 생각이 변했습니까? =과거에 쓴 문장을 보면 불과 2, 3년 전 것이라도 낯설고 민망해요. 지금은 내가 느낌을 정확하게 문장으로 포착했다면 그 문장은 분명 명쾌하고 아름답고 쉬울 것이라고 믿어요. 짜릿한 문장은 묘사를 잘해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 세계의 비밀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도저히 다른 문장으로 바꿀 수 없겠다 싶은 문장들이에요.

追伸 신형철은 인터뷰 전날 영화 <미쓰 홍당무>를 봤다고 했다. “영화에서 왕따는 전교생에게 왕따고 그의 특별함은 왕따 애인밖에 모르잖아요? (웃음) 평론가도 이 작품은 너네가 다 싫어하는 문제점 말고 좋은 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가 있어요.” 사람을 대하듯 텍스트를 대하는 것. 그 점이 신형철 평론의 열쇠구나 싶었다. 한때 비평의 틀로 정신분석학에 매료된 까닭을 그가 설명하자 확신이 들었다. “정신분석학은 이 사람을 빨리 뜯어고쳐 사회에 복귀시키려 하지 않아요. 왜 그가 히스테리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집요하게 경청해 이해한 다음 그 사람 자신에게도 납득시켜요. 정해진 규범에 증상을 끼워넣는 게 아니라 매 증상이 규범이 되죠.” 저마다 사연있는 인간을 비난하기가 어려운 딱 그만큼 그가 쓴 악평을 보긴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신형철이 쓴 악평만 모아 먼 훗날 비평집을 내도 재미있겠다는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제목은‘오죽하면’이 어떨지). 이날 신형철의 손에는 갈피 접힌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 들려 있었다. 앞으로 그가 문학 속에서 탐사해야 할 은밀한 생의 부피는 얼마일까. 어느 비평가의 농담대로 다음 빙하기가 닥칠 때까지 써도 부족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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