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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죽음을 내려놓다
김혜리 2009-11-13

카라바조, <잠자는 큐피드>, 1608, 캔버스에 유채

Caravaggio, , 1608, Oil on canvas

깔고 누운 한쌍의 날개만 없었더라면 온종일 골목에서 뛰어놀다 벌거숭이로 곤히 잠든 시골 소년이거니 여길 뻔했다. 카라바조(1571~1610)의 <잠자는 큐피드>가 묘사한 어린 신은 이상적 미소년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무방비하다. 아무 데나 열정의 화살을 쏘아대어 각종 분란을 일으키는 장난꾸러기 신이 잠들어 있으니 안심이 되어야 마땅할 텐데 안쓰러움이 앞선다. 황금전동을 베고 곯아떨어진 큐피드의 손은 화살을 놓았다. 활시위는 느슨히 풀렸다. 구경꾼들쪽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내민 볼록한 배는 뭔가를 무절제하게 탐식한 직후임이 틀림없다. 살짝 튀어나온 앞니를 드러내며 가볍게 벌어지는 입술에 귀를 기울이면 쌕쌕 나직한 코골이가 들려올 태세다.

<잠자는 큐피드>의 소재는 신성하고 구도는 고전적이나, 그 안을 채운 살과 피는 17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아무개의 것으로 느껴진다. 그림 속 큐피드는 저잣거리의 평범한 사내아이인 동시에 신이다. 관념과 실물의 이토록 과격한 융합은 어떤 불꽃을 지핀다. 유서 깊은 알레고리를 그리되 현실 속 개성적 육체의 충만한 세부로 구현하는 이 화가의 붓질에는 혁명가의 기상이 있다. 이데아와 감각적 미의 영역을 분리하는 강고한 울타리를 단숨에 무너뜨려버리는 무심한 저돌성이 감탄스럽다.

<잠자는 큐피드>의 묘사력과 조각이 부럽지 않은 입체감을 감상하고 나면, 슬며시 걱정이 밀려온다. 어린 신은 과연 잠든 것일까? 혹시 죽어버린 건 아닐까? 불안감의 근원은 의도적으로 제한된 색조로 표현된 큐피드의 창백한 피부와 그의 파리함을 강조하는 배경의 물컹한 어둠이다. 극단적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를 드라마적 장치로 능숙히 구사한 미술사 최고의 조명감독답다. 잠자는 신의 모습에서 불길한 상상을 끌어내는 건 카라바조가 죽음의 냄새와 질감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한 화가였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성경 속 사도와 성인들의 희생을 그린 카라바조의 종교화는 피를 뿜는 동맥과 사후강직에 접어든 살빛을 묘사하는 데에 망설이지 않는다. 실상 죽음은 카라바조의 근방을 맴돌았다. 여섯살에 역병으로 아버지와 조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카라바조는 불같은 성품의 소유자로 자랐고 평생 걸핏하면 폭행사태에 휘말렸다. 급기야 1606년에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러 생애 마지막 4년을 나폴리, 말타, 시러큐스를 돌며 도망자로 살았다. 법 집행자뿐 아니라 사적인 원한을 품은 정체 모를 자객도 그를 사냥하러 다녔다. 동시대 화가인 프란체스코 수지노에 의하면 이즈음 카라바조는 점점 행동이 기괴해져 옷을 입은 채 칼을 옆에 두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고 한다. <잠자는 큐피드>는 화가가 죽기 2년 전 작품이다. 화가는 소년처럼 스르르 활을 놓고 잠들고 싶었으리라. 혹은 큐피드라는 열정의 알레고리를 죽임으로써 격앙과 탕진의 고된 여정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으리라.